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69화 (69/174)

제68편

세 개의 가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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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동자가 스르르 멀어졌다. 흐릿하게 스며들어오는 달빛에 그것

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긴 목과 검은 날개, 유릭의 발치 근

방의 어둠 속에 웅크려 앉은 검은 몸체.

유릭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였다.

“류케.”

돌과 돌이 부딪힌 듯 불꽃이 팍 튀더니, 그것의 검은 목이 뒤로 휙

물러났다. 씩씩-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울부짖을 듯이 거칠어졌다.

유릭은 몸을 틀어 등 뒤에 찬 총을 뽑았다. 그것의 긴 목이 유릭의

손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유릭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더 먼저였다. 푸른 섬광이 그 머리에 부닥쳤다. 츠캉-! 섬광이

반사되며 반대편 벽을 꿰뚫었다. 구멍이 검게 찍혔다.

쎄엑--! 그것이 예전의 불쾌한 기억을 떠 올린 듯이 사납게 내뱉었

다. 유릭은 그것의 목에 총구를 얹었다.

“암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 빛이 뿜어져 오르며 그것을 밖으로 내동댕

이쳤다. 고양이가 사냥한 쥐를 내 던지는 듯. 콰앙! 그것이 벽에 엄

청난 힘으로 부딪혔다. 거실이 울리며, 벽에 걸린 그림이 흔들렸다.

창문이 찌릉- 날카롭게 운다.

유릭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몸을 웅크리더니, 겁에 질린

사마귀처럼 날개를 확 펼치며 울부짖었다. 크렁--! 그것이 내 뿜는

뜨거운 바람이 목 언저리와 볼을 확 덮쳤다. 망설일 것도, 고를 것도,

재어 볼 것도 없었다.

“히게아--!”

순간 그것의 붉은 눈이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붉은 마법진의 중심이

떠오르려는 순간에 그것이 땅을 박차고 유릭을 덮쳤다.

“젠장!”

유릭은 몸을 날려 피했다. 그것은 그대로 창문에 부닥쳤다. 챙그랑!

유리조각과 벽돌 조각이 움츠린 어깨위로 우스스 쏟아졌다. 뜨거운

바람이 방 안을 휩쓸었다.

유릭은 급히 몸을 폈다. 그것은 이제 깨어지고 박살난 창턱을 짚고

있었다. 달과 별, 검은 하늘을 거대한 붉은 날개를 펼쳐 가리고, 그

발톱으로 창턱을 그러쥐고, 목을 길게 굽혀 유릭을 노려보았다.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뿜어져 오른 푸른 탄환이 검붉은

날개를 꿰뚫었다. 콰악-! 후려 맞은 듯한 소리가 들리며, 검붉은

마물의 왼쪽 날개에서 피와 날개조각이 팍 튀어 올랐다. 그것은 창턱

을 박차고 날아오르려 했지만, 한번 크게 허공을 후려치며 뛰어 올

랐을 뿐이다. 허공에 붕 떴다가, 급격히 몸을 기울이며 떨어졌다.

유릭은 창턱을 박차고 정원으로 뛰어 내렸다.

그것은 바닥을 굴렀다가 몸을 일으키더니, 한쪽 날개를 기울인 채 여

기 저기를 둘러보며 불안하게 꽥꽥 거렸다. 트래비스의 정원사가

세심하게 가꾼 꽃밭이 그 발톱에 뽑히고 불같은 날개에 타서 엉망

진창이 되었다. 유릭은 총구를 겨냥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그것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으르렁거렸다. 유릭은 그것의 목

언저리를 살폈다. 방금 전 유릭이 날린 곳이었다. 찢겨져 너덜너덜

한 살점 속에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키케.”

마물의 목 언저리의 빛이 더욱 진해졌다. 다시 그 검붉은 갑주 아래

에서, 마치 얼음에 갇힌 나비 같은 모양이 나타났다. 그것이 핵 마냥,

오래된 호박속의 벌레 화석마냥 그 안에 박혀서 빛나고 있었다.

