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63화 (63/174)

제62편

덫사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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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간다고 했어?”

“글쎄, 뭐 어디로 갔겠지.”

로웨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너한테 기대를 하는 게 잘못이지. 거의 일주일 동안 밥하고 빨래해

준 고마우신 은인을 보내면서, 어떻게 어디 가는 지도 안 물어

보니?”

“물어 봤는데 아무 말도 안 해준 거야! 너는 어떻게, 무슨 일만 나면

나만 그렇게 나쁜 놈으로 모냐아?”

미하일이 억울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로웨나는 원피스 허리의 리본을 매며 쏘아붙였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무신경의 소유자니까 그렇지. 그리고 너는 나

쁜 놈 맞아. 정--말 나쁜 놈이야.”

그제야 미하일은 로웨나가 집을 나갔던 이유를 기억해 냈다. 아니,

기억해냈다기 보다는 생각하지 않고 돌이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다.

미하일은 지저분한 머리를 긁적이고는 힘없이 말했다.

“그 날 심한 말해서 미안해.”

“그렇게 말해 놓고서는 다음에 또 심한 말 하겠지. 아무리 네가 생각

하는 게 옳아도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자존심 문제란 말이야.”

생각보다는 다정한 로웨나의 말에 미하일은 안도했다. 어쨌든 용서

받은 것이다. 이제 로웨나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있었다. 미

하일은 그런 로웨나를 보다가 슬그머니 말했다.

“야, 바래다줄까?”

“취했니, 미쳤니?”

“무지 미안하지만 아주 제 정신이다.”

“혹시 에닌이랑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미하일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

“너는 어떻게 된 게, 다른 남자들이 친절하게 해 주면 고마워요, 어쩜

이리 상냥하실까, 어쩌고 하며 냉큼 냉큼 받으면서 내가 친절하게 해

주면 그리 뱁새 눈 뜨면서 ‘무슨 꿍꿍이야?’ 하고 조잘대는 거냐.”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 아니야? 네가 평소에 배려나 친절이라는 것

과 조금의 상관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고맙게 받겠는데, 전혀 아

니잖니?”

“나 원래 친절해! 너는..... 뭐, 워낙에 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 잘 안

되는 거뿐이야.”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 나한테 갑자기 친절한 건데? 크로반 군이 뭐

이상한 말이라도 하고 갔니?”

그 말이 나오자마자 미하일은 급히 로웨나의 눈길을 피했다. 로웨나

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역시나 무슨 말하고 갔구나? 괜찮아,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어차

피 한두 번 당하는 일도 아닌데, 한 번 더 당했다고 새삼 더 상처

받을 일도 없어. 일주일 정도 기분 나쁘기야 할 테지만.”

미하일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릭이 한 말과 지금 로웨나가

한 말은 그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냐고 물어 볼 수도 없는 것이, 그랬다가는 말이 길어지고, 말이 길

어지면 숨기고 싶은 것 까지 다 들통 날 것 같아서 입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없다.

“어쨌건 그렇게라도 신경 써 줘서 기특하구나.”

“아, 뭐....... 친구잖냐, 우리는.”

미하일은 괜히 볼을 문질렀다.

“어, 어쨌건 준비 끝났으면 나가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돈도 탔으

니까, 가....가면서 아침이라도 사 줄게.”

“됐어. 그 돈 아껴서 방세나 내라고. 네 밀린 방값 내가 메우느라 허

리가 휠 지경이라니까.”

“알뜰하기도 하셔라.”

“그래도 아침은 사. 배고파 죽겠다.”

미하일은 웃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외출복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며 거울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아무래도 면도를 하고 가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음, 머리도 깎고, 가만있자 목욕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미하일은 유릭의 깔끔한 모양새를 떠 올렸다. 그 녀석은 사내 녀석이

어떻게 밖에서 자고와도 그렇게 깔끔한 거람. 깔끔 떠는 사내놈들은

정말 얄밉지만, 그 재주가 용해 보이기는 하다.

