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편
재회와 귀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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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그리고 로웨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해...........나 때문에 그런 꼴이나 당하고. 너는 네 할 일을
한 건데 말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잖아. 부담 가질 필요 없는데.....그리고 나는 워
낙에 그런 일들을 자주 당해서,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고.”
“나한테는 무지무지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절대 그런 짓 못해. 으으,
그 의기양양한 얼굴이라니. 뒤퉁수 한방 갈겨 버리고 싶더라.”
“아버지잖아.”
“아버지니까.”
유릭은 마차 의자에 기대며 창밖을 보았다.
알렉산더가 집까지 타고 가라고 빌려준 마차는 작고 아늑했고, 그러
고 있으니 밤새운 피곤이 밀려들며 금방 피곤해진다.
“그리고.....유리, 오해할 거 없어. 아버지가 말한 거 대부분이 사실이
니까. 나도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로웨나는 턱을 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엄마,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었어. 게다가...... 그러려면 약기라
도 할 일이지, 밤낮 이사람 저사람에게 속아서 사기나 당하고. 아
버지는 지쳐서 이혼해 버렸지. 그 때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는 중이라, 그 남자가 결혼해 줄 줄 알고 아버지랑 이혼했던 거
야. 하지만 그 남자는 다른 젊은 여자랑 도망가 버리고, 위자료로
챙긴 돈은 어느 사기꾼한테 걸려서 날려 버리고. 나중에는 돈을
따서 부자가 되겠다고 도박에만 매달리다가, 자그마치 오천 카스티
야나 빚을 져 버렸다고.”
그리고 로웨나는 치를 떨었다.
“빚은 다 갚았니?”
“아니. 아직 천 카스티야 정도 남았어. 내가 팔려가지 않았던 것은,
그 때 내가 무시무시하게 못생겨서 그런 것뿐이야. 딸이라도 팔라고
찾아갔더니, 소름끼치게 생긴 애가 하나 앉아 있어봐. 제발 저거
팔아서 돈 마련한다고는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게 되지.”
“......”
유릭은 차라리 존경스러워졌다. 잠시 로웨나의 성격을 과소평가 했던
것 같다.
로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른들 일이었어.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나쁜 놈 몰아갈 수도 없
고, 그렇다고 둘 다 나빠요 하는 건 더 나쁜 일이지. 둘 다 나쁘다고
욕한다고 내가 좋은 편이 되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내가 선한 편이라고 억지로 착각하는 것도 바보
짓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나를 사랑해 주는 엄마 옆에
서 노력하는 것뿐이었어. 누구든 처음부터 착한 편일 수 없고, 끝까
지 착한 편일 수도 없는 거잖아. 좀 더 노력하다 보면.....뭔가 나아
질 거라고 생각했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결국 눈이 흐려지며 흔들렸다. 유릭은 말
없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로웨나는 고개를 돌리더니 손목으로 눈
물을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정말 피가 거꾸로 솟구치며 화가 나는 건 어
쩔 수 없어.......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고. 정말 두들겨 패버리고 싶
은데, 그런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그래서 화가 나. 보란 듯
이 잘 되고 싶은데, 다시는 그렇게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잘 되고
싶은데, 발버둥쳐도 아무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 너무
너무 억울하고 비참해.”
다시 눈물이 샘솟아 로웨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존심 챙긴다
고 훌쩍거리지도 못하고 있다. 그저 욱욱거리다가 꿀꺽 삼킬 뿐이다.
“로이-”
“상냥하게 안 해줘도 돼. 너 같은 애들은 정말 싫어. 언제나 상냥하
고, 언제나 친절하잖아. 다른 여자애가 울어도 다 똑같이 이래줄
테지. 그러는 녀석들... 정말 싫....훌쩍, 어.”
로웨나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 치마에 툭툭 떨어져 얼룩진다. 어
쩔 수 없다. 흐느낌은 힘껏 참아도 눈물만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유릭은 손을 들어, 그 자그만 볼을 감싸고 눈의 눈물을 닦아 냈다.
“그만 도도하게 굴라고.”
로웨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며 유릭은 피
식 웃었다.
“나한테 때맞춰서 밥 받아먹던 네가 이렇게 굴면 우습기만 하잖아.
도도하게 굴 필요 없어, 자존심 챙길 필요도 없고. 나도 너 못지않게
불쌍하게 큰 놈이니까, 이러지 마.”
“나빴어....”
“네가 뭘 하든 괜찮단 말이야, 고양이 여왕님. 나는 네 메이드지, 왕
자님이 아니라고.”
“.........”
그리고 유릭은 당황했다. 로웨나가 눈을 감더니, 그대로 유릭의 무릎
에 엎드려 엉엉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로, 로이?”