순간, 마물의 왼쪽에서 은빛의 칼날이 번득였다. 그것이 날카롭게 번

쩍이며 유릭을 향해 내리꽂혀왔다. 유릭은 팔을 휘둘러 그 칼날을

후려쳤다. 그러나 칼날은 매끄럽게 비껴나가더니, 목을 향해 꽂혀왔다.

유릭은 고개를 옆으로 비끼고 상대의 명치를 후려쳤다. 적은 뒤

로 주춤 물러나며 속삭이듯 말했다.

“벨린다.”

마물의 붉은 눈이 빛났다. 그것이 그르릉-- 하고 울며 고개를 숙이

고 날개를 어깨 위로 접더니 유릭을 노려보았다.

“크리게아!”

내뱉듯이 유릭이 말했다. 바닥에 은빛 마법진이 나타났다. 거미

가 줄을 토해내듯이 은빛의 실이 휘감겨 올라 핏빛 마물을 향해 쏟

아졌다. 그 목과 날개에 얼음이 맺히며, 마물의 동작이 멈칫 멈짓

느려졌다. 유릭은 팔을 휘둘러 상대의 목을 후려쳤다. 상대가 나가

떨어졌다. 유릭은 힘껏 그의 허리를 걷어찼다. 컥, 하고 그가 숨을

들이키자마자 그대로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이

상하게도 그 얼굴은 이번에도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분명 사람의

얼굴 일 텐데, 오래된 석상의 닳고 닳은 윤곽마냥 흐릿할 뿐이다.

한참만에야, 유릭은 그가 반투명한 얇은 천으로 복면을 쓰고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가 물었다.

“누구 짓이지, 그건?”

“무슨 말이냐.”

“신문지에다가 쓸데없이 떠벌인 것.”

유릭이 웃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 안에서 뜨거운 것이 스치고 지나갔

다. 그리고 복면을 움켜쥐더니 잡아떼듯이 내렸다.

흰 가면이었다. 달걀처럼 매끄러운 흰 가면에, 버드나무 잎 모양으로

뚫린 눈구멍 너머로 붉은 눈동자가 번쩍이고 있다.

그 흰 가면이 어두워지며 검게 변했다. 붉은 눈은 여전히 형형히 빛

나고 있었지만, 얼굴은 그림자를 덮어 쓴 듯이 검어져 있었다. 유

릭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건만, 심장의 박동수

는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검은 가면의 어둠이 젖어들 듯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

는 이제 핏덩이처럼 시뻘겋다.

-범인은 셋이야.

로웨나가 그리 말했었다.

이제 유릭은 고개를 저을 수 있다. 셋이 아니야, 하나지. 그리고 하나

이자 셋이다.

“가면이.......모두 마령인건가.”

긍정인지 무엇인지, 박쥐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다만, 붉은 빛이 아주 가늘어질 뿐이다.

유릭은 이를 사려 물었다. 상대의 검은 옷자락이 펄럭이더니, 다가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이들은 나와 함께하지. 소환도, 부름도, 다스림도 필요 없어.”

미친,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비웃음 같은 웃음만 얼굴

에 떠올랐을 뿐이다. 가면의 냉기가 볼에까지 와 닿을 듯 했다. 이제

가면은 검은 색이었다. 유릭이 힘겹게 외쳤다.

“류케...!”

섬광이 그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싯돌의 반짝임 같은 그런 허망한

빛이. 그러나 아무 일도 없다, 정말 아무 일도. 순간 목이 틀어 잡

혔다. 그 손의 냉기가 뼈를 얼려 버릴 듯 하다.

상대가 비웃듯이 웃음을 흘렸다. 유릭은 이를 사려 물고 그의 정강이

를 걷어찼다. 윽, 하는 신음을 흘리기는 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목을

꽉 조이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힘과는 완전히 틀리다. 힘도, 성격도,

체격도, 능력도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 듯. 가면이 바뀔 때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 버리고 있었다.

“암만!”

