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편
덫사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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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날 새벽에 늘 되풀이 꾸는 꿈이 있다.
뱀처럼 길고 길게 이어지는 계단, 굽이치고 흐르고 굽이치며 꺾이는
그 길고긴 계단을 구르듯이 내려가면 바닥에 도달한다.
그곳은 어둠이 고여 있다. 닿을 수 없는 시간 저 편부터 고여 온 어
둠. 그리고 그 안에 그림자들이 숨어 있다.
추악한 그림자들 서러운 그림자들 슬픈 그림자들, 이곳에 고이다 스
며들어 사라져 버린 그 죽은 뿌리 같은 자들이 남겨 놓은 그것들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성좌의 좌표들, 깊이 모를 검은 샘, 그 안에 잠든
수수께끼 같은 것, 그것들을 둘러보고 만져보고 느껴보다 돌아오곤
한다.
가는 길 모퉁이, 어둠 조금 옆에는 아버지가 누워 있다. 죽음이 조금
비껴난 곳에 웅크려 힘없이 사그라져 들어가는 한줌의 생명을 가슴에
간직한, 그런 아버지가. 그 온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죽어가는
나무를 보듬듯이 지켜보고 보살핀다. 내가 옆에 있어요, 아버지. 절
대 떠나지 않을 게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언젠가 돌아가
요, 제가 돌아가게 해 드릴게요. 반드시 그럴 거에요. 그러면, 그 벚
꽃 가득 날리는 가로수가 있는 길 옆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그러나 온기는 점점 미약해져 돌처럼 차가워져 버린다. 매정하고 가
혹하게, 필사적으로 움켜잡은 유릭의 손 안에서 사그라져 버린다.
남은 것은 깊은 어둠 속에 웅크린 자신. 외로운 자신, 슬픈 자신,
버려진 자신.
너는 나쁜 아이야.
어둠이 속삭였다. 웅크려 앉아 눈을 빛내며, 그러며 유릭에게 속삭였
다.
너는 나쁜 아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라고. 모든 것이 너 때문이
야.
유릭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고 창백한 두 손이 보인다.
무력하고 작은 두 손, 아무 것도 움켜잡을 수도 버틸 수도 없는 그런
작은 손이.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부인하고 싶었다. 아니야, 아니
라고. 그러며 유릭은 흰 손을 뻗어 무언가를 움켜잡았다. 차가운
옷자락 같은 것이 잡혔다. 무엇인 지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매달
려 외쳤다. 도와줘요, 저것을 쫓아내 주세요. 제발요, 부탁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아무 답도 없었다.
유릭은 눈을 크게 떴다.
이제 그의 앞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비쩍 마른 죄수였
다. 팔과 다리마저 쓸 수 없는 그런 자가 눈을 활활 태우며 유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다. 숨쉬며 분노하고 증
오하고, 그러며 이 안에 오롯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유릭은 그에게 속삭였다.
그래, 아저씨. 아저씨를 도망치게 해 줄게요, 밖에 나가게 해 줄게요.
난 할 수 있어요. 당신을......저 빛이 넘치는 세상으로 돌려 보내줄
게요. 그러니 내 부탁을 들어줘요. 죽여 버려줘요, 아버지를 그 꼴
로 만든 자를! 그 자가 나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그러니까 나
는 나쁜 아이가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어서 나가요, 에드먼드-!
나가서 그를 죽여 줘요!
유릭은 눈을 떴다.
노란 저녁햇살에 물든 천장이 보인다. 반쯤 열린 창문사이로 스며든
바람에 얇은 커튼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창가에 무언가가 앉아 있
다가 푸드득- 날개를 치며 날아간다.
몸이 욱신거렸다. 어깨가 저리고 머리가 아프다. 유릭은 이마를 짚으
며 몸을 일으켰다. 피곤한가 보다. 유릭은 창문에 등을 기대고는
숨을 깊이 들이 마쉬었다.
참 오랜만에 꾸는 꿈이다. 파난 섬의 지하 감옥과 아버지, 그리고 그
의 손으로 잡아끌어 밖으로 날려 보내 준 죄수. 피곤한 날이면 그가
머릿속에 가득 떠오르고는 한다. 그의 불타는 듯한 눈동자가 번
쩍이며 심장을 움켜쥐고 영혼을 뒤흔들고, 새벽빛과 함께 휩쓸려
사라지고는 한다.
그 사람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과연 다시 걸을 수 있게 되기는 했
을까, 무엇을 하게 되었을까. 섬 밖으로 나가기는 했을까, 섬 안에
그냥 남아 있을까.
