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편
검은 날개 조각#4
****************************************************************
유릭이 방으로 달려갔을 때, 그곳은 엉망진창이었다. 벽과 침대의 이
불 위에, 핏방울은 마치 꽃잎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깨어진 유리조각이 가득했고, 그 위에 피투성이가 된 오터가 쓰러
져 있었다.
“이봐요!”
유릭은 급히 그를 부축했다. 어깨와 가슴이 피 범벅이었지만, 여기저
기 긁혀서 상처가 깊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오터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체온도 맥박도 모두 정상이었고, 피는 튀어있기만 할 뿐
어디에도 고여 있지는 않았다. 잠시 뒤, 로웨나가 방으로 돌아왔다.
로웨나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오터가 펄쩍 뛰듯이 외쳤다.
“너, 어디로 도망갔던 거야!”
“사람 부르러 갔던 거라고요! 그리고 내가 무슨 수로 아저씨를 도와
요! 게다가 아저씨는 나한테 보호받고 싶어요? 고작 열일곱 살짜리
꼬마 여자애한테? 어머나, 그렇게 자존심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면 도와주는 건데 그랬어.”
참으로 현명한 말이었지만, 정작 당한 사람은 말한 당사자를 걷어 차
버리고 싶어지게 할만한 말이었다. 오터가 일어나다가 사방에서 찔
러대는 통증에 이를 악물며 몸을 뒤틀었다. 유릭은 주머니를 뒤져 약
병 하나를 꺼내, 그 안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어 오터의 입술에 밀
어 넣었다. 오터는 얼결에 그것을 삼켰다.
“이거 뭔가.”
“안정제요.”
유릭은 오터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상태라 판단하고, 팔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로웨나와 티격태격할 정도면 멀쩡하다 봐도 될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로이.”
로웨나가 답할 틈도 없었다. 유릭의 어깨 금방에서 흐릿한 너울 같은
것이 어렸다. 유릭은 급히 돌아섰다.
“!”
깨어진 창문 중앙에 핏방울을 찍어 넣은 듯한 붉은 눈동자가 밤의 어
둠 속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에 사라진 그것과 똑같은 색
깔의 눈동자였다.
오터가 같은 것을 보고는 신음을 삼켰다. 창틀 양 옆에 검붉은 손아
귀 같은 것이 스르르 나타나 얹혔다.
마치 창을 타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이. 그 손길을 따라 흰 벽이 상
처입고 피를 흘리듯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번지듯이 붉은 빛이 스
며들어갔다. 실핏줄을 타고 흐르듯이, 가는 균열을 이루며! 바닥이 지
직 진동하기 시작했다.
“위험해, 로웨나--!”
로웨나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유릭은 그녀에게 달려가 그 몸을 감
싸 안았다. 오터가 신음을 삼키며 엎드렸다. 뒤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터졌다. 쿠르르릉--! 바람이 몰아닥치고, 파편들이 쏟아졌다. 유
리조각들이 휘몰아쳐 볼과 목덜미를 스친다. 차고 습한 바람은 방
안을 휩쓸었다.
유릭은 두 팔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팔 아래에 엎드려 있는
로웨나가 놀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순간에
로웨나의 목덜미에 유릭의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로웨나가 바닥에
떨어진 피를 보고는 기겁했다.
“유리, 다쳤어 너!”
유릭은 대강 피를 훔치고는 돌아섰다. 이제 오터의 상처가 어떻게 난
것인 지 알 것 같았다.
사방에는 높은 지대에서 부는 듯한 선선하고 맑은 바람이 가득했다.
유릭은 총을 꺼내며 돌아섰다. 벽이 완전히 날아가, 브란 카스톨의
장대한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에는 하얀 달이 빛나고,
달빛 젖은 구름은 얼룩처럼 하늘에 묻어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
와 고함 소리가 성 아래에서 들린다.
유릭은 무너져 절벽처럼 뚝 끊어진 벽 쪽으로 다가갔다. 울창하고 높
은 느티나무가 검게 물결치고 있었다. 방 안은 무너진 벽돌이 쏟아져
엉망이다.
로웨나가 무너진 돌무더기에 깔린 오터를 찾아내 그 위에 쏟아진 벽
돌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저씨, 죽을 것 같으면 빨리 말해요! 시체 발굴하는 건 시간낭비거
든요.”
“닥쳐억-!”
“어머, 아직은 멀쩡하네.”
유릭이 도와주러 오려 하자 로웨나가 뚫린 벽을 가리켰다.
“유리, 또 뭐가 올지 모르니까 넌 거기서 지켜봐! 이 아저씨 아직은
멀쩡하니까 천천히 구해도 될 거야.”