미하일은 주머니를 뒤져 돈을 확인한 뒤에 방을 나갔다. 그러나 막

나가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대체 누구야. 또 주인 할망구가 집세

내라고 온 거냐. 아니면 유릭 그 자식이 며칠 더 묵어야겠다며

돌아온다던가. 둘 중 무엇이 돼든 진절머리 난다 생각하며 미하일은

문을 열었다.

“누구시......”

그러나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집을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에닌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다 들었어, 로이.”

에닌은 그렇게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가, 미친 소를 가둔 외양간

과 비슷하게 무시무시한 난장판을 보고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방 치우라느니 너무 지저분한 거 아니냐느니 하는 말은 하

지 않았다. 물론 유릭처럼 직접 치워주지 않는 한, 그런 잔소리는

로웨나도 미하일도 사절이다.

로웨나가 물었다.

“누구한테 들은 건데? 백작님, 아니면 아버지?”

“그레이브 부인에게서 들었어. 오늘이 성 프레야 자선회 소속의 부인

들이 모이는 날이잖니.”

미하일은 놀라서 로웨나를 바라보았다. 너, 어제 아버지 만났던 거냐!

하고 외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로웨나는 땋은 머리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번엔 또 뭐라고 씹더니?”

“로이, 그렇게 말하면 못써. 그분은 정말 상냥하고 마음 여린 분이고,

너와 네 어머니와 좋은 관계로 남고 싶어 하는 분이야. 하지만......

어제 네가 네 아버지께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부하와 백작님까지 계신 자리에서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나는 잘못한 거 없어.”

“로이, 나는 너를 좋아해. 하지만..... 너, 이번에는 전혀 상관없는 사

람까지 끌어 들였다며. 그건 정말 너무 심했다고 봐. 크로반 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분이잖아.”

미하일이 로웨나에게 강렬한 눈빛을 쏘아 던졌다. 서, 설마 그 자리

에 유릭 크로반 자식도 있었던 거냐! 로웨나는 그윽하게 마주보아

주었다. 그래, 어쩔래. 미하일은 끙하니 한숨을 내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로이.... 이런 충고 한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줘. 네 어머니

와 아버지가 얼마나 사이가 안 좋으셨는지는 나도 알아. 하지만 그

래도 너와 그레이브 청장님은 부녀지간이고 가족이잖니. 가족 사이에

서 서로 용서 못할 일은 없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를 소

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게 가족이잖아......”

로웨나는 이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벌써 반쯤 감겨 있었

다.

“그레이브 부인과의 만나봐. 그분은..... 네가 너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좋은 분이셔. 너무나 선량하고 자비로운 분이야.

그분은 정말 너를 만나고 싶어 하시고, 네가 결혼할 때까지 글로리

아만큼이나 소중히 돌보아 주실 거야. 게다가 글로리아가 얼마나 예

쁘고 착한 아이인 지 너도 잘 알잖니......그분께서 오늘 말씀해 주셨

어. 네가 마음을 돌려서 그 집으로 온다면, 정말.......”

“나는 이대로가 더 좋아.”

“로웨나, 이런 생활이 더 좋을 리가 없잖아. 네가 얼마나 어머니를 소

중히 여기는 지도, 사랑하고 있는 지도 잘 알아. 하지만..... 그레이브

부인도 정말 착한분이야. 네가 그 집으로 가기만 한다면, 정말 네

어머니를 같이 보살펴 줄 분이라고. 그리고 로이, 아무리 힘든 일

이 있더라도 가족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해. 사람들 마음속에

는 누구라도 따뜻한 마음이 있고, 너는 고집 세지만 착한아이잖아.

너만 마음을 열면 모두 행복해질 수 있어.”

에닌의 부드러운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비쳤다. 로웨나는 그런 에닌

을 바라보다가 옆의 미하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하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로웨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에니. 노력해 볼게.”

에닌의 눈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다. 에닌은 로웨나의 손을 꼬옥 잡

았다 놓고는 일어났다.

“잘 생각했어. 서로 마음을 열고 사랑하면 세상은 훨씬 더 행복한 곳

이 되는 거야. 너도 행복해 질 수 있고. 미워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야.”

“그래.”

미하일은 로웨나의 안색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로웨나의 눈은 무관

심했고,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 에닌은 로웨나의 이마에 입 맞

추고는 모자를 챙겼다.

