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70화 (70/174)

제70편

달이 노래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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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톨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더군요.

파난으로 돌아가게 되어 동료들이 제도 어땠냐, 촌놈! 하고 물으면

그렇게 말하게 될 것 같다. 파난에서 사는 십 여 년 동안 거의 보

지도 못한 ‘인종’을 이리도 많이 보게 되다니, 유릭은 놀라울 지경

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처음으로 허리 뻐근하게 압박하는 연회를 보

았을 때가 생각나, 씁쓸해지기도 했다.

흙바람이 부옇게 이는 황야와 검은 먼지 쌓인 탄광, 이지러진 도시밖

에 없는 파난에서는 존재유무조차 의심스럽던, 온갖 드레스와 보석과

정장으로 빼 입은 사람들이 어깨에 힘주며 2층 귀빈석으로 들어가

고 있었다. 그 아득하게 높아 보이는 사람들은, 현관의 로비에 있

는 카밀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카밀턴 경, 이제 부상당했던 몸은 괜찮습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 이리도 건강하답니다, 하논 경.”

“여전히 젊어 보이셔요, 장군님.”

“감사합니다, 마엘 부인.”

제복으로 좍 빼입고 훈장까지 다 찬 카밀턴은, 주최자이자 완벽한 서

부전선의 영웅의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게다가 트래

비스가, 카밀턴이 여기 저기 설치고 다니다가 넘어질까봐, 그 자리

에 꼼짝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그 자리에 줄곧

서 있는 중이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단정하고 당당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 전쟁 중이라면 카밀턴은 이렇게 밖으로 나돌아 다닐 수조

차 없다.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수습하여 승리한 후에, 아들형제들을

서부전선으로 보낸 국민들이 지금 의지하는 것은 오로지 카밀턴 장

군 한명뿐이었으니 접전 중에 그가 부상당해 쉬고 있다면 당장에 난

리가 날 것이다. 그가 부상당한 직후에, 그 소식이 본국으로 들어

가지 못하도록 보도통제에 들어갔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

스럽게도 서부전선은 지금 교착상태다. 카밀턴 경에 의해 어마어마

한 타격을 받은 바리암은 숨죽인 듯 있고, 그 타격을 수습하며 흐

트러진 클랜 간의 결속을 당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니, 당분

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오기는 올까요?”

귀부인 하나가 카밀턴에게 눈웃음을 치다가 눈 부라리는 남편 손에

끌려 들어가자, 유릭이 카밀턴에게 그리 물었다.

“그 정도 망신을 당하고도 안 나타날 리가.”

사실이 그랬다. 타블로이드는 물론이요 일간신문까지 모조리 그 ‘괴

도가 망신당하다.’ 라는 사실에만 집중하여 거의 전투에 가까울 정

도로 추측보도를 하는 중이었다. 과열보도경쟁이 붙으면 늘 그러하

듯 진실과는 멀어지게 되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보는 사람들도

열광하게 된다. 열광하면 열광할수록 더욱 팔리니, 신문들은 더욱 ‘

상상력’을 쥐어짜게 된다. 그리하여 사흘이 지나자, 괴도의 명예는

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태의 원조인 카밀턴은 거 보라며 웃었고,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

이던 유릭은 사태가 오히려 박쥐 녀석이 불쌍하게 돌아가자 미안해

지기 시작했다.

“장담하는데, 나라면 그냥 안 죽여.”

매일 매일 신문을 보던 트레비스도 한숨을 내 쉬며 그리 의견을 표했

다. 그래도 유릭은 자기목숨까지 걸며 상대를 ‘놀려 대는’ 대담함에는

존경을 표하기로 했다.

카밀턴이 막 그에게 토요일 저녁에 시간 있나요, 하고 속닥거리다가

그 남편에게 끌려간 귀부인에게 즐거운 시간 보내라며 인사하고 있

는데 무대 준비를 확인하러 내려갔던 트레비스가 돌아왔다.

“잘 하고 있나, 헤리?”

“나야 새신랑처럼 잘 하고 있지.”

트레비스는 유릭에게 팜플렛을 전해주고, 카밀턴에게는 아무것도 주

지 않고 그 옆에 섰다.

“그렇다면 나는 새색시처럼 도와주도록 하지. 바람둥이의 새색시라

불안하기는 하지만.”

“첫날밤 되기도 전에 이혼하겠군. 아아, 그래도 식장에서 파혼당하는

것 보다는 나을 거야.”

트레비스와 카밀턴이 서로의 멱살을 나누어 잡고 흔드는 동안 유릭은

팜플렛을 펼쳐보았다. 에닌 마델로의 이름은 당연히 올라와 있었다.