유릭은 젖은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그가 잠들어 있던 거
실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카밀턴을 발견했다. 저녁햇살을 받으며
나른히 고개를 젖힌 채 졸고 있는 그는, 놀랍게도 제복으로 갈아입
고 있었다.
“카밀턴 경.”
“아, 음? 이런 하사, 일어났군.”
카밀턴은 눈언저리를 문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복 어깨에는
금빛 술 흔들리고, 가슴에 두른 휘장도 햇살에 반짝였다. 팔과 가
슴에서는 보기도 황송스런 장군의 계급장이, 그 위에는 그가 지휘했
던 서부군단의 상징인 검과 드래곤이 그려져 있었다.
“웬 제복....이십니까?”
“특무부로 갈 예정이지 않은가. 차려 입고 가야지.....”
카밀턴이 일어나자, 유릭은 그에게 다가가 비뚤어진 휘장을 고쳐 매
주고 어깨위에서 가슴으로 이어진 금빛 줄 역시 정돈해 주었다. 카
밀턴은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건 지금 출발하지. 빠를수록 좋지 않은가.”
“그 전에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응?”
유릭은 발치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열어 깊숙이 숨겨 놓았던 카밀턴의
수첩을 꺼내 건네주었다.
카밀턴의 눈이 따스해졌다.
“고맙네. 설마 들여다보지는 않았겠지?”
“설마요.”
시도는 한번 했지만, 침입자가 들어오는 바람에 못했다. 갑자기 그것
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봐도 안 봤다고 거짓말 했을
테지만, 거짓말은 안 하는 것이 덜 찜찜하다. 카밀턴이 말했다.
“들여다봐도 큰 비밀은 없으니 상관없지만.... 보지 않았다면 보여주
지.”
카밀턴은 수첩을 열어, 그 뒤에 꽂혀 있는 사진 몇 장을 꺼냈다. 그
리고 그것을 따스하게 바라보고는 유릭에게 내밀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합쳐도, 이보다 값진 것은 없지.”
유릭은 예전에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곤 하던 카밀턴을 기억하고 있
었다. 그 사진을 볼 때면 언제나 유릭을 내 보내곤 했지만, 문을
닫기 전에 언제나 수첩을 여는 카밀턴을 볼 수 있었다.
낡은 사진이었지만 그 안에는 유릭이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하나는 소녀 시절의 프리델라, 빛깔 없는 사진속의 그녀는 지금의 모
습을 생각한다면 상상도 못할 복장이었다. 허리는 잘록하게 조이고,
레이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는, 약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부풀린 소매 아래로 뻗은 가는 팔에는 흰 장갑이 끼어져 있다.
다른 사진은 둘의 결혼사진이었다. 지금도 젊어 보이는 카밀턴이지만,
그 때의 그는 정말 소년 같아 보였다. 무관심한 프리델라와는 달
리 그는 활기차 보인다. 짐짓 점잖은 척 하고는 있었지만, 지금도
눈가에 반짝이며 사라지곤 하는 그 천진난만함은 이 때에는 생명처
럼 두 눈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다른 사진- 유릭은 잠시 시선을 멈
추었다. 이제 셋이었다. 훨씬 최근에 찍은 사진 같아 보인다. 서로
에게 기댄 그들 사이에, 다섯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
가 있었다. 프리델라와 닮은 듯도 하고 카밀턴과 닮은 듯도 한,
완벽하게 새로우며 축복인 듯도 보이는 그런 소녀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
“따님.....계십니까?”
“있었지....... 사고였어. 손 쓸 수도 없었지.”
유릭은 사진을 돌려주었다. 카밀턴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그 애가 떠나자 프리델라도 떠나 버렸어. 마음도, 몸
도...... 둘 모두에게 버림받아 버리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저택 안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누워 있더군.”
“하지만 이혼한 이유가.....”
“내가 사고 쳤을 때는 벌써 별거 중이었어. 그리고 그 소문이 귀에
들어갔는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이혼장만 보냈더군. 원망도 질책도,
심지어 찾아와 슬퍼하지도 않았어. 종이 한 장 위에 내 이름을 적
는 것만으로, 나와 그녀의 모든 것이 끝나 버렸지. 그녀는 파난으로
가 버리고, 나는 서부전선으로 갔고. 내가 서부전선에 있는 동안
이혼은 정말 순식간에 처리되더군.”
카밀턴은 수첩 안으로 사진을 밀어 넣었다.
