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편
세 개의 가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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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속도군요.”
“내가 원래 전격전을 좋아하거든.”
카밀턴은 초대장 위에 주소를 적는 하인과 하녀들을 흐뭇하게 바라보
며, 그 옆에서 봉투에 초대장을 넣는 일을 하고 있는 유릭에게 으
쓱거렸다. 그는 요즘 거의 매일 매일 으스대고 있고, 그만큼 활기
찼다(잘난 체 하는 것이 삶의 활력소인 사람이다, 정말로). 뒤에서
명단을 확인 하고 있던 트레비스가 고개를 휙 돌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노닥거리지 말고 자네도 좀 도우란 말이야!”
순간 하인 하녀, 심지어 유릭마저도 결사적으로 외쳤다.
“절대 안 됩니다!!!”
방금 전 도와준답시고 설치다가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는지 잘
아는 그들은 단호했다(상상하기도 싫다). 게다가 “하나도 도움 안
되니까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란 말이다!” 하고 말하여 카밀턴이 꼼
짝 못하고 앉아 있게 만든 당사자는 다름 아닌 트레비스다.
그러나 티격태격 하는 친구가 어느 날 아침에 느닷없이 계획한 일인
데도, 일은 정말 빠르게 처리되었다. 트레비스는 오케스트라 단장
에게 연락을 하고, 몇몇 가수들에게 연락을 하더니 그날 저녁으로
공연자 명단과 프로그램까지 완성했다. 카밀턴은 명부 몇 번 뒤적거
리는 것만으로 필요한 사람 명단을 좌악 뽑아내더니 초대장을 만들
라 ‘명령했다(귀족 답게, 자기 손으로 하는 건 거의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유릭과 함께 수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지인들을 찾
아다녔다. 나이 지긋한 퇴역 장군이라든가 애국심 넘치는 중년 귀
족들이나 자산가들이라든가 참전하기만 하면 당장에 역사책에 가장
위대하게 기록될 전공을 새울 거라 기대하는 혈기 왕성한 젊은
귀족들이나 사관생도이나 그들을 아들딸로 둔 집안까지.
카밀턴이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온갖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보며, 유릭은 왜 이 남자가 부하들과 ‘여자’들에게 그토록 인기가
좋은 지 알 수 있었다.
솔직담백하고, 꾸미지 않으며,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언제나 귀를
기울여 주고 잠자코 있다가는 웃으며 자신의 의견을 정중하게 말
한다. 자신을 배려하는 상대 앞에서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다. 그것
도 서부 전선의 신화이자 영웅인 카밀턴 장군이라면(여자들의 경우
그가 미남이라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제도에서 카밀턴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벼락 꽂히는 듯한 전격전의
일인자, 전쟁터 사방을 누비며 직접 명령을 내리는 장군. 언제라도
나타나고, 어디에서든 나타나는, 그리하여 언제나 옆에서 명령을
내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듯한 그런 장군이 카밀턴이었다. 승전하
는 만큼 후퇴도 자주 자주 하는 장군이라 후퇴의 명장 이라는 오명도
붙어 있었지만 그것은 승산 없는 전쟁에서는 미련 없이 병력을 빼
버리기 때문이었고, 오히려 그 때문에 제국군은 그가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라 믿기에 마음 놓고 돌진한다. (
물론 실제의 카밀턴은 그런 신화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산만한’
남자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랬기에 지금 유릭은 카밀턴이 ‘승산’
을 염두에 두고 이런 ‘전격전’ 임하는 것이라 믿기로 했다.
이제 카밀턴은 거의 대부분 줄이 그어진 명부를 들여다보는 중이었
다. 이들 모두 카밀턴이 주최하는 ‘서부 전선의 전사자들의 가족들을
돕기 위한 기금모집 음악회’, 정확히 말하자면 ‘암살자야, 여기로
오려 무나 음악회’에 초대하기로 한 유명인사들을 거의 대부분 찾
아간 상태였다. 갈 때마다 유릭은 그저 ‘임시 부관’ 정도로 소개되
고 있었지만, 덕택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유릭은 봉투를 붙이며 카밀턴에게 말했다.