순간 상대의 손이 주춤했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리더니, 흙이 콱

튀어 올랐다. 어둠 속에서 회색빛 나는 것이 솟구쳐 올라 상대를

후려쳤다.

“젠장!”

그는 손을 당기고는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얼룩이 배이듯 나타났던

회색 그림자가 유령의 옷자락 마냥 휙하니 사라졌다. 유릭은 오른

쪽으로 팔을 뻗었다. 가면의 남자가 숨을 헐떡이다가 후려치듯 외쳤다.

“벨린다!”

그러나 유릭이 빨랐다.

“히게아-!”

허공에서 붉은 빛의 점이 맺히더니, 순식간에 화려한 진이 펼쳐졌다.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진에 박히는 순간에, 엄청난 붉은

불꽃의 실타래가 쏟아지며 채 날개를 펼치지도 못한 벨린다를 휘

어 감았다. 촉수에 잡힌 물고기처럼 그것이 펄떡대며 울부짖었다. 꽤

악! 카악--! 하늘을 찢어낼 듯한 굉음이 터지고, 그것이 몸부림

치며 정원이 패이고 나무가 꺾이고 풀들이 뽑혀져 나가고 포석이

으깨어졌다. 불똥이 핏방울처럼 흩어졌다.

유릭은 이제 자객, 박쥐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 자객을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가면은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으르렁거리듯이 숨을

몰아쉬며 붉은 눈을 빛냈다. 검은 몸이 들썩이는 가 싶더니, 갑자

기 휙하니 몸을 일으키고는 뛰어 들었다.

“!”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지만 탄환은 바닥에 꽂혔다. 몸을 돌리는 순간

에 어깨위로 거센 힘이 몰아쳐왔다. 간신히 피했지만, 어깨위로 차

갑고 묵직한 힘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

어왔다. 그리고 피한 반대편에서 은빛 칼날이 쑤시고 들어왔다.

“제길!”

유릭은 엎드렸지만, 이번에는 배를 베이고 말았다. 옷자락이 잘리며

피가 튀었고, 다시 지난번에 느꼈던 그 지독한 통증이 밀려들어온다.

스치기만 했는데,  갈수록 상처가 깊어지다가 결국에는 밤새도록

열에 시달렸다. 그냥 칼이 아니야. 유릭은 팔을 휘두르며 방아쇠

를 당겼다. 탕, 총성이 터지며 비명도 같이 터졌다.

“큭!”

검은 피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치익-! 피가 묻은 풀들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올랐다. 유릭은 한방 더 갈겼다. 피가 한 번 더 튀어

올랐다. 상대는 이제 피에 젖은 허벅지를 움켜 쥔 채로, 숨을 헐

떡이고 분노를 달구며 유릭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릭은 총구를 겨눈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멸과 분노가 모든 피를

끓게 하고 있었다. 어찌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이 그를 압박했다. 여

기서 체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카밀턴이 계획한 대로 해야 하는

걸까.

그 때,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기척이. 다른 놈이 온 것

이다. 두 번째 질문이 속삭이듯 머릿 속으로 다가온다.

어찌해야 할까. 뒤에 있는 놈이 먼저일까, 앞에 있는 저 놈이 먼저일

까....

그런데 앞에 있는 박쥐-달리 부를 것도 없으니 낭패다-가 몸을 웅

크리더니 큭 웃었다. 어떤 의미일까, 비웃는 건가, 아니면 안도하는

건가. 이제 그의 몸집은 작아져 있었다. 후리후리하고 작아져서는,

더 웅크리고 있으니 생쥐처럼 작아 보였다. 그리고 뒤로 잽싸게, 바

람을 탄 박쥐처럼 휘리릭 물러났다.

유릭은 몸을 돌리며 그대로 뒤에 있는 자의 가슴을 향해 총구를 내리

꽂았다. 얼굴이 마주쳤다. 푸릇한 달빛 속에, 차고 흰 얼굴이 있어

유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릭이 아는 얼굴이었다. 유릭은 잠시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눈동자가 유릭을 무관심하게 내

려다보았다. 움직이는 기계에 박힌 듯한, 그 눈동자가.