“나아아아쁜 자식, 나쁜 자식! 어떻게 그렇기 심한 말을 하는 거야!
우아아앙아아아아앙--!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우아아앙---!
나쁜 자식! 훌쩍, 훌---우아아앙! 우흐흥.....훌쩍! 크르르릉.....
후울쩍....아앙--!”
놀란 마부가 돌아보자 유릭은 앞이나 보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행
여나 누가 나와 볼 새라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참이나 울어 젖힌 로웨나는 집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푹 잠들어 버
렸다. 울다울다(거의 통곡에 가깝게) 지쳐 곯아 떨어져 버린 것이다.
드디어 주변이 조용해지자, 완전히 지쳐 늘어져 버린 유릭은 마차의
자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로웨나가 간혹 가다가 훌쩍거릴 때마다
어깨를 토닥여 주는 건 잊지 않았다.
이제는 좀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어제의 일, 괴도 박쥐, 그가 퍼부어 대던 공격과, 맞댄 얼굴과, 그의
몇 가지 말 들. 로웨나가 다시 훌쩍 울어서 토닥여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칼 뷰겐트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혼자서 해결
하기는 힘들고 벅차다.
어느덧 새벽이 오고 있었다. 어둠이 씻겨나가며 하늘은 푸릇하게 바
래고, 좁고 복잡한 골목길도 그림자를 떨쳐내며 잿빛 윤곽을 드러
냈다. 길들이 흰 뼈처럼 드러나고, 정적에 젖은 싸늘함이 한숨처럼
감돈다. 드디어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유릭은 마부에게 인사를 하
고 로웨나를 업고 내렸다. 잠든 와중에도 로웨나는 유릭의 목은 꽉
끌어안았다.
“어이, 미하일.”
문 앞에 도착한 유릭이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 답도 없자, 발로 문을
쾅쾅 걷어찼다.
“미하일, 문 열어!”
두 어 번 걷어차고, 벨을 누르고, 옆집 사는 할머니가 마귀처럼 쏘아
보고 들어간 뒤에 몇 번을 더 걷어차자 간신히 문이 열렸다.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유릭은 로웨나를 덮은 윗옷을 얼른 잡
아 당겨 눈물 젖고 퉁퉁 부운 얼굴을 가렸다.
“한달은 나갔다가 올 것 같더니, 고작 사흘만에 돌아 오냐.”
미하일이 면도도 안한 시커먼 턱을 긁적이며 그리 퉁명스레 말했다.
유릭이 웃었다.
“잘 지냈어?”
“빌어먹을, 잘 지냈으니 어서 들어오기나 해. 그런데 그 녀석은 술이
라도 마셨냐? 왜 네가 업고 있어?”
“아, 밤새서....이제 막 곯아 떨어졌어.”
유릭은 로웨나를 업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히 전쟁터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거실에는 먹다 남긴 닭 뼈와 과일
껍질이 널려 있고, 그 틈에서 쥐 일가가 아침식사를 하다가 유릭이
들어오자 잽싸게 도망갔다. 부엌에는 먹다 남긴 스튜와 음식 찌
꺼기가 붙은 접시들이 가득 가득 쌓여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고, 그
옆에는 빈 술병들이 깨지거나 누워있다.
“한달은 나갔다 들어온 것 같군.”
“젠장, 남자 혼자 있으면 원래 다 이런 거야! 어서 로이나 눕혀!”
유릭은 로웨나의 방에 들어가 침대위에 그녀를 눕혀 놓았다. 다행히
미하일이 로웨나의 방 문지방은 넘지 않았는지 그 방은 깨끗했다.
로웨나는 아기 고양이처럼 침대 위에서 이리 저리 구르다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유릭은 바로 눕히고 재워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
다. 어차피 고양이는 여기 저기 처박혀서도 편하게 잘 자니까.
방 밖으로 나오니, 미하일이 담배를 버끔 거리며 앉아 있었다.
“야, 너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그리고 담배갑을 내밀었다.
“못 피워도 오늘은 피워!”
유릭은 담배를 뽑아 입에 물었다.
“불은 안주냐?”
“.....에?”
“열네 살부터 피웠는데.”
“쳇, 발랑 까졌었군.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다양한 종류의 마약과 대마도 피웠는데, 하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
어줄지 아주 궁금하다. 그가 성냥으로 불을 붙여주자 유릭은 일단 한
모금 피웠다. 생각보다 좋은 물건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어디로 갔었냐?”
유릭은 나른히 미하일을 내려다보았다. 미하일은 담배를 버끔 거리며
매우 긴장한 듯이 유릭을 보고 있었다. 유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
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룻밤 같이 지냈어.”
“케헬룩!”
“꽤 뜨거운 밤이었지.”
하긴, 뜨겁다 못해 격렬한 밤이었다. 미하일이 숨 멎을 듯 억억댔다.