돌무더기 아래에서 사자 울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유릭은 처음 그
를 만났을 때 그 점잖고 절도 있으며 냉철하던 모습을 생각하며, 저
로웨나와 크리스펠로를 한번 붙여 놓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그
냉철한 크리스펠로가 무너질지 안 무너질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것
만도 꽤 재밌겠다.
“어이, 거기 무슨 일이야!”
저 아래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유릭은 무너진 벽에 반
쯤 발을 걸치고는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치안청 소속 경찰들이 새
까맣게 모여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몇이 현관 쪽으로 들어오
는 것도 보인다. 유릭은 크게 답했다.
“몇 분 올라오십시오!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때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스스스- 마치 속삭이듯이.
유릭은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앞에 늘어진 굵은 나뭇가지
를 바라보았다. 우수수수-- 나뭇잎 쓸리는 소리는 크지는 않았으나
은밀한 속삭임처럼, 잔물결처럼 끊임없다.
유릭은 총을 들었다. 이번에는 한 팔만 쓰지 않았다. 총구를 겨누며,
반대편 손은 손목위에 얹었다.
“로이, 내가 피하라고 외치면 오터 씨와 함께 복도 쪽으로 뛰어.”
“알았어. 그런데 이 아저씨 업고 가야 하나? 아저씨, 업힐래요?”
“걸을 수 있다!”
유릭은 뒤의 둘은 결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판단했다.
그리고 휩쓸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곳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유릭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움은 점점 더 진해지고, 마침내 오려 낸 듯 새카
매진다. 그 어둠이 흔들리는 듯 하더니, 무언가가 슬며시 나타났다.
검은 물 속에서 빠져나오듯이, 얼굴 윤곽이 드러나고 어깨와 허리,
다리까지 천천히 나타난다.
옷은 검었고, 후드로 덮어 써 얼굴을 가리고, 복면으로는 코까지 다
덮고 있었다. 검은 곱슬머리가 후드 아래에 늘어져 있었다. 바람이
소슬히 불 때, 옷자락과 함께 그 머리카락도 흔들렸다. 후드 자락
이 날리며 검은 눈이 드러났다.
“당신....”
유릭은 그 이마를 겨냥했다. 그 때 로웨나가 뒤에서 헉, 신음을 삼켰
다. 무언가를 알아본 것이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목덜미
근처로 선뜩하리만큼 차가운 기운이 확 스치고 지나갔다.
“로웨나--!”
유릭이 돌아보며 외쳤다. 로웨나의 목 바로 옆의 벽이 뚫리며 돌덩어
리가 튀었다. 로웨나는 간신히 피해 벽에 등을 붙였다. 얼굴은 창
백하고, 입술을 하얗게 되도록 꾹 물고는 있었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하지도 않았다. 대신 눈이 불꽃이라도 튀듯이 이글거리더니,
크게 외쳤다.
“유릭 크로반, 저 놈 잡아! 안 잡으면 내가 잡을 거야! 그 때 극장의
그놈이잖아!”
남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알렌다.”
순간 로웨나의 머리 위의 벽이 굵은 발톱에 긁히듯 좌악 패였다. 돌
조각들이 쏟아졌다. 로웨나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독기라도 품은
듯 고개를 숙여 피하더니, 잽싸게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곳으로 피할 듯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문이 포탄에라도 맞은
듯이 콰악 부서졌다. 나무 파편이 비처럼 튀었다. 로웨나 역시 그
곳으로 피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가려는 듯 했던 것 자체가
속임수였다. 로웨나는 작은 새처럼 잽싸게 오터 쪽으로 피했고, 오
터는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허공을 후려쳤지만, 무언가가 고함을
빽 질러 젖히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
다친 강아지가 돌아다니듯이 발자국이 찍혔다. 오터가 그것을 걷어
찼다. 검붉은 액체가 확 터졌다.
“아가씨, 제법이군. 고양이처럼 이리 저리.”
검은 옷의 침입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우뚝 멈추어야 했다.
목덜미 바로 옆에 차가운 총구가 얹혀 있었다. 남자의 눈길이 옆으로
슬쩍 흘러갔다. 그가 발을 딛고 있는 나뭇가지에, 유릭이 한 발을
걸치고 서서 그 목덜미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언제 온 거냐.”
“당신이 사나운 고양이를 사냥하는 동안.....애송이.”
“애송이?”
“싸움 중에 한 눈파는 건 바보짓이라고.”