그는 검은 눈동자를 반쯤 감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엎드려, 크로반 졸병.”

그리고 브랫 키저는 검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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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닭살 커플의 닭장 같은 집에서 닭을 먹고 오느라 늦었습니

다. ;;

닭도리탕은 아주 아주 맛있었습니다......... 물론 그 집의 남편도, 아내

도 아닌, 초대받은 ‘손님’이 한 요리긴 하지만 말입니다.............

......KBS 성우 분이신데, 닭도리탕 해 달라고 불렀다는 군요;;

구자형님과 강수진님과 김승준 님이 '선배'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걸

듣고 있자니 왠지 아스트랄.

p.s 이런이런;;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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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69장

세 개의 가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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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에 그의 검이 허공을 베어냈다. 달빛 속에

그 검이 희게 번쩍이고, 그 검신에서 금빛의 글자들이 끝에서 끝까지

번쩍이듯 나타났다.

“그륜다--!”

그의 검의 궤적을 따라 초승달 모양의 빛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 것

들이 발톱으로 할퀴듯이 허공을 후려쳤다.

빛의 궤적 바깥에, 아래위로 그어 쓴 듯한 마법진이 나타났고, 궤적

이 그것을 꿰뚫었다. 엄청난 힘의 파동이 솟구쳐 올랐다. 세상을

찢어 발겨버릴 듯한, 그런 파동이!~

깨어진 포석이 튀어 올랐다. 흙은 맞은 듯이 후벼 파인다. 비명을 지

르는 듯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쿠훠어엉! 박쥐가 몸을 날렸다. 검은

옷자락이 펄럭이더니, 그가 휘두른 팔의 궤적을 따라 어둠을 찢어

낸 듯이 붉은 빛이 스며 나왔다. 그것은 브랫 키저가 쏘아낸 힘을

막아 쳤다.

꽈르르릉!

“벨린다!”

그가 부르자마자, 유릭이 묶어 두었던 그 붉은 마물의 몸이 산산이

흩어졌다. 허공을 감은 붉은 불길의 촉수가 다시 펼치며, 어둠을

핥았다.

“반!”

유릭의 외침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어둠과 폐허만이 포식 뒤의 뼛조각처럼 남았다. 브랫이 외쳤다.

“물러나 있어, 졸병!”

“네?”

브랫이 앞으로 나섰다.

“총구 거둬. 네 생각보다 센 놈이니까. 요령 없는 것과 엿 먹도록 센

건 별개 문제라고! 어서 치우란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브랫의 검 날은 박쥐를 향하고 있었다. 브

랫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 검을 눕혔다. 검 위로 허연빛이 핥듯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돌아 가. 벌써부터 설치는 건 좋지 않다고.”

박쥐는 아무 답도 없었다. 브랫이 이를 북 갈아붙였다가 외쳤다.

“가라고 했어! 젠장, 여기서 벌써부터 설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어서 꺼져 버려!”

어둠 속에서 박쥐 녀석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붉은 눈동자가 번

쩍이고, 입술조차 없는 가면 끝이 떨리는 듯도 했다. 그리고 어둠을

뭉개듯이 그 몸의 윤곽이 흐려지는 듯 했다. 분명 같은 어둠이

었건만, 더욱 검은 그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었는데, 녹듯이 사라지

고 있었다.

브랫이 검을 내리자, 그 자객은 어디에도 없었다. 씻은 듯이 사라졌

다. 도망친 것이다. 브랫은 검을 거두어 검 집에 꽂아 넣었다.

“왜 놓아준 겁니까.”

“놓아주어야 하니까.”

브랫은 칼자루를 몇 번 치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그리도 태연

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유릭은 지금 그를 전혀 이해거나 납득할 수

없었다. 튀어나온 것도, 이런 식으로 ‘중재’하여 싸움을 중단 시킨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뭡니까?”

“나?”