“너, 너, 너--!”
“로이는 무척 상처 받았고, 나도 오는 여자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거
든. 그러다 보니......아주 좋은 시간이 되었다.”
미하일의 얼굴이 이제 새하얗다. 유릭은 아련한 눈길로 붉은 아침노
을 퍼지는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흘끔 보니, 미하일은 담배를 맹
렬히 주욱 주욱 빨아들이고 있다. 미하일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로 물었다.
“저, 정말.....이냐?”
“로이는 잘못 건드렸다가는 평생 못하게 만들어 줄 녀석이잖아. 몇
년 같이 살고도 모르냐......아무 일도 없었다.”
잠시 미하일이 멍하니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환하게 웃
었다.
“마, 맞아! 정말 그렇지. 아하하하, 다행이다! 나는 정말 무슨 일 생
기는 줄 알고....아하하하.....그런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지?”
“있을 리가.”
유릭은 반쯤 태우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우겨넣었다. 재떨이에는 꽁
초가 고슴도치 등처럼 수북하게 꽂혀 있었고, 주변에는 술병들이
곯아떨어진 노숙자마냥 널브러져 있다. 유릭은 가볍게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미하일.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해. 이렇게 괜히 신경질
부리지 말고.”
유릭의 말에 미하일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신음을 흘렸다.
“유릭 크로반,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그런 황당한 말을 하는 거냐?
내가 뭐 하러 저런 왈패를 좋아해! 따지고 보자. 제대로 예쁘기를
하나, 성격이 좋나. 그렇다고 다정한 구석이 있나, 섬세하기를 하나.
맨날 빈정대고 툭툭 쏘아대기나 하고, 집안에서는 결혼한 지 삼십
년은 된 사이처럼 굴고. 좋아할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좋아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필요 없다고. 그냥 사랑스러우니까, 어떨
수 없이 사랑스러우니까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채워주고
돌봐주고 싶어지지. 완벽한 상대에게서는 오히려 사랑을 느낄 수 없어.
사실, 완벽한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대를 향한
오만이고, 자신의 착각이야. 완벽하게 보이니까 완벽하다고 착각
하는 것뿐이라고.”
미하일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길이 바닥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손
도 산만하게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유릭은 문 쪽을 돌아보았다. 햇살이 그쪽까지 번지고 있었다. 유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아, 이제 떠나야지.”
유릭은 문을 가리켰다. 미하일이 펄쩍 뛰듯이 일어났다.
“떠난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나가라고 그렇게 울부짖더니 정작 나간다고 하니 더 놀라는 군. 로
이에게 잘 말 해줘. 할 일이 있어서 잠깐 비운다고.”
“할 일?”
유릭은 피식 웃었다.
“로이에게 말하면 다 알아 들을 거야. 어쨌건.... 덕택에 편하지는 못
했지만 재미있게는 지냈다. 로웨나에게도.... 잘 있으라고 전해 줘.”
“어디로 갈 건데?”
“아직은 몰라. 하지만 가끔 연락할게.”
“네가 말 안하고 나가면 나중에 로이가 날 족친단 말이다! 어서 말
해, 어디로 가는 거야.”
“일이 생긴다면 내가 먼저 찾아갈 테니 어디로 가는 지 알아둘 필요
는 없어. 그리고 어쩌면 금방 다시 돌아올 지도 몰라. 아예 안 들
어올 가능성도 높지만 말이야.”
“너 정말 사람 답답하게 할래! 이렇게 가 버리면....얌마, 서운하잖아.”
“저녁 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놈으로 보이냐.”
“충분히.”
유릭은 웃으며 돌아섰다. 문을 여니, 차가운 아침 공기가 볼을 쓸었다.
유릭은 미하일에게 손을 흔들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복도 창 너머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며 청회색 새벽 그림자를 쓸어내고 있었다. 유릭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아직 그를 기다리는 마차에 탔다.
마부가 돌아보자, 유릭은 무심하게 말했다.
“브란 루게나로 가 주십시오. 성 아낙사 호텔에서 내려 주시면 됩니다.”
유릭의 옆에는 그의 짐 가방이 놓여 있었다. 유릭은 조용히 속삭였다.
“키케.”
순간에, 가방 바닥의 그림자에서 빛이 확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흥분한
듯 부르르 몸을 떨었고, 마치 수 십 마리의 금빛 개미떼가 이동하는 듯
보였다.
유릭은 가방에 이마를 기대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없는 동안 감시해. 그것이 다시 나타나면 내게 즉각 알리고, 동
시에 칼 뷰겐트 님에게도 알린다.”
금빛 가루들의 떨림이 멈추더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유릭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왔지만, 가슴을 꾹 누르기만 했을 뿐 약을
먹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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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하루 늦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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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