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66화 (66/174)

제65편

덫사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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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군, 중령.”

카밀턴은 거의 두 시간에 걸쳐 뷰겐트가 끙끙거리며 완성해 놓은 ‘제

보’를 단 5분 만에 읽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뷰겐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각하의 예술적 소양이 형편없기에 명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

니고요?”

“내가 봐도 형편없으면 정말 절망적인 거라고 보는데.”

“미움 때문에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비하하는 건 좋지 못하다고 봅니

다만.”

“스스로가 정말 굉장하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나마 좋게 평가해 줬더

니만, 사적 감정 때문에 비하를 한다고 억지를 부리다니 참으로 유

치한 논법이야.”

“어찌하여 그리도 잔혹한 불칼을 찔러 넣으시는지 모르겠군요. 노을

보다 붉은 상흔을 제 자존심에 남겨 놓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입

니까.”

“그럴 때는 닥치고 뒈져버려, 이 개새꺄. 라고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

이네. 하사, 봉투 좀 주게.”

그리고 카밀턴은 제보를 유릭이 건네주는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동안 유릭은 날뛰는 칼 뷰겐트를 말려야 했다. 그는 움직이는

것만도 재난이고, 펄펄 뛰면 대재앙이다. 눈앞에서 대괴수가 날뛰고

있음에도 카밀턴은 태연했다.

“자, 이제 이걸 신문사에 던지러 가봐야겠군.”

“오늘 어디서 주무실 예정입니까.”

“그야 트레비스 네에서 자야지. 지금 브란 루게나까지 가는 건 너무

귀찮아. 게다가 트레비스 네 집에는 내 침실도 마련되어 있단 말

이네.”

유릭은 지금은 새벽 2시이고, 신문사 들른 다음에 그곳으로 가면 아

마도 새벽 4시가 될 것이며, 트레비스는 자다가 침대에서 끌려 나

와야 할 거라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생각하기는 했다. 그러

나 카밀턴이 신경 쓸 위인도 아니고 트레비스도 이미 이 카밀턴에

관하여 매우 잘 아니 ‘너그러운 자세’를 취할 거라는 생각에 그만

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무리 내가 계획하는 거라지만 언짢은 건 사실이군. 부자

만 터는 의적 박쥐가 그따위 형편없는 존재였다니 말이야. 물론 효

과는 아주 좋았어.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그 괴도에 쏠려 있고, 모

든 신문 지면은 그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느라 다른 문제들

은 신경 쓸 겨를도 없지. 그래, 어쨌건 신문도 팔려야 하니, 팔리는

기사를 쓸 수밖에. 엉터리든 사실이든....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젠장, 트레비스의 말을 이제 이

해할 수 있겠어. 현실에 아무 기댈 것이 없는 사람들은 환상이라도

보고 싶어 하고, 그런 환상이라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자신의 의

무라고. 아름다운 아가씨와 잘 생긴 청년, 말도 안 되게 쉽게 풀리

는 이야기들. 나는 언제나 비웃었지. 그런 환상 따위에 위안을 받는

것 이야 말로 낭비라고. 그럴 시간에 뭔가 해 보려고 버둥거리기

나 노력하거나 하라고 말이야........ 지금 이 괴도역시 마찬가지네.

만약에 이 모든 것이 정말 그들이 벌인 한바탕 환상이라면, 니콜라

스 추기경은 정말 기가 막히게 멋진 한 편의 극을 보여준 거야. 너

무나 근사한 환상을 말이야. 사람들이 잠시나마 ‘세상은 그래도 재미

있는 곳이야’ 하고 착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환상을, 잠

시나마 가슴 두근거리며 상상하게 만드는 그런 환상을. 유감스럽게도

사람은 현실보다는 환상에서 많은 위안과 희망을 얻는 군.”

그리 말하는 카밀턴의 얼굴은 세상에는 천사 같은 건 없어, 라는 말

을 들은 아이처럼 침울했다.

“어쨌건..... 이번에는 내가 그들을 위해 멋진 공연을 보여줄 차례이

군. 지금까지 나를 상대로 벌인 그 기가 막힌 사기극에 대한 화답

으로 말이야.”

그리고 봉투를 흔들었다.

유릭이 말했다.

“제목은 장군의 귀환, 장군의 승리, 쯤이 될 테지요.”

“주제는 권선징악 이지. 의지는 나의 검이요 용기는 방패리니,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대중이 얼마나 감동하겠나. 완벽하게 흥행 성공 할

거라고.”

뷰겐트가 옆에서 투덜댔다.