브랫 키저가 자신을 가리키자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소개하지. 브랫 키저, 치안청 경감.”

“그건 알고.”

“어라, 중령님이 이야기 안했나? 했다고 하던데.”

“중령...님이요?”

브랫의 소속이나 직위를 볼 때, 그의 일상 대화에서 나올 계급이 전

혀 아니라 유릭은 잠시나마 머리가 진공상태가 되었다. 상황을 대강

눈치 챈 브랫이 한숨을 내 쉬었다.

“아무 것도 안한 거나 다름없군. 신의 이름으로, 제기랄.”

순간 유릭의 컴컴한 기억 속으로 불이 들어왔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자신을 탓할 생각은 없다. 브랫이 예전에 저지른 짜증나는 추근덕

거림을 생각해 본다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꽤나 비약이었으니.

“그래....뭐, 소개하지, 본명은 밝힐 수 없으니 그냥 브랫 키저로 알고

있어. 그리고 프리델라 각하와 칼 뷰겐트만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

로는 특무부 소속. 칭호는 그륜다의 발톱. 전후 모조리 생략하고

진부하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적진에 박아 놓은 정보원이다. 어쩌다

흘러갔냐고 묻는 다면, 신의 이름으로 용서를 청컨대 사정이 상당

히 복잡한데다가 비밀도 많아서 모조리 생략.”

“어떤 사건을 맡고 있는 지는 대강 들었습니다. 뭐, 저는 말단이라 제

대로 듣지는 못했지만.......어쨌건 중요하고 복잡한 일이라고는 하

더군요.”

브랫은 잠시 유릭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은 눈이 아주 차게 느껴진

다. 그리 잘 아는 사람도 아니니 저리 보든 말든 가슴 아프지는

않다.

“자그마치 2년이나 온갖 공을 들여 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 거라고.

특히나 나는 벌써 몇 년간 바닥에서 구르듯이, 그 수상과 니콜라스의

미친개이자 아침마다 구두 윤기가 나는 방향이 항상 똑같아야 안

심하는 놈 밑에서 이 짓을 해오는 거지. 신의 이름으로, 언젠가 그

놈이 엉덩이를 채이기를.”

유릭은 브랫을 동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그레이브인지 뭔지 하는

놈 밑에서라면 일주일도 있기 어려울 텐데 이 브랫 키저는 ‘임무’

라는 미명하에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 하며 그 옆에 있어온 것이다.

그것도 꽤나 가까운 위치에서. 유릭은 옷에 뭍은 흙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일이 이렇게 된 거니, 제 소개도 제대로 하지요. 유릭 크로반, 식민

특무부 하사입니다.”

“알아. 별명이 졸병이었다는 것도 들었지.”

“......중령님이 입이 좀 가벼우시지요.”

‘졸병’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하얀 까마귀 내란 미수 사건으로 일

병으로 강등되었을 때였다. 작대기 하나 그어진 군복 입고 나갔을

때, 다들 첫 인사가 ‘야, 졸병!’ 이었다(심지어 전날까지는 유릭의

부하였던 녀석들도 덩달아 그리 놀려댔다). 브랫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건..... 서로에 대해 잘 알든 모르든 간에, 내 정체도 알게 되었

으니 당분간은 암묵적으로 서로 도우며 일해야겠군.”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네가 알아낸 것 까지는, 저 박쥐 놈이 성에 쳐들어 왔을 때 나도 얼

렁뚱땅이나마 알아냈어. 어쨌건, 신이 정하시건데, 그건 내 일이자

숙업이니까.......그러니 너하고 당분간 같이 일해야지.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말이야.”

유릭은 잠시 서로 도웁시다, 하고 악수라도 해야 하나 생각했다. 브

랫이 손을 들었다.

“어쨌건 나는 이만 가 본다. 카밀턴 각하와 너의 계획은 중령님께 들

어서 잘 알고 있으니, 새로 알려줄 필요는 없어. 그 음악회 날, 신이

명하신 운명이려니 나도 그레이브 청장과 함께 나가기로 되어 있다.”