그렇잖아도 방금 전에 살비에 마델로가 그의 부인과 함께 카밀턴

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딸이 출연하는 음악회라

상당한 기금을 수표로 냈다. 정말 도움이 될만한 액수라, 카밀턴도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주는 수표라도 액면가는 그대로니까.”하고

웃으며 말했다. 로웨나의 이름은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코러

스 중 하나로, 다행히 누구누구 외, 하고 적히는 대신 작게나마 이름

이 나왔다. 이런 초라한 자리가 맡겨졌을 때, 로웨나는 아마도 꽤

나 실망했을 것이다. 대역이지만 주역을 한번 했는데 이런 뒷자리라

니. 그 풀죽은 모습이 상상이 되다 못해 생생하다. 유릭은 팜플렛

을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트레비스에게 물었다.

“트레비스 씨, 로이가 잘 하기는 잘 하는 겁니까?”

“로이? 아, 로웨나 그린 양 말이군. 말 했잖아. 잘 한다고. 오페라 가

수는 음악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우이기도 하고, 자질과 기질이

모두 필요해. 에닌 마델로는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누가 들어도 듣기 좋지. 하지만.... 배우로서의 자질은 부족해. 아

니, 하려하지를 않아. 결정적으로 터프해져야 할 때 얌전하게 몸

을 사린다고나 할까. 하지만 로웨나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지.

고음을 내는 데도 탁월하고, 그 성량과 감성도 풍부한데다가, 본인

도 열심히 노력해. 그리고 그녀에게 있는 무엇보다 탁월한 자질은...

배우로서의 자질이네. 그 아이는 관객들에게 어떤 모습을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목소리를 내고 어떻게 강약을 조절해야 자신이 맡은

역이 가장 현실감 넘치게 표현되는 지 아는 아이야. 좀더 깊이 있

고 복잡한 성격의 캐릭터가 나오는 오페라가 나온다면, 그 아이는

아마도 그 누구보다 빛날 거야. 지금이야 뭐 밤낮 고음만 목청 찢어

지게 부르는 진부하고 지겨운 오페라밖에 없고, 이것만 걸어 놓으

라고 그놈의 살비에가 호들갑을 떨어대니 그 아이를 제대로 써 먹을

만한 오페라를 걸어 놓을 수가 없지. 젠장! 신선한 작품 좀 올려

보겠다고 기획안을 가지고 가면, 그건 안 된다, 고집피우면 검열

관에게 말하겠다느니 뭐라느니.”

카밀턴이 끼어들었다.

“그러게 지분을 빼앗기게 놔 둔 게 문제였다니까.”

“아구스가 그렇게 얼뜨기같이 지분을 날려 먹을 줄 내가 알았겠으며,

로베테의 아들이 군에서 나온 놈이 주먹 좀 흔든다고 겁에 질려서

지분을 홀랑 넘겨 버릴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젠장.”

“그래도 신문에서는 이번에 공연한 신작 오페라를 칭찬하고 있고, 에

닌이야 말로 신이 내린 음악의 천사라고 칭송하지 않는가.”

“아하, 그렇지.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갈 거라고 보나. 겉으로는 그러는

척 하고, 뒤로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게 사람들인 법이야. 게다가

1년. 1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고 똑같은 짓에, 똑같은 배우에,

똑같은 내용에, 비슷비슷한 노래들. 사람들은 이제 슬슬 질리고 있어.

괜히 교양 없는 사람으로 몰릴까, 살비에 패거리에게 혼날까 해

서 입조심하고는 있지만, 어느 주책 맞고 용기 있는 사람이 형편없다,

하고 솔직하게 외친다면 당장에 모조리 적이 되어 버릴 거야.

하여간, 오페라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오로지 자기 딸 띄울 궁리만

하는 살비에 마델로가 이런 걸 알기나 할까. 아니지, 모를 거야. 그

사람이 음악에 대해 아는 게 대체 뭐가 있어?”

트레비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카밀턴이 그의 옆구리를 푹 찔

렀다. 남의 눈치는 어차피 눈치 주는 당사자만의 일이라고 여기는

그가, 트레비스에게 다른 사람 듣겠다고 눈치준 것은 절대 아니었다.

트레비스와 유릭이 그를 바라보자, 카밀턴은 턱으로 현관을

가리켰다. 그 쪽을 본 트레비스의 얼굴이 당장에 활짝 펴졌다. 막

도착한 사람이 반가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완벽한 ‘접대용’ 미소

였을 뿐이다.

현관에 멈춘 마차에서 윌리엄 렌든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카밀턴과

트레비스를 등진 채, 마차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흰

장갑을 낀 손이 나와 그 손을 잡았다.

