제52편
오래된 흔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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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유릭은 매우 당연하게도 로웨나에게 들들 볶여야 했다.
유릭은 왼손으로는 로웨나가 정리해 놓은 박쥐 사건 스크랩을 들여다
보며, 오른손으로는 저녁을 요리하며, 등으로는 로웨나의 공격에
따갑게 듣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해괴한 짓을 한 거야? 오늘 마르코랑 함께 약혼반지까
지 맞출 뻔 했다고! 세상에, 그 소심한 녀석은 예전에는 그리도 매
몰차게 돌아서더니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정말! 이상한데 박력이
라니까.”
“글쎄.”
유릭은 스크랩의 세 번째 장을 넘기고는 스튜 맛을 보았다. 로웨나가
다시 고함을 빽 질렀다.
“글쎄, 어쩌고 하면서 스리슬쩍 넘어가지 말란 말이야! 대체 왜 그런
거야?”
“글쎄.”
“야, 너!”
“글....”
그 때 현관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로웨나와 유릭이 돌아보니, 현관 앞에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미하일
이 서 있었다.
그는 사자처럼 포효하더니 우르릉 쾅쾅 집안으로 들어왔다. 입술은
깨어져 부풀어 있고, 눈도 퉁퉁 부어 있었다. 코는 흰 솜으로 틀어
막고 있었다. 막지 않은 콧구멍 언저리도 피딱지가 진 것을 보니,
처음에는 분명 쌍코피였다. 미하일이 으르렁거렸다.
“유릭, 로이!!! 너희 둘!! 마르코에게 대체 뭐라 말했길래 그 자식이
오늘 학교에서 나 보자마자 두들겨 팬 거냐. 어서 말해! 어서!”
로웨나는 기가 막혀하며 유릭을 보았고, 유릭은 저것 보라는 듯 턱으
로 미하일을 가리켜 보이고는 다시 요리와 정보수집의 본업으로 돌
아갔다. 미하일은 이를 부드득 물고는 로웨나에게 성큼 성큼 다가갔다.
“너, 대체 무슨 쓸 데 없는 말을 한 거야! 내가 남자를 소개해 주다
니,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냐고! 젠장, 너 때문에 오늘 내가
얼마나 끄으음찍한 일을 당했는지 알기나 하냐?!”
로웨나는 화가 치밀었다.
“상황 설명 제대로 하고 나한테 따지든지 말든지 하시지?”
“마르코 그 자식이, 내가 너한테 남자 소개해줬다느니 뭐라느니 하면
서 두들겨 팼단 말이다.”
“어머나, 마르코 씨가 그렇게 안하무인인 사람은 아닐 텐데. 이미 헤
어진 여자에게 네가 남자를 소개해 주든 말든 화 낼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아는 신사분이라고. 하긴, 마르코 씨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부터 좀 수상하기는 했어. 가만 있자, 그 때
네가 마르코 씨에게 뭔가 이상하게 말한 거 아냐?(미하일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아항, 분명 그랬겠군. 또 네가 로웨나를 농락하
니 뭐니 하면서 신나게 떠들어 댔을 테고, 소심한 마르코 씨는 자기
가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책임감을 느끼고 내게 헤어지자 했던
걸 테고. 그런데 그런 말을 한 네가 나에게 또 다른 남자를 소
개해 주었다는 말을 듣게 되서 그렇게 화를 낸 거였어. 아항, 알았다
알았어. 그날 마르코 씨가 왜 갑자기 그러나 했더니, 네놈 탓 이었어!”
“마르코는 무시무시하게 보수적인 귀족가문 출신이라고! 그 녀석이랑
결혼하면 너는 가수인생 끝이라고, 끝! 너를 위해서 헤어지라고 한
것뿐이야.”
“그건 내가 정할 바지 네가 오빠 행세하며 설칠 바는 아니라고 본다.
제발 부탁이니, 그 도움도 안돼는 짓 좀 그만 둬!”
유릭은 스튜 맛을 보았다. 사태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고집 센 미
하일이 또 바락 바락 외치고, 자존심 센 로웨나가 앙칼진 고양이처럼
쏘아붙인다. 아랫집 부부가 싸운다고 뭐라 할 처지가 아니다. 이
집도 만만찮으니까. 게다가 싸우는 폼을 보니 하루 이틀 싸운 것
도 아니다.