“역시 그 사람도 오는 겁니까.”

“어깨 너머로 들어 보니, 다 가더군. 랜든 장군 부부는 물론이고, 니

콜라스의 경우는 본인은 오지 않아도 그 부인만 출석한다나 뭐라나.

니콜라스 추기경이 금욕주의자라는 건 누구나 아는 바이니, 그가

그런 자리에 나가면 오히려 신기하지. 그 인간은 세상 모든 사람

들이 우중충한 옷을 입고 음울하게 앉아 있어야 구원된다고 믿는다

니까. 성경에는 그런 말 없는데 말이다.....하긴, 사제들이 하는 일

치고 성경에 적힌 게 몇 마디나 있겠나.......”

그리고 브랫 키저는 히죽 웃었다. 흰 얼굴이 달빛 속에 더욱 희게 보

였다.

“졸병, 너는 내가 범인인 줄 알았지?”

“좀 비슷했으니까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딘가는........ 비슷한 느낌

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라고 확신하기에는 모자란 것이 많아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졸병이 아니라 하, 사 입니다.”

갑자기 브랫 키저의 입술이 일자로 닫혔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 그

느글느글하던 얼굴이 확 굳은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그러나 어

색하게- 피식 웃으며 말한다.

“자네가 내가 범인이라 확신하고 뷰겐트 중령님께 보고했으면 일이

아주 재밌었겠군.”

“그 말을 꺼내는 즉시 두들겨 맞았겠지요.”

브랫 키저는 칼자루를 툭툭 치고는 등을 돌렸다.

“진짜 간다. 그리고 내가 부리는 놈 몇을 주변에 붙여 두었으니까, 걱

정 말고 편하게 뒹굴고 있어라. 네가 딸린다 싶으면 달려올 테니,

역시나 걱정 말고.”

“이렇게 나서서 얼굴을 드러내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 일단은, 그레이브 청장이 내게 이 저택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니까, 내가 여기서 얼쩡거린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어.

그리고......... 그 놈과 나는 사이가 좀 복잡하고도 애틋해서, 괜찮아.”

“당신의 설명이 꽤나 의심스럽다는 건 아십니까?”

“말 했지. 너하고 나는 서로 안 지 얼마 안 되고, 네가 나를 못 믿는

만큼이나 나 역시 너를 믿을 수 없어. 그러니 섣불리 비밀을 내 놓을

수는 없어. 정 의심쩍으면 중령님께 보고해. 중령님은 아마도 아

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그 때 불이 환하게 켜진 저택에서 하인들이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

다. 그 뒤로 잠옷 차림의 트레비스도 나오고 있었다. 카밀턴의 방

쪽을 보니, 카밀턴이 깨어진 창 너머로 유릭을 보고 있었다. 브랫

키저가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이 사건은 더 복잡하고, 나 역시 깊숙하고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 나와 나를 포함한 수사팀은 정말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오고 있고, 사소한 변수도 조심할 수밖에 없단 말이야.

게다가  옆에 카밀턴 경이 있고, 신도 아시고 너도 알다시피 그는

니콜라스와 돌비체의 뜨거운 짝사랑을 받는 요주의 인물이다. 감시

가 지나치게 많아. 그 많은 감시 중에 우리의 적이 포함되지 않으리

란 법도 없고, 만약에 우리와 카밀턴 경이 접촉하는 모습이 들키

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새겨듣겠습니다.”

브랫이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어쨌건 나는 간다. 나중에 음악회 날 보자.”

유릭은 총을 총집에 꽂아 넣었다. 저택의 집사가 엉망진창인 정원에

기겁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잠시 측은하게 보았다가

돌아보니, 브랫 키저는 이미 어둠에 녹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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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살피고 살펴도, 왜 오타가 튀어 오르는 건지 모르겠군요.

-_-a

p.s 출판본의 한커그는 팬커그의 오타입니다........

p.s2 다음편은........조만간...;;

p.s2 .......오타 수정;;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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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19장 달이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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