“그냥 엽기드라마요. 사람들은 좌절할 테지. 말티어 쿠로의 비극을 본

시골 소녀마냥.”

카밀턴은 그를 그윽하게 쏘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이제 가 볼까.”

“안녕히 가십시오. 가다가 넘어져 코 깨지는 건 잊지 말고. 그리고-

이봐, 유릭.”

“네, 말씀 하십시오.”

“그런데, 뭐.....음.”

뷰겐트는 책상을 툭툭 치고 발을 휘저은 다음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

다. 대강 눈치를 챈 카밀턴은 봉투 끝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자네들이 내 부하라면 정보누락은 죄지만, 아니니 자리 비워주지. 이

야기 해 보게나.”

카밀턴이 나갔다. 문 밖으로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꽤 먼 곳까지 이

어졌다. 유릭은 그가 정말 비밀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자, 그 너

그러움에 감사했다(사실 이런 건 상관하지 않는 위인이기도 하지만).

“말씀하십시오, 중령님.”

“네가 지난번에 말하고 간 사건에 대해 좀 알아봤다.”

“제 숙부님이 연관된 마그레노 항의 사건 말입니까?”

뷰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오기 전까지, 나는 프리델라 각하께서 수사하던 일을 이어받아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인지는 지금 당장 말하지는 않겠지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대 숙청기간동안 니콜라스 추기경이 뒤로 챙긴 많고 많

은 압수품에 관한 일이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네 숙부가 낀 그 사

건의 관련자 전원이, 그 일과 관련이 되어 있어. 네가 홀라그로 성

에 초대받은 그날, 그 관련자 전원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게 전혀 이

상한 게 아니야. 그들은 한 사건으로 얽혀 있고, 그 사건은 아주

부도덕한 일이지. 부도덕하면 부도덕할수록, 그 관련자들을 끝도 없

이 옭아매게 된다. 즉, 그들은 공범자야. 니콜라스 추기경을 포함하여,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자세히 여쭤 봐도 됩니까?”

뷰겐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된다.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네가 위험해져서야. 특히

나 너는 ‘반동집안’ 출신이야. 일이 잘못되면 너는 좀 심하게 다칠 수

있어.”

“그렇다면.......말씀 하실 것만 말씀해 주십시오.”

뷰겐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도 없음에도, 그는 목소리를 확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원래는 프리델라 님이 수사를 하고 있었다. 어차

피 프리델라 각하는 레반투스 대공과는 사촌지간. 그 분이 니콜라스

추기경을 실각시킬 만한 단서를 찾았다면 놓칠 리가 없지. 그 분께

서 파난으로 가신 후에, 대략 몇 달 간 그 일을 맡아 수사하던 장

교가 있었다. 그가 암살되자, 프리델라 각하는 레반투스 대공께 나

를 추천했지. 내가 마침 제도로 가게 되어 있기도 했으니까. 그 덕에,

모든 업무를 바로 이어받게 되었다. 그 중에 원래는 프리델라

님의 부하였다가, 지금은 내 부하가 된 녀석이 하나 있지. 나와 프리

델라 각하를 제하고, 그 사건에 가장 깊게 관여하고 있는 자인 셈이

다. 그는 몇 년 간 끈기 있게 많은 정보를 빼 와 특무부에 알려왔

다. 그런데 그 녀석이, 네가 아주 최근에 말한 그 괴도에 대해 보

고를 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홀라그로 성의 일을 보고했을

때와 거의 차이도 없어.”

“예상이 맞는 겁니까.”

뷰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괴도와 니콜라스 추기경, 그레이브 치

안청장이 연관되어 있다는 건 분명하다. 거래를 한 걸 수도 있어.

괴도의 범행을 눈감아 주는 대신, 카밀턴 경을 암살해 준다던가, 하

는 식으로.........”

“그렇다면 이 일은 단순한 암살범 수사가 아니겠군요.”

“그래. 그 괴도를 잡는 건, 우리로서도 아주 큰 대어를 잡는 일이란

말이다. 카밀턴이란 인간이 얄밉기는 하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범

인을 잡게 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내가 직접 나서고 싶지만, 그 녀석에게 명령해 두겠다.

여차하면 너와 협조하라고. 접선해 오면 응하도록 해라. 좀 괴짜

인 녀석이니, 이상하게 나타났다고 당황하지 말고.”

“괴짜들 상대하는 데는 이골이 났지요.”

유릭이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길은 문 밖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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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놀러 갔다 오느라 늦었습니다. --;;

이 다음편이 언제 올라올 거냐고 물으신다면, 내일이라 말씀 드리겠

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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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18장 세 개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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