스튜가 완전히 익은 것을 확인한 유릭은 그릇에 담아 식탁에 놓았다.
로웨나가 고함을 빽 질렀다.
“한 번만 더 이따위 식으로 나오면, 그 때는 정말 쫓아낼 거야!”
“네가 멍청한 건 사실이잖아. 남자들이 조금만 잘 해 줘도 해실해실
웃으며 금방 넘어가고!”
“네가 보기에 그런 것 뿐이야, 이 얼간아. 그리고 잘 해주면 상냥하게
받아 줘야지, 대체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다고 퉁명스럽게 대하니?”
“에닌처럼 예쁜 애야 남자의 친절에 익숙해서 잘 안 속아 넘어가지
만, 너는 아니잖아. 너야 말로 남자가 조금만 친절하게 해 주면 네가
굉장히 잘난 줄 알고 홀딱 넘어가잖아.”
“뭐야?”
“내가 틀린 말 했냐. 하여간, 변변찮은 애들은 조금만 띄워 주면 자기
가 정말 굉장한 줄 착각한다니까. 너처럼 말이야.”
저건 좀 심했다. 로웨나가 눈을 부라리더니 미하일의 뺨을 갈겼다.
퍼억!(철썩, 이 아니었다) 정말 턱이 돌아갈 정도로 호된 한방이었다.
시작은 그저 장난이었던 유릭은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이거 말려야
하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둘 중 하나가 실려 나가
겠다(미하일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망할 자식 같으니! 너는 정말 최악이야. 적어도 너를 친구라고 생각
했는데, 나를 겨우 그 따위로 생각해 왔다는 거야? 그래, 네가 보
기에는 나는 아직도 그 때의 그 못생기고 샘 많고 못된 계집애일
뿐이지. 그 따위로 생각한다면 계속 그 따위로 생각해. 이제부터는
신경 안 쓸 테니까--! 나쁜 자식, 죽일 놈!”
“왜 그렇게 말을 곡해하는 거야!”
“곡해가 아니라 진실이니까! 너야 말로 어떻게 그 따위로 말 하는 거
야, 정말! 최악이야, 너!”
유릭은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먼저 식사를 시작
했다. 꼴을 보아하니, 미하일이 한심하기도 하다. 여자 앞에서 괜히
자존심 세우면 낭패다. 좋으면 좋다고 말할 것이지, 아무리 예전
에 못생겼다 어쩌고 하면서 놀린 여자라고 해도 저렇게 자존심만 세
우면 어느 여자가 돌아봐 주겠는가. 좋아한다고 말하자니 창피하고,
그렇다고 그 여자가 다른 친절한 남자 만나서 사귀는 것은 못 봐
주겠고, 로웨나가 만만한 성격도 아니니, 괜히 먼저 좋다고 말했다
가는 평생 질질 끌려다닐테고.
유릭은 미하일에게 로웨나가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생
각해 보니 헨리 카밀턴에게도 프리델라는 분명 아까운 여인이었다(
다행히 이혼했지만). 어찌하여 그런 여자들 옆에 꼭 저런 남자들이
있는 걸까. 운명의 수수께끼다, 정말.
유릭은 이쯤에서 싸움을 말리기로 했다.
“둘 다, 저녁 먹고 싸워.”
그러나 사태는 조금 더 복잡하게 되고 말았다. 저녁을 먹자마자(조금
도 남겨 놓지 않았다) 로웨나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가방을 꺼내어
옷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미하일이 펄쩍 뛰었다.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긴, 짐 싸는 거지! 당분간 나 안 들어올 거야. 너 혼자 살
든지 말든지 하라고.”
“젠장,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너 혼자 나가려는 거야.”
“너하고 같이 있으면 열 받아서. 세상에나, 나 몰래 내 험담이나 하면
서 남자친구랑 헤어지게 만드는 녀석이랑 어떻게 한 지붕에서 살아?
사실 너를 쫓아내야 정상이기는 한데, 네가 빈털터리인 걸아니까
그래도 쪼끔 봐 주기로 했어.”
