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56화 (56/174)

제55편

검은 날개 조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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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터는 유릭을 예전에 알렉산더와 만났던 서재로 데리고 갔다.

가는 내내 주기적으로 치안청 소속 경찰과 마주쳤지만 모두 무시해

버렸다. 그들은 유릭이 손님이라 생각해서인지 흘끔 쳐다보지도 않

았다. 지나가는 길에 치안청 경찰들에 의해 몇 겹으로 둘러싼 문을

지나치기도 했다. 유릭은 그곳에 달의 심장인지 염통인지 하는 것

이 들어 있을 거라 짐작했다.

서재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처음 만났던 모습 그대로의 알렉산더가

앉아 있었다. 오터는 유릭을 데려다 주자마자 바로 그가 말했던 대로

‘로웨나를 지키러’ 돌아갔다(지킬지 지키다 속 뒤집어 질 지는

로웨나 소관일 테지만).

“어서 와, 하사.”

유릭은 서재를 둘러보았다. 서재는 아주 환했다. 창 밖으로는 달이

구름 사이로 미끄러지며 빛을 흘리고, 그 아래로는 브란 카스톨의

야경이 별빛 뿌린 듯 빛난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알렉산더가 텅 빈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

다. 첫날에 처음 보았던 그 검은 고양이는 여전히 벽난로 대리석

선반위에 몸을 도르르 말고 자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처음 보았을 때 그러하듯 오늘도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

른 재질로 만들어진 듯 낯설고 싸늘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듯

무결하게 우아했다. 그에게는 천년은 홀로 지내온 아침 요정의 왕

같은, 그런 차가운 투명함이 있었다.

“왜 부른 겁니까.”

“혼자 있자니 심심해서. 사방에 치안청 경찰들이 널려 있으니, 친구도

부를 수 없고, 취미생활을 즐길 수도 없잖아. 어둠에 갇힌 밤은 지

루하지. 시계 바늘 돌아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밖에는 할 일

이 없으니까.”

그리고 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유릭이 시선을 내리니 알렉산더는 손

끝으로 자갈 만한 것을 굴리고 있었다. 벽난로의 불그스레한 빛이 그

안에서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주변이 환하게 보일 정도

로 번쩍 번쩍 거린다.

알렉산더는 다이아몬드를 쥔 손으로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곳에 있는 것은 심장 없는 달이지. 아, 자네는 처음 보겠군.”

그리고 그는 보석을 들어보였다. 엄지손가락만한 다이아몬드는 옅은

붉은 색이었다. 유릭은 감탄도 호기심도 탐욕도 없이 담담하게 말

했다.

“파난 산이군요.”

“그래. 파난 섬에서 나는 다이아몬드는 모두 이렇게 묘하게도 색깔들

을 가지고 있지. 연한 노란색, 붉은 색, 푸른색. 투명한 것은 아예

나지 않지만, 이런 것들은 오히려 더 값이 나가. 나도 맹물처럼 투명

한 것보다는 이런 게 좋더군.”

알렉산더는 가면아래의 눈길로 자신의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

중한 것을 다루는 눈길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마치 길

가다가 돌을 하나 주워 보는 듯한 그런 눈길일 뿐이었다.

“파난에 계셨습니까.”

“조금.”

“광산일을 하셨나 보군요.”

“파난에서 돈 벌어 돌아온 사람은 대부분 그것으로 돈을 번 사람이

야. 농장을 가진 사람들은 귀국도 안하지. 그리고 이곳에서 제일

멍청하고 방탕한 것들을 고르면, 꼭 그런 이들의 자식들이고.”

“어떤 광산이었습니까.”

“글쎄.”

알렉산더는 모호하게(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성의하게) 말하고는 보석

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유릭은 그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장갑 끄

트머리로 드러나는 손목이나 팔뚝, 칼라 깃에 싸인 목덜미는 차라리

귀공자처럼 매끈했다. 장갑에 덮인 손은 모르겠으나, 그에게 광산

에서 일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릭은 화제를 돌렸다.

“도둑이 든다 해도 별로 걱정 없으신 것 같은데요.”

“글쎄, 신경 쓸 이유도 걱정할 이유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어. 처음 당

하는 것도 아니거든.”

“언제 당하셨습니까.”