“초대자 명단에 니콜라스 추기경과 렌든 각하 부부도 포함되어 있던
데요.”
“내가 찾아가면 문지방에 소금이라도 뿌릴 걸. 둘 다 내가 자기들 마
누라 옆에만 가도 눈들을 부라린다니까........ 특히나 렌든 녀석. 그
놈은 주제에 너무 괜찮은 여자와 결혼했다니까.”
유릭은 귀부인들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매우 긴장한 얼굴로 카밀턴과
자신의 부인을 바라보곤 하던 몇 몇 귀족들을 떠 올렸다. 카밀턴을
대할 때 체면 차리는 사람도 그 정도인데, 렌든이라면 정말 노골적
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니콜라스 추기경의 ‘부인’이라고 했습니까?”
“아, 자네는 모르겠군. 작년에 결혼했어.”
“네?”
“응, 왜 그렇게 놀라나. 추기경도 이제 결혼한다 해서 전혀 어색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는데.”
“경, 저는 추기경이 몇 살인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까.......어이, 트레비스.”
트레비스가 귀찮다는 듯이 답했다.
“스물여덟.”
“그렇게 젊었습니까?”
유릭은 니콜라스 추기경이라는 인간이 거의 예순은 된 인물로 생각하
고 있었다. 카밀턴이 말했다.
“그 정도 먹는 게 당연하지. 돌비체와 손잡았을 때가 열 한 살이었으
니까....물론 그 때는 대리인을 통해 움직였지. 나도 그 녀석이 모습을
드러낼 때 까지 그 정도 꼬맹이인 줄 몰랐어. 그런데 벌써 20년이
가까워지는 군. 그 빌어먹을 꼬맹이가 이 나라를 간식거리로 갉아
먹기 시작한지.”
“어이, 카밀턴.”
트레비스는 잔뜩 긴장한 하인 하녀들을 가리켰다. 카밀턴은 쳇- 하
고는 입을 다물었다.
저녁 먹을 무렵이 되자 모든 작업이 끝났다. 트레비스는 내일 아침에
모든 초대장을 보내기로 하고 그것을 집사에게 잘 간수하고 내일
아침 하인들을 시켜 모두 배달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특별 업무에
동원된 하인들에게는 요리사에게 시켜 후한 저녁식사를 준비 해 주
도록 하고, 고급 포도주도 한 병 건네 돌려 마실 수 있도록 했다.
일이 일단 끝나고, 앞으로 나흘 정도 남은 금요일 밤의 음악회를 기
다리는 일만 남았다. 카밀턴은 유릭이 어린 하녀들로부터 ‘과한 친절’
을 받는 동안(그 동안 그녀들이 가져다 준 간식들은 식사보다
많았다) 트레비스와 카드놀이를 벌여 대략 20카스티야를 날렸다. 그
리고 그 돈을 유릭이 카밀턴 대신 앉아 다시 땄고, 유릭은 그 돌려
받은 돈을 카밀턴에게 넘겼다.
“카드놀이는 언제부터 했나?”
두 시간 동안 딴 돈을 삼십분 만에 모두 잃은 트레비스가 투덜대며
그렇게 물었다.
“열두 살입니다.”
“......불량소년이군.”
유릭은 카밀턴이 수고비로 주는 10카스티야를 받으며 웃었다.
“어린 아이라, 달리 돈 벌 곳도 없었거든요. 키가 또래에 비해 큰 편
이었던 데다가 변성기도 일찍 와서, 얼굴만 잘 가리면 아이라는 걸
들키지 않았습니다.”
“후견인도 없었나?”
“계시긴 했지요....”
유릭은 돈을 옷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카밀턴 경, 이제 주무실 시간 아닙니까?”
“잘 생각이었네. 하지만 어차피 내일은 할 일도 없는 걸. 늦게 자도
크게 상관은 없을 듯한데.”
“자네는 늦게 자나 일찍 자나 일어나는 시간이 거기서 거기잖아. 항,
상, 늦게 일어나니까.”
