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55화 (55/174)

제54편

검은 날개 조각#1

******************************************************************

“검은 박쥐라는 별명은 누가 지은 거지?”

“아, 전임 치안청장인 워튼 경이. 그런데 왜?”

“내가 들어도 너무 촌스러워서.”

“너한테 촌스럽다는 말 들으면 정말 최악인 거다.”

참으로 센스 없고 유치하고 촌스러운 명칭이다. ‘박쥐’라니. 차라리

그 괴도 신사 씨가 가명이라도 남겼으면(존이든 윌이든 마이크던

간에) ‘박쥐’라고 거론할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워지는

민망함이 덜 했을 듯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괴도 존’이 ‘괴도 박

쥐’보다 훨--씬 낫게 들린다. 대강 다른 이름으로라도 부르고 싶은

데, 뭐라 해야 할지. 유릭은 여러 후보를 떠 올려 보았지만, 전임

워튼 경이 아마도 자신과 매우 비슷한 수준의 ‘촌놈’이었을 거라

는 결론만 내렸을 뿐이었다.

로웨나가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물었다.

“네 이야기 좀 해 봐, 유리.”

“왜?”

“너도 심심하잖아.”

“물어 봐.”

“나이?”

“열여덟.”

“가족.”

“남동생 하나.”

“어디에 있지?”

“파난.”

“그 애는 몇 살?”

“열여섯.”

“닮았니?”

“전혀.”

“성격은?”

“.......아주 착해.”

“장래 희망은?”

“의사.”

“성적은?”

“꿈을 이룰 가능성이 높지.”

“소개해 주라.”

“......”

정말 심심해 미치려나 보다. 진짜 아기 고양이라면 눈앞에 강아지풀

이라도 흔들어 주겠지만, 로웨나의 경우는 뭘 어찌해야 하나 난감

하다. 불태워 버릴 듯 강렬한 로웨나의 눈빛을 견디다 못한 유릭은

침대 위에 책을 던져 버렸다. 로웨나가 조르르 달려와 그 책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캅의 책이네. 이 사람이 쓴 ‘고대사’는 내가 보기에는 꽝이야.

시대가 현재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잘 쓰지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헤매더라. 되도 않는 사실을 가지고 억지를 부린달까.”

“이유가 뭘까.”

“옛날 일을 같은 요즘의 기준으로 보려 하니까 그래. 그런데 아니라

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피우니까 답이 안 나오지. 역사의 석학은 석

학이지만, 석학이 고집부리면 정말 낭패라니까. 여태까지의 자기

의견이 자기가 노력해왔기에 옳은 의견이 된 것인데, 결국에는 자기

가 생각하니까 옳다고 착각하게 되지. 말귀 안 먹힌 달까. 역사 전

서도 도레 아슨이 전반부를 지휘했으니까 그 정도 괜찮은 책이 나온

거라고 봐. 애초 기획할 때처럼 모두 자기가 했으면 아마 절반은

구입하지 말아야 할 책, 내지는 절반을 위해 절반은 참아야 할 책

정도가 되었을 거야.”

유릭이 물끄러미 보자 로웨나는 생뚱맞게 마주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너, 눈이 왜 그래? 너도 오페라 가수라면 화장 진하게 하고 부잣집

남자들에게 눈웃음 치고 다니며 팔자 고치는 데만 골몰하는 그런

머리 나쁜 애들이라 생각했던 거야?”

“설마.”

“실력 없는 애들이야 그렇지. 그 바닥에서 오래 있어봐야 미래가 안

보이니까 부자라도 물어서 노후 걱정 없이 살고 싶어 하는 거라고.

물론 그런 애들은 어지간히 머리 나쁘고 순진한 도련님과 만나지

않는 한 실컷 농락당하고 버려진 다음에 신세타령하며 나머지 인

생 보내지. 아니면 늙은 할아버지의 네 번째 재혼상대가 되던가.”

로웨나는 책을 던져 버리고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순식간에

여기 저기 신산스럽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며 같이 내려다보니, 성의

정원에 치안청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검은 사냥개가 돌아다니듯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달빛 속에 검은 제복이 푸릇하게 윤곽을 드

리우고는 했다.

“아아, 나가고 싶다. 너무 지루하다고.”