“아주 예전에 잠시 집을 비운 적이 있었어...... 어둠 속을 헤매었던

길고 긴 여행이었지. 아니, 방황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몇 년

간이나 길을 찾지 못했고, 누군가가 마음씨 좋은 아이가 길을 찾아

준 덕에 나올 수 있었지. 그리고 돌아와 보니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더군. 그렇게 오랫동안 내가 소유해오며 소중히 했던 많은 것들

이, 때로는 배신하고 때로는 빼앗으며 때로는 대가로 받았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지.... 그에 비하면 이 도둑은 점잖은 편이야. 적

어도 무얼 훔쳐 갈 거라고 말은 했으니까.......”

푸드덕-홰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릭은 커튼 옆에 있는 횃대와 그 위

에 앉아 있는 화려한 앵무새를 발견했다. 노란 색, 주황색, 붉은 색

으로 선명한 그 앵무새는 유릭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이

가면을 벗었다.

유릭은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 져야 하

는데, 그 얼굴은 알아도 그 얼굴이 도무지 얼굴 같지 않으니 여전히

낯설 뿐이다. 그의 눈길이 유릭을 향했다. 회색 눈, 정말 진한 회색

의 눈이다.

“하사, 지금의 나는 그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

어. 필사적으로.”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 유릭은 침묵했을 뿐

이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자네 이야기를 해 주겠나.”

“정말 저에게 관심 많군요.”

“나는 경력이 특이한 젊은이들을 좋아하지..... 담배 피우나?”

“네.”

알렉산더가 일어나더니 벽난로 위에 얹힌 담배갑을 가지고 와 유릭

앞에 열어주었다. 유릭은 거절하지 않고 그 중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더 이상 친절한 척 예의바른 척 할 생각은 없었다. 치익-

짧은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이 붙었다. 알렉산더가 신기하다는 듯

그것을 바라본다.

“카밀턴 경과 무엇을 대가로 계약했나.”

“상부의 명령. 저는 용병이 아니므로 계약이나 대가는 없습니다. 임무

완수에 대한 보너스라면 모를까..... 물론 파난 특무부가 보너스를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말입니다. 보너스 벌칙이라면 몰

라도요....... 그런데 백작, 저에 대해 잘 아십니까.”

“코렌 광산 사건, 안 카슈필 마을 사건, 와번 그로츠의 갈림길 사건,

제비 호 실종 사건.”

유릭은 그의 어깨너머로 앵무새를 바라보았다. 앵무새가 언제 날아왔

는지 창가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유릭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고양이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난로의 선반에서 날듯이 휙 뛰어내려 그

곳으로 다가간다.

유릭은 그것을 보며 담뱃재를 털었다. 재는 카펫위로 그대로 떨어졌

다. 그것을 본 알렉산더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진다. 유릭이 말했다.

“........백작, 그 안에 하얀 까마귀의 내란 미수사건도 포함됩니까?”

백작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덕에 소위에서 일병으로 강등되었지요.”

“알아.”

“그렇다면 시곤 항구의 마약밀매 사건도 아시겠군요.”

유릭은 한 번 더 담뱃재를 털었다.

“그 때는 다행히 하사로 강등되었어요. 5년 간 그 자리에 처박혀서

진급할 생각도 말라는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유릭은 다시 서재를 둘러보고는 두툼한 책이 즐비한 곳으로 갔다. 다

른 책들도 다 컸지만 그 책은 두께가 한 뼘은 되어 보일 정도로 두

툼하고 묵직했다. 유릭은 그 중 한권의 모서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

“마법을 배우십니까? ..... 아까 정원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

시는 듯 하던데.”

“아니. 그냥 값나가는 책이라 모아둔 것뿐이네......자네도 평범한 집에

태어났으면 학원 같은 곳에 들어가 배웠겠군. 어쨌건 원리는 비슷

하다고 들었어.”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원리가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특무부 소속 장교들과 마법사들은 본

질적으로 ‘아예’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사제들의 성령마법과도 같을

겁니다. 더 나아가 흑마법과도.”

유릭은 나른히 담배연기를 빨아 들였다. 재가 또 몇 개 떨어진다.

“그리 말해 봤자, 어차피 나는 민간인이라 잘 몰라.”