“로, 로이.....야, 정말 나가는 거야?”
“물론이야. 유리, 가자. 어서 짐 싸.”
“응?”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유릭은 눈만 반짝 떴다.
“스토커가 또 쫓아오면 어떻게 하니? 얼른 오라고. 네가 할 일은 날
지키는 거잖아. 날, 지, 키, 는 거.”
무슨 스토커, 하고 물으려다가 유릭은 그 집에 들어올 때의 ‘거짓말’
을 간신히 기억해내고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이 펄쩍 뛰었다.
“야, 너희 둘!! 다, 단 둘이 또 어디를 간다는 거야.”
“아하, 유리 군은 에니를 좋아하고 있으니 아무 상관없잖아? 나를 정
말 귀중한 돌같이 여겨주는 남자하고 있는 셈이니, 나는 그 어디에
있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유리, 너 어서 짐 싸서 들고 와! 어서!”
유릭은 씩씩대는 미하일과 턱을 들고 그런 미하일을 내리깔고 보는
로웨나를 번갈아 보고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쉰 다음 미하일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정말 짐을 다 싸서 나왔다. 미하일이 더
욱 당황하기 시작했다.
“정말 가는 거야! 야, 멈추라니까!”
로웨나는 유릭의 팔을 휙 감아 당겼다.
“가자.”
“젠장, 당장 멈춰, 둘! 당장 멈추라고!”
“싫어.”
로웨나는 혀를 낼름 내밀고는 유릭의 팔을 더욱 세게 잡아끌었다. 유
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를 나섰고, 미하일이 당장에 쫓아
오려고 했다. 그런데 유릭이 나서기도 전에 로웨나가 달려들어 미
하일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미하일 카프첸코, 이 잘난 샌님아. 며칠 머리 식히면서 네가 뭘 잘못
했는지 잘 반성하라고! 일주일 있다가 돌아올 테니까, 그 때도 그
렇게 재수 없게 굴면 정말 쫓아내 버릴 거야!”
그리고 로웨나는 미하일을 안으로 던져 버리고는 문을 쾅 닫아 버렸
다. 당장에 뛰쳐나올 줄 알았는데, 집 안의 미하일은 예상외로 아주
잠잠했다.
로웨나는 유릭의 팔을 잡아 당겼다.
“어서 가자.”
“어디로 가는 건데?”
“어디긴 어디야. 홀라그로 성이지.”
“뭐?”
“너, 거기 백작님한테 범인 좀 잡아 달라는 부탁 받았잖아. 설마하니
일시키는 사람에게 방 하나 안 주겠니? 나는 뭐, 조수라고 하지.
그러면 방 하나 더 주지 않을까. 아, 물론 같은 방 줘도 상관 없어.”
“........너, 그러니까-”
“도둑을 잡던 말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어쨌건 돈도 없는데 어디
가서 방을 잡아! 여관방이 얼마나 비싼 지 알기나 해?”
“생각 없다고 했잖.....”
“너, 우리 집에서 공짜로 살았잖아! 그 정도는 날 위해 못해줘? 이
뻔뻔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렇다면 방값 내라고. 어서! 그 돈으로
여관방 잡게.”
“.......”
이거, 쥴리안보다 더 강적이다. 쥴리안이나 이 로웨나나 억지 부리는
데는 일가견 있었지만, 쥴리안과 다른 점은 이 로웨나의 억지는 들어
줄 수밖에 없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귀
기울였다가는 그 억지가 정말인 듯 휘말려 들기까지 한다.
“그리고 아직 답 못 들었어! 대체 왜 마르코에게 그런 말을 한 거
야?”
또한 더욱 집요하기도 하다. 유릭은 차마 솔직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 멍청한 녀석을 보는 순간에 그저 장난 치고 싶었던 것뿐이다. 무
도회 끝난 후로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는 미하일은 정말 질색이었고,
꼴불견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문득 그러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리 한 것뿐이다. 일은 일대로 꼬이고, 자신이 일으킨
이 분란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만 확인하고, 결국 그는 로
웨나의 팔을 잡아끌어 홀라그로 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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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일단 전반부 원고 넘겼습니다;; 이제부터는 밀린 글 쓰기
에 전념해야겠지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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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