렌든은 부드럽게(놀랍게도 정말 부드럽고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아끌었다. 마차 안에서 날씬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내

렸다. 늑대처럼 생긴 렌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말 예쁜 비

둘기처럼 곱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사슴처럼 곱

고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눈썹이 우아하게 뻗은 이마는

도자기마냥 청아해 보이고, 뺨도 희고 고와 거품으로 빚어낸 듯

아름다웠다.

카밀턴이 작게 말했다.

“저 귀부인이 바로 렌든 놈 마누라라네, 하사.”

렌든은 고개를 숙여 아내의 귀에 다정한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부인

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고, 볼까지 살짝 붉혔다.

“으엑.”

카밀턴이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유릭은 멍하니 그런 카밀턴을 바

라보았다.

“정말 부인입니까?”

“무슨 생각하는 지 알만하군. 정말 눈물나게 아까운 미인이잖아. 저

놈은 사건 때문에 마그레노로 내려갔다가 사건 해결을 한 게 아니라

여자만 꼬셔 왔다니까. 젠장, 이건 직무유기라고.”

“자네가 내려갔으면 자네가 꼬셨겠지.”

“나를 파렴치한으로 몰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나

는 프리델라를 사랑한다네.”

“바람나서 이혼당한 놈이 무슨......흡!”

카밀턴은 지긋이 트레비스의 발을 밟았다.

렌든 부부가 팔짱을 끼고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렌든은 부인을 애정

을 듬뿍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손등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지난번에 카밀턴과 험악하게 주고받고 결국에는 카밀턴을 사문회에

끌려가도록 만든 천하의 비열한이 아닌, 너무나 다정하고 자상한

남편의 모습, 늑대 렌든이 아닌 행복한 강아지 렌든 같은 모습이다.

“어서 오게나, 나의 친구 렌든.”

렌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빛이 벼락 치듯 번득였다. 유릭은 드

디어 한바탕 하려나, 하고 생각는데 놀랍게도 렌든은 표정을 금세

바꾸더니 아주 환하게 웃었다.

“초대해 주어서 고맙네, 헨리. 아내도 이런 뜻 깊은 자리를 만든 자네

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라 말했다네.”

“정말인가? 정말 영광입니다, 렌든 부인. 정숙하고 자애로우며 현명하

기로 이름 높은 부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누구의 칭찬보다 저를

기쁘게 하는 군요.”

카밀턴은 빙그레 웃고는 렌든 부인의 손을 잡아 올려 그 손등에 키스

했다. 어머나, 하며 렌든 부인은 수줍은 듯 손을 움츠렸다. 다시 렌

든의 눈이 번쩍였지만, 미소 짓는 얼굴만은 그대로였다. 렌든 부인

이 말했다.

“많은 기금이 모여 전사한 분들의 가족과 부상으로 어려우신 분들에

게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부인 같은 분들이 많으니, 다 잘 될 겁니다. 부인을 뵐 때마다, 저는

부인 같은 분이 세상에 계신다는 것 자체에 하늘에 감사를 드립

니다.”

“과찬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아무리 이이와 친구사이라지만, 너무 그

러시면 오히려 죄송해요.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아아, 아닙니다. 부인께서 주말마다 빈민촌과 고아원, 병원, 심지어

감옥에까지 봉사를 나가신다는 것은 이 카스톨 전체가 아는 바입

니다. 제 옛 부관은 부인이야 말로 이 혼란한 시대의 빛 같은 성녀

라 말했지요.”

‘성녀’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에 트레비스의 얼굴이 당장에 침울해

졌다. 그 약혼녀의 장래희망이 트레비스 카트슨의 부인에서 ‘성녀’로

바뀐 것이 결혼식 당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카밀턴이

그런 트레비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고, 트레비스는 카밀턴을 먹어

치워 버릴 듯 노려보았다.

내심 불안해하고 불편해 하던 렌든이 헛기침을 크게 하고는 말했다.

“여보, 이만 가지. 공연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헨리 이 친구도 들어

가야 하는데 너무 오래 잡고 있는 건 실례요.”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정말 죄송합니다.”

렌든 부인은 정말 미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유릭은 렌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예쁜 아내를 둔 남자

라면 누구라도 카밀턴을 경계할 것이다. 잘생기고 만인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능력 있고 말 잘하며 매너 좋은 독신남(자신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더라도)을 마다할 여자는 별로 없으니.

“어서 갑시다.”

렌든이 팔을 내밀자 그 아내는 그와 팔짱을 끼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

다. 렌든은 부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더니

카밀턴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자신의 보금자리로 들어온 수컷을

발견한 어느 가장 늑대를 연상케 하는 살벌한 모습에, 유릭은 머쓱

하게 고개를 돌리고 트레비스는 침을 꿀꺽 삼켰지만 카밀턴은 가운

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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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박규는 만차원 공통어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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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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