그리고 유릭은 그대로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남자는 피했
지만, 진짜 공격은 그게 아니었다. 목을 겨냥하던 총이 뒤집히며, 그
자루가 남자의 머리를 강타했다. 남자는 신음을 삼키며 나뭇가지
를 움켜잡았다. 나뭇가지가 크게 휘청이고 나뭇잎이 우수수 쏟아졌
다. 유릭은 가지에 등을 붙이며 총을 고쳐 잡았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손길이 허공을 휘젓자, 그 주변에 붉
은 기운이 어리다가 사라졌다.
“벨린다....”
남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유릭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등이 얼음을 대고 있는 듯이 차가워졌
다. 신음과 함께 허리를 숙였을 때, 남자가 날아가는 듯 뒤로 물러나
가지 끝을 가볍게 밟았다. 한 마리 크고 검은 새, 땅에 발 딛는
인간을 조롱하는 그런 새처럼.
유릭은 그를 겨누었지만, 순간에 등 뒤에서 피가 솟구치듯 붉은 기운
이 터졌다. 남자가 두 팔을 벌렸다.
“오늘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지만, 적어도 뺏기지는 않았군.
잘 있으라고. 다음에 올 때 까지 말이야.”
유릭은 돌아섰다. 나뭇가지위에, 나무보다 거대한 것이 앉아 있었다.
그 날개 끝이 가지와 잎들을 모두 통과하여 위로 솟구쳐 있고, 길고
검은 목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유릭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그놈이다.
날개는 여전히 찢어져,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뜩한 붉
은 눈동자, 그것이 방금 전처럼 또 유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분노와 증오를 담아.
히익- 기이한 신음 같은 소리가 흐르더니, 그 붉은 눈동자 아래가
찢어지듯 입이 벌어졌다. 무수히 박힌 허연 이빨이 드러났다.
유릭은 나뭇가지를 발로 찼다. 그리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총을 들
었다. 거센 바람이 그의 등을 휘감고, 목과 귀를 휩쓸어 올렸다. 그
리고 유릭은 나뭇가지를 움켜잡았다. 몸이 걸리자 나뭇가지가 아래
로 크게 휘청거렸다. 나뭇가지가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굵고 얇은
나뭇가지와 잎들이 몸을 후두둑 쳤다. 유릭은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굵은 나뭇가지를 잡았다. 순간에,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그 검붉은 마물이 날개를 펼치며 유릭을 향해 쏟아졌다. 나뭇가
지들이 우두둑 부러지며 아래로 쏟아졌다.
“히게아-!”
유릭이 이를 갈아붙이듯 외쳤다.
순간 불꽃이 펼쳐지듯, 노을의 날개가 펼쳐지듯, 거미줄이 펼쳐지듯
붉은 마법진이 쏟아져나갔다. 검붉은 마령은 그대로 그 마법진에
부딪쳤다. 마법진에서 시뻘건 기운이 터져 올랐다. 그것이 수십 개
의 불꽃의 팔을 벌려 마령을 끌어안았다.
휘감았고, 속박하고, 집어 삼켰다. 불사르고 녹이고. 불붙은 나무가
연기를 내뿜고, 열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며 사방을 내리덮었다.
유릭은 총을 쏘았다. 콰앙--! 이번의 총성은 엄청났다. 그리고 섬광
이 마법진을 꿰뚫자, 붉은 불꽃의 줄기가 소나기처럼 위로 수천,
수백, 수 만개가 쏘아져나갔다. 나뭇가지사이를 꿰뚫고, 잎 사이를
휘젓고, 검붉은 마령의 육체를 꿰뚫고 불사르며 갈가리 찢어 놓았다.
유릭은 총을 허리에 꽂아 넣은 뒤에 두 팔로 나뭇가지를 잡고 몸을
돌려 그 옆의 나뭇가지에 두 발을 걸었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바로
잡은 뒤에, 유릭은 무너진 창턱으로 힘겹게 다가갔다. 그러나 발
이 바닥에 닿자마자 반쯤 갈라졌던 바닥이 유릭의 무게를 이기지 못
하고 무너졌다. 유릭이 휘청이자, 불쑥 튀어나온 가는 팔이 그의 뒷
덜미를 움켜잡아 당겼다.
“유리, 괜찮아?!”
유릭은 로웨나의 팔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잎과 가지가 불길에 반쯤 뜯어 먹혀 사라진 느티나무가 있었다.
사그라지는 불길 속에, 방금 전의 그 검은 옷의 침입자는 이미 사라
진 뒤였다.
****************************************************************
작가잡설: 얼른 올리고 한잔 하러........아이고, 덥군요.
다음편은 5일 뒤에 올라갑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제16장 재회와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