거짓말- 유릭은 그가 이런 것들에 대해 아주 잘 안다는 것을 본능적

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지독하게 무관심한 태도는 지나치게 잘

아는 자의 것이며, 오만하며 방만한 자가 부리는 불쾌한 여유였다.

“마법의 본질은 왜곡된 의지를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요. 세상은

어차피 혼란의 덩어리, 그 혼란 속에 내포된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 마법사. 주술사들은 그것 역시 일종의 령이라고도 부르

더군요.”

“주술사와도 알고 지내나.”

“파난 섬에는 별 사람이 다 옵니다. 그 중에 바리암이나 뮬케 섬에서

온 주술사들 역시 있지요......그들은 마법사들의 힘의 근본도 령,

이라 하더군요. 물론 대학원의 마법사들이 듣는다면 매우 불쾌해

하겠지만 말입니다.........‘왜곡된 의지’들은 본질적으로 본다면 특화

된 흐름이지요. 물은 물일뿐이지만, 특수한 환경을 얻는 다면 시냇물

이 될 수도 연못이 될 수도 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법의 근본은

그 특수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 마법의

원리는 흐름을 만들어 낼 ‘재료’를 다스리는 것. 하지만....”

유릭은 담뱃재를 다시 카펫위에 털었다.

“가끔 그 의지들 중에 ‘욕망’을 가진 것들이 있지요. 성령마법과 흑마

법은 그런 욕망을 가진 것들을 찾아내어 그 힘을 이용하는 겁니다.

인간도 위험하지만, 자연 속에 존재하는 욕망을 가진 의지들은 매

우 위험합니다. 말 그대로 ‘순수’하고, 순수한 것들은 결코 상대방

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대가없이 주지만 대가없이 가져가는 것이

그런 순수한 것들의 본질이지요.”

유릭은 담배를 당겼다. 연기가 호를 그리며 뿜어져 올라 허공위로 흩

어졌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흔히 마령, 성령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흑마법

과 사제들은 그들을 ‘힘’으로 다스리고, 결국 그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식민 특무부에서 자네는 뭘 했나.”

“욕망이 있는, 그러나 주인이 없는 ‘마령’들을 단속하거나 지배하거나

봉인, 귀속 시키는 것. 그것들은 거의 재해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게다가 파난 섬은 마법이 봉인되는 곳입니다.

그람노스 이후 몇 대에 걸친 노력으로 봉인은 아그리피나의 성이 있

던 그곳으로 한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마법을

쓰기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그곳 사람들에게는 의식적이

건 무의식적이건 그것을 다스릴 힘이 약하고, 결국 그것들은 다른 곳

보다 훨씬 더 강대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흑마법사들이

숨어 들어와 그 마령들을 사냥하기도 하지요.....그건 보석보다 더 비

싸게 치지요. 파난이 품은 최고의 부는 바로 그것입니다.”

유릭은 알렉산더를 보았다. 가면 그림자속의 눈동자로는 그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지 있지 않는지는 알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턱의 방향은

유릭을 향하고 있었다. 유릭은 담뱃재를 털고는 반 이상 남은 담배

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제야 알렉산더가 멈칫했다.

“뭐 하는 건가.”

유릭은 그 불을 발로 비벼 껐다.

“와라, 키케.”

순간 방금 전에 유릭이 돌아다니며 뿌려 놓은 재들이 달군 황금 조각

들처럼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유릭은 서재의 양 끝에 놓인 두개의

램프 쪽으로 양 손을 뻗었다. 램프의 불이 일시에 꺼졌다. 그러자

담뱃재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은 더욱 강렬해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원과 몇 가지 선으로 이루어진 마법원의 형태를 뗬다.

유릭은 한참이나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뒤에, 그 빛이 뻗어나가

는 경계에 검은 얼룩 같은 것이 맺히기 시작했다.

역시- 유릭은 총을 꺼냈다. 알렉산더가 놀라 털을 세우는 검은 고양

이의 턱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무슨 일을 하던 상관 없는데, 적어도 뭔지는 말 하고 해.”

“무언가가 왔습니다.”

“무언가?”

얼룩이 날개 모양으로 진해지는 순간에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다.

푸른 섬광이 얼룩에 박혀 들어가며, 그 위로 붉은 빛 조각이 츠캉 솟

아났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예고장을 보낸 당사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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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유릭은 마호로 급의 메이드 였던 것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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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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