“내 마차를 타고 지금 우리 집으로 가지 않을래? 이왕 마음 먹은 김

에 당장 만나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서로 사

랑하는 가족이 되는 거야. 그리고 네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할 거야.”

“미안한데 벌써 약속을 했지 뭐니. 시간이 되면 내가 꼭 먼저 이야기

할 테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 줘. 정말 고마워. 내 마음속에 있는

악한 마음이 너의 설득으로 다 사라진 것 같아. 이제 그레이브

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미하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로웨나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입술에는 세상의 모든 참된 사랑을 깨달았다는 듯한 성스러운 미소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닌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인사를 나누었고, 에닌은 모두 행복해 져서 기뻐,

하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문을 열어주는 미하일에게도 “로이를 이렇

게 잘 보살펴 주는 너는 정말 신사야.” 하고 상냥하게 말하고는 나갔다.

에닌이 문 밖으로 사라지자, 미하일은 로웨나에게 슬쩍 물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니?”

“내가 미쳤냐. 그리고 너는 에닌이랑 몇 년을 알아왔고, 나랑은 몇 년

을 알아왔니? 저런 말에 누가 감동해! 이렇게 말 해줘야 집으로 돌

아가니까 그런 거지.”

로웨나는 머리를 휘저었다.

미하일이 한숨을 크릉 내쉬었다.

“나는 너희 둘이 오랜 친구라는 게 언제나 신기하다니까. 너는 매사

에 부정적이고 에닌은 매사에 긍정적이지. 젠장, 너희 둘처럼 정확

하게 반대인 애들도 없을 거다.”

“쟤는 내일 세계가 멸망하니 그 해결책을 달라고 하면, ‘우리 모두 우

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고 진지하게 말할 아이야...

뭐, 나쁜 건 아니지만.”

“그리고 너는 ‘어차피 멸망할 건데 호들갑 떨 필요 있어?’ 할 위인이

지. 그건 나쁜 거다.”

미하일은 로웨나 옆에 털썩 앉았다. 로웨나가 말했다.

“그래도 에닌이 부럽긴 해. 저렇게 바보처럼 살아도 세상 모든 사람

들이 다 사랑해주고, 저 애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잖아. 사람들이

마음속에 어떤 괴물들을 품고 사는 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어

모두들 저 애에게는 그 괴물들을 숨기고 싶어 하니까. 그러니까...

남한테 상처받을 일도 없겠지. 아무도 상처를 주려하지 않으니

까. 아니, 상처받고 슬퍼도 저 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품안

에 들어가면 끝이야. 그러면 저 애 아버지, 저 애 어머니, 저 애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대신 싸워주지....쳇.”

로웨나는 리본을 매만졌다.

“아침에 거울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이게 다 꿈이라서, 다시 그렇

게 못생긴 계집애로 돌아가면 어쩌나. 지금도 그렇게 예쁜 것도 아

닌데....모두가 다 싫어하고 눈살 찌푸리는 그런 계집애로 돌아가면

어쩌나. 다시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돌아

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그 빈 집에 덩그

러니 앉아서 훌쩍 훌쩍 울고 있는 나로 돌아가면.... 아무도 손 내밀지

않지. 아무도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고..... 그렇게 내 옆에 아무도

없어. 그렇다고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비쩍 마르고

못생기고 성격도 나쁜 계집애, 단지 그 뿐이지. 그래서 저렇게 사

는 에닌이 부러운 거야. 그런 불안감 같은 거 가질 필요도, 가질 수

도 없는 애잖아.”

미하일이 말했다.

“너 예뻐, 아주.”

“지금은 예전보다야 조금 낫겠지.”

“아니, 아주 예전부터...... 예쁜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았어. 정말이라

고.”

로웨나는 피식 웃었다.

“많이 상냥해졌구나, 미하일.”

“철들었다고 해 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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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늦었습니다. -_-;; 거의 매일 매일 노동과 빈둥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겨울키 4권 넘겼습니다.

겨울키 1, 2권 나옵니다~

출판 이벤트는 숫자 카드 일렬로 늘어 놓고 자룡이더러 골라보라고 할

생각입니다. 자룡신의 의지만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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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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