로웨나는 투덜대며 원망스럽게 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둘은 브랫 키저 경감 덕에 방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백작은 오터가 살벌한 눈빛을 보내든 말든 로웨나와 유릭에게 가장

호화로운 게스트 룸을 주었다. 로웨나는 역시 여관이 아닌 이 성으로

오길 잘했다고 재잘대며 방으로 갔다.

유릭은 거대한 방에 먹힐 듯한 압박감을 느낄 새도 없이 푹 잠들어

버렸다. 그렇게 하룻밤 호화로운 방 안에서 자고 일어나자, 백작은

두 사람을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다행히 치안청장 ‘그놈’은 집에

돌아갔지만, 치안청 소속 군의 지휘관인 브랫 키저는 이 성에 머

물며 백작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침 햇살 속의 브랫 키저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매처럼 날카로워 보였으며, 동시에 뱀처럼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동작 하나 하나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느릿느릿하

고 무관심했다.

알렉산더는 모두를 소개한 뒤에 말했다.

“예고장에 적힌 날까지 성에 머물기로 했으니, 그날까지 모두 잘 지

내기를 바라네.”

아버지의 부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로웨나는 당장에 적대감을 표했

다. 특별히 티 나게 했다기보다는, 브랫이 뭐라 말을 걸어도 쏘아

붙이듯 새침하게 답하는 정도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두런두런 나오고, 로웨나는 이리저리 비꼬기만

했다. 아주 ‘예의바르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브랫 키저가 드디어

이리 말했다.

“그런데  숙녀분이 ‘흉악범’이 출몰할 시간에 성에 있는 건 매우 위험

한 일이 아닌가요.”

그 엄청난 말에 로웨나가 기가 막혀 하는 동안(유릭은 전혀 다른 의

미에서 기가 막혔다. 숙녀라?) 알렉산더 백작은 그럼 로웨나의 방

앞에 감시라도 붙여 주라 허락(아니 강요)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정오부터 로웨나는 계속 이 방안에 ‘갇혀 있게’ 되었다. 그들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로웨나는 당장에 유릭을 불러다가 조잘 대는 중이었다. 오터는

저딴 시건방진 계집애에게 대체 왜 휘둘리냐며 비웃었지만, 로웨나

가 ‘질투 나요?’ 라는 말을 해 대는 바람에 바람맞은 코끼리 같은

자세로 그 자리를 떠야 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며 밤이 고즈넉이 가라앉고, 성안의

경계도 점점 더 두터워지기 시작한다.

“정말 많이도 오는 군.”

유릭은 왠지 냉소적인 기분이었다. 와번 그로츠 마을의 연쇄살인 사

건 때 파견된 군인은 정확하게 다섯 명. 이제 막 징집되어 총은커녕

칼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여드름 가득한 소년들을 바라보며,

크리스펠로와 유릭이 가장 바쁘게 한 일은 그 애송이들을 ‘보호’하

는 일이었다.

그런데 훔친 액수가 아무리 어마어마하다지만 인명피해도 없는 이런

일에 저렇게 우르르 올 필요가 있을까. 유릭이 보아 하니, 제국 치

안청 소속 경찰은 모조리 온 듯 하다.

로웨나가 말했다.

“사람들 시선을 돌리려는 거야. 기자들도 잔뜩 왔을 걸, 아마?”

“그건 전혀 새로운 의견인걸.”

“처음에 이 일은 그렇게 큰 사건은 아니었어. 두 집이 털렸는데, 그

때는 예고장은커녕 도둑이 왔다 간 사실조차 몰라서 그 집 하인들만

실컷 두들겨 맞았어. 그것이 동일범에 의한 연쇄절도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세 번째. 그 후로는 거의 석 달 간 아무 일이

없었는데, 그 뒤로 예고장이 오기 시작했어. 나 잡아 봐라~ 하는

듯이 말이야. 그리고 그 일을 굉장하게 만든 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검열 받는 신문들과 알렉산더 백작, 니콜라스 추기경, 마지막으로

돌비체 수상 각하의 암묵적인 지원이야. 그리고-”

“그리고.”

“헨리 카밀턴 경의 사건은 잊혀지는 거야. 만약 아무 일도 없었어봐.