“자네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것 같아.”
두 사람이 또 싸우기 전에 유릭은 카밀턴의 등을 밀며 거실을 나갔
다. 무사히 침실로 돌아간 카밀턴은 몇 번 넘어지고 부딪히고 한
뒤에(늘 있는 일이라 안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도 유릭은 상관하지
않았다) 잠옷 차림으로 나오더니 수고해 주게, 하고 격려하듯 말하
고는 다시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 뒤에, 유릭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
면 진짜 잠든 것이다.) 침실 앞에 놓인 긴 소파로 갔다. 뷰겐트가
분명 자신의 부하들이 이 근방을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말라 했지
만, 아예 안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늘 이렇게 문 앞을 지키고 있
곤 했다.
유릭은 천장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고, 그 적막은 눈
꺼풀을 묵직하게 했다. 피곤했다. 그렇게 조금 누워 있으니, 적막
이 차 있던 귀 언저리가 웅웅 울린다.
처음에는 깊은 계곡을 울리는 메아리 같던 그 소리는 점점 뚜렷해
지며 파고들어 왔다. 유릭은 배게 깊숙이 머리를 묻었지만, 그 목
소리는 더욱 뚜렷하게 들려온다.
-왜 그렇게 애쓰는 거야, 형.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줘야 나
도 형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을 거 아냐.
후견인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 걸까. 파난을 떠난 뒤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동생의 목소리가, 옆에서 말하듯 들린다.
가토가 아랫입술을 물고는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생각난다. 녀석
은 본국으로 떠나니 앞으로 두어 달은 연락 못할 거라는 형의 말을
듣더니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귀밑으로 짧게 깎은 금
발머리가 안쓰러워 보여 위로해 주었다.
너 때문에 내가 희생한다고는 생각하지 마. 그냥, 지금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너는 아직 할 수 없는 것뿐이니까.
-왜 그렇게 혼자서 다 하려고 해? 도와 달라고, 힘들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나도 할 수 있다고! 학교 정도는 일년 정도 쉬고 돈
벌 수도 있고....
나서려 하지 마, 가토. 난 괜찮으니까. 본국에 돌아오는 대로 연락할
게. 그 때 근사한 데서 저녁이나 먹자고.
그 녀석이 뭐라 하든 전혀 기쁘지 않다. 씁쓰레한 냉소. 애정도 무엇
도 아닌, 의무감. 어쩌면 우월감일지도 모른다. 너는 못해, 나는 할
수 있고.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뿐이야.
내가 무너지면, 내가 쓰러지면, 내가 무릎 꿇으며 더 이상 못하겠다
고 울음을 터뜨리면 너는 어떻게 될까. 그 때가 되면, 너는 학교 담
밖을 나가자마자 겁에 질려 버릴 걸.
그래, 아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는 어른들이 완벽하다고 믿어야
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그 품안에 처박혀서 그들이
무언가 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네가 속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
는 거야. 하지만 그 편이 편해. 어른들이 완벽하지도 않고 강하지
도 않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너는 더 이상 아이일 수 없으니까.
가토, 네가 해야 할 일이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몇 배로 더 힘든 일
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은 더 늦는 게 좋아....... 우리 앞의 진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니까.
차츰 귀 언저리를 괴롭히던 소리가 잦아지기 시작하며, 잠이 그를 스
물 스물 덮어 누르기 시작했다.
로웨나. 그녀가 생각난다. 쓰레기 더미 위에 낮잠 자는 고양이 같은
그 아이가, 그러나 밤이 오면 형형히 눈을 빛내며 골목길을 누빌,
무엇 하나 없지만 무엇으로부터라도 자유로울 그 아이가.
내게도 너처럼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무것도 없어도 모든 것을 가
진 너처럼, 그렇게 살 수 있게 될까.
순간,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것이 목덜미를 스쳤다. 씩, 씩- 숨 몰아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슴이 답답해져 오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
한다.
유릭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가 응시하는 검고 검은 어둠 속에, 두개의 붉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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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스토커...........
다음편은~ 내일 모레.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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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