“외숙부로부터 그녀와 결혼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받았을 때, 나는
반대했다네. 절대 그렇게 할 없다고. 하지만 내 외숙부는 내가 수
락을 하든 말든 처리해 버리더군. 나를 위해서라고, 몇 년이 지나면
분명 자신에게 감사할 거라 윽박지르며...... 그렇게 그녀와 결혼하
게 되었지.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어. 그녀와 그런 식으
로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카밀턴은 안경 테두리를 쓸어 올렸다.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
는 걸까- 그러나 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나를 미워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를
원했지만, 그렇게 얻고 싶지는 않았지. 그래도 그녀와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을 때는........노력하고 싶었어. 어차피 이리 된 거라면,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 보자고. 어쨌든 내 사람이 되었으니, 내
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노력했으니까,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니까 그녀도 내 진심을 알아주었다고 생각했지. 리디
아가 태어난 뒤에는 확신했고, 안심했어. 아이들은 더 태어날 테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행복했다고
생각하네, 진심으로 행복했다고.......하지만 리디아가 죽은 뒤에,
그 모든 것이 내 착각이고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카밀턴은 고개를 저었다.
“매 달린 건 나였어. 그렇게 웃으며 지냈던 모든 추억이 나의 착각이
었다고,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시 시작해 보자고 몇 번이나 말했지. 화내고 타이르며, 사정하
며 윽박지르며, 그러며.........하지만 결국 나를 떠났지. 결혼, 아이-
그런 것들로 묶어 둔 주제에, 그래도 행복하게 해 주었다고 착각하던
나를 떠났다네.......그래, 결국에는 나도 지쳐버렸지. 지쳤어, 너무나......”
그의 눈은 어두웠다. 유릭은 눈길을 거두었다.
“저희들은..... 언제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삽니다.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를 집어 삼킬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
“알고 있어.”
“프리델라 님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니, 저보다 더 오래 이 일을
해 오셨으니, 저보다 더 그런 불안과 공포에 익숙해져 계실 겁니다.
마법을 쓰기 위해 읽어 내는 왜곡된 의지보다 더욱 왜곡된 의지를
읽는 순간부터, 우리들은 이 세상과 격리됩니다. 그리고 그 마령
들을 다스리고 부리며, 보통 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얻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들은 아슬아슬하게 지옥과 현실을 오고가게 됩
니다.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매일 밤 우리들은 그 힘이 우리 자신
을 집어 삼키고 바스러뜨리는 악몽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런 우리들
안에는 언제나 두개의 자신이 살게 됩니다. 힘에 취하지도, 휩쓸
리지도 않으며 힘겹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신과. 이 힘에 모든 것
을 맡기고, 제약과 억압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자신.
그리고 그런 우리들에게는 끝없는 제약과 억압이 따릅니다. 제
국은 우리들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필요로 하고 있고, 그렇기에
우리들을 키우고 훈련시키면서도 끝없이 감시합니다. 경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끝없이 감시당하고 제약받으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죽음과 유폐의 나락 직전의 공포 속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들은 제국의 노예들입니다.”
유릭은 흐릿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적대합니다. 사람들은 약하고, 그
런 이들의 불안과 공포는 상대를 향해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들은 차라리 괴물에 가깝고,
그들이 정한 선 외부에 존재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우리들을 진정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있어
영원한 외부인이라는 것, 그리고 소수라는 것입니다. 프리델라 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
“카밀턴 경, 우리 같은 ‘흑마법사’들은 끝없이 배척받습니다. 이 길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저희들 끼리 뭉치거나 저희들 끼리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배척받게 될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니, 그 이전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진실을
알게 된 그들로부터 배척받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받아들여진다 할
지라도, 자신이 가진 힘에 굴복하여 잡아먹히게 될까봐 두려워합니
다. 그들에게서 떠나거나, 그들이 그 힘 때문에 죽게 될까 두려워하
게 됩니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저희들입니다.”
목덜미로 바람이 느껴진다.
“아무리 진심을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떠
나는 것 밖에는, 미련이나 헛된 희망이 더 커지지 않도록 돌아서는
것 밖에는, 감정이 더 커지지 않도록 외면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프리델라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인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카밀턴 경,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이며 아무리
진심을 아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요. 그러니...
프리델라 각하를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카밀턴은 흐릿하게 웃었다.
“자네는 내 마지막 희망마저도 무너뜨리는 군.”
“진실을 알면, 진실 된 희망도 찾게 되실 겁니다.......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이군요, 죄송합니다.”
“하사, 가끔은 순진한 말을 해 줘. 사랑하는 마음만 갖는 다면 언젠가
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라고, 희망을 가진다면 언젠가는 소망을 이루
게 될 거라고.”
“전...”
유릭이 하려는 말을 카밀턴은 고개를 저어 막았다.
“나도 알아. 희망은 절망한 자에게 남겨진 최후의 고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가끔은 믿어 보고도 싶네. 그래도, 이런 나에게라도 행복이 남아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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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어찌되었건 7일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건.......커그 작가연재 최근 게시물은 저의 독주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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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