카밀턴 경이 사문회에 불려가고 또 암살 시도까지 있었어. 카밀턴

경은 너도 알다시피 서부 전선에서의 승리 이후에 온 국민의 압도적

인 환호를 받는 영웅이야. 그런데 그런 영웅이 끌려갔다는 걸 온 국

민이 알게 되면 분노하고 남군의 열화와 같은 항의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 사건 때문에 알려지지도 않고 있잖아. 온 신문에서 떠들

어 대는 건 홀라그로 성이 예고장을 받았다, 이거지. 너도 신문 봤지?”

로웨나는 오늘 아침 받은 신문을 흔들었다.

“이건 쇼라고. 그리고 도둑인지 뭔지 하는 분은 자기가 굉장한 줄 알

고 덩달아 설치고 있는 거고.”

유릭은 아무래도 사건 파일을 좀 더 주의 깊게 봐 두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요 며칠 간 카밀턴과 지내면서 그에

대한 위험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카밀턴이 지나치게 어

수선한 인물이었던 덕이다).

그런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릭은 입술에 손을 가져갔고 뭔가 이야기 해 보려던 로웨나는 잔뜩

실망했다. 문을 여니,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터였다. 유릭은

그 나무로 깎은 듯 무뚝뚝한 얼굴을 참으로 자주 본다고 생각하며

그가 전할 말을 기다렸다.

“주인님께서 자네더러 서재로 오라 시는 군.”

유릭은 로웨나를 가리켜보였다. 그러자 오터는 퉁명스레 말했다.

“저 아가씨는 내가 지켜주지.”

로웨나는 쀼루퉁하게 쏘아붙였다.

“아저씨를 어떻게 믿으라고요? 보아 하니 누가 나를 노리면 여기로

오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줄 사람 같은데.”

“주인님 명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주인님 명은 내 모든 것에 우선한

다. 비록 살쾡이 같은 너를 지키는 보람 없고 쓸데없는 일이라 할

지라도.”

로웨나의 눈 꼬리가 치솟았다. 이 상태로 놔두면 또 한참을 티격태격

할 추세라, 유릭은 오터에게 잠시 나가있어 달라 부탁한 후에 로웨

나에게 다가갔다. 로웨나가 큰 눈으로 유릭을 노려보았다.

“너, 갈 거야?”

“별 수 없지. 그리고 트레비스 씨가.... 아마도 이 성에서 무엇을 했는

지 상세히 물어볼 거야. 그 때 상세히 이야기 해 줘.”

“네가 그 아저씨한테 불려갔다는 거?”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알렉산더는 니콜라스 추기경 쪽 사람이고, 그런 이상 말했다가

는 오히려 의심 살 거야.”

“그러니 말 하라는 거야. 섣불리 숨기려 하면 오히려 더 의심 사니

까.”

그리고 유릭은 로웨나에게서 고개를 뗐다.

로웨나가 측은하다는 듯 유릭을 보며 말했다.

“밤낮 의심 사는 인생이었구나, 너.”

“그런 만큼 익숙하지. 내 처지에서 의심은 곧 죽음이나 파멸로 직결

되니까.”

“행운을 빌어주지. 그리고 되도록이면 네가 그 박쥐인지 생쥐인지 하

는 녀석을 잡기를 바란다. 아아, 혹시 알아. 뒷걸음치다 밟아 보니

그놈 옷자락일지.”

“상금 받으면 너하고 나누지.”

“해 준 일도 없는데, 뭐.”

“파난에서는 행운에도 값을 치르거든. 있다가 보자, 고양이 여왕님.”

“잘 해 봐라, 까마귀 임금님.”

유릭은 그 인사말에 웃으며 방을 나섰다.

****************************************************************

작자잡설: 정말 끈질기게 치근덕대는 군, 알렉!  자꾸 그러면.....‘농락

당한다’

더운 여름이군요. 잠도 안오고............ 그래서 열심히 맥주를 마신답

니다. 더운 여름날에는 역시 맥주가 최고!(어이;;)

오늘은 완전히 좌절 모드 였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에는 다른 사람 보다

몇 배로 서툴어서, 이렇게 확인할 때마다 좌절좌절소심소심 해 집니다.

제발 나더러 책 표지 문구 같은 거 적어 달라고 하지 말란 말이야!!!!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