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편
달이 노래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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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지. 그놈이 오기도 전에 저놈이 자네를 죽일 거야.”
“저놈이 오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어. 바보니까.”
“협공하면 곤란할 겁니다.”
“....”
유릭은 다른 사람이 더 올까, 해서 현관을 살폈다. 현관 밖에는 깡마
른 소녀가 꽃을 팔고 있었다. 열 서 너 살쯤 되었을까, 빛바랜 치
마를 입은 소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유릭을 보며 빨간 장미꽃을 내
밀었다. 잠자코 그 꽃을 바라보던 유릭은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밀턴이 말했다.
“어디 가나, 하사. 지금 들어가야 하는데.”
“잠깐 나왔다 돌아오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그 동안에 그놈이 오면 어쩌려고?”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카밀턴은 별로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다. 대수롭잖다는 듯 다녀오라
말하고 극장 안쪽으로 향했다.
유릭은 현관을 나서, 그 소녀에게 달려갔다. 소녀가 얼른 꽃을 내밀
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기쁨 보다는 간절함에 가까웠다.
“꼬, 꽃 사세요.”
“얼마지?”
“한 송이에 10피야요.”
지난번에 카밀턴으로부터 받은 보너스(인지 도박에서 이긴 것에 대한
포상금인지 모르겠지만) 10카스티야가 있기에, 유릭은 주머니에서
대강 접은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소녀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거, 거스름돈 없어요.”
“한 송이 말고 다발로 달라고.”
소녀는 멍하니 그 지폐를 바라보았다. 유릭은 지폐를 흔들었다.
“한 송이로는 절대 만족 못하는 고양이 여왕님께 드릴 거거든.”
소녀는 배시시 웃더니 꽃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무 송
이를 채운 뒤에, 한 송이를 더 끼워 넣어, 흰 종이로 싸서 수줍게
웃으며 유릭에게 내밀었다. 유릭은 꽃다발을 받아 들고 극장으로
돌아왔다.
“여어.”
막 극장 현관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돌아보니
현관 옆에 키 큰 남자 한명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유릭은
뒤로 묶은 회색머리를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 지 알아보았다.
“여어, 백작님.”
“‘여어’가 뭔가. 자네 나이 두 배는 먹은 사람에게.”
“저도 여어- 하고 불릴 정도로 깜찍한 나이는 아닌데요.”
“자네는 언제나 예의바르게 괘씸하군.”
그러며 알렉산더가 웃었다. 지금 백작의 복장은 참 특이했다. 한 손
에는 값싼 담배가 들려 있고, 다른 손은 나른하게 바지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바지나 셔츠는 분명 고급이었지만, 상의도 걸치지 않
고 스카프도 넥타이도 없어 얼핏 본다면 극장 사무원 같아 보인다.
“초대받으셨으면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아, 좀 있다가 들어갈 생각이야.”
“가면은 벗은 채로 들어가실 겁니까?”
그렇게 말하곤 유릭은 볼을 툭툭 쳐 보였다. 지금 백작은 맨 얼굴이
었고, 그 때문에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그 누구도 백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머쓱하게 웃으며 턱을 문질렀을 뿐이다. 그리고 그리 늦
지 않은 밤, 아직 초저녁의 어스름이 남아 있을 때 보는 그의 얼굴은
지난번과는 달리 ‘인간’으로 보였다.
얼굴은 여전히 관속 흡혈귀처럼 창백했지만, 웃음이라든가 눈매라든
가 하는 곳에 인간적인-즉 실체감과 생명을 가진듯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이제는 다 나았어. 적도의 뜨끈한 열기가 쏟아지지 않는 한, 어디로
다녀도 내 얼굴은 멀쩡할 걸.”
“무슨 병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아아, 지하에서 얻은 병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지하로 가면서 얻은
병이랄까.”
그러나 알렉산더의 얼굴, 그 희고 창백한 피부 어디를 봐도 병의 흔
적은 찾을 수 없었다. 흉터도, 상흔도 없다. 유릭은 꽃다발을 들어
어깨를 가볍게 쳤다. 꺼낼 말이 없어지자 알렉산더는 나른히 담배를
빨아 들였다. 갈색의 담배는 노동자들이나 피는 값싼 물건이었고,
식민지에서도 자주 보는 물건이었다. 그는 담뱃재를 가볍게 떨어
뜨리며 말했다.
“어둠을 본 적이 있나.”
“네?”
“밤? 절망? 아니면- 이런, 촌스러울 정도로 진부하군. 그래,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밝은 낮에도, 아름다운 숲 속에서도, 푸르른 남해의
바다에서도, 활기찬 파티 장에서도, 아름다운 여인들의 미소 속
에서도.... 언제나 구석진 곳에서 자리를 틀고 자네를 보는, 그런 어둠.”
“밝은 것들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모든
것을 집어삼켜 제 팔과 다리를 붙들어 땅 바닥에 처박아 버리려는
그런 어둠. 웃음과 즐거움과 아름다움 옆에 언제나 들러붙어서는
고요하고 음산하게 웃고 있는 그런 어둠......말씀입니까.”
알렉산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릭이 물었다.
“보십니까, 그런 것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보고 있다네. 그리도 오만과 확신에
찬 세상이었건만, 그 어둠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자 어떤 것도
견고하지도 확실하지도 않게 되어 버렸지. 그것의 힘은 너무나도
강하고, 내 힘으로 어쩔 수도 없고, 또 알고 있다 할지라도 언제 어
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기에 손 쓸 수도 없지......자네도 그런 것을
느끼고 보나?”
“언제나. 갚지 못한 빚처럼, 치르지 못한 죄의 값처럼, 그렇게 제 옆
에 도사리고 있지요. 언젠가는 그것이 실체를 드러내 제 목을 조일
거라는 것을 알지만, 저로서는 그것을 어찌할 수 없지요.”
그리고 유릭은 꽃다발을 휘둘렀다. 붉은 장미꽃이 눈앞을 휘저었다.
향기가 아련하게 풍겨오고, 그 달콤함에 기분이 희미하게 좋아진다.
그러나 단지 그 뿐. 찰나다, 정말 허무한 찰나. 이 꽃은 시들 것이
고 향기는 사라지며 검고 차가운 현실이 미소 지으며 다가올 것이다.
그의 동료들, 프리델라 정도 되는 연륜과 경험과 힘을 가진 사람도
그 어둠에 붙들려 산다. 언제나 자신을 따라다니며 삼키려 하는 어
둠을, 그가 약해지면 당장에 그를 씹어 삼키려 하는 그런 어둠을.
그러나 버릴 수 없다. 그들은 유릭을 완전히 삼키기 전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유릭의 팔 다리 심장과 폐처럼 그의
일부이기도 했으니 떼어 버릴 수조차 없다. 그 공포 속에서, 그것
을 잊기 위해 다른 것에 몰두하고 집중하고 스스로를 내 던지며 살
수 밖에. 찰나의 기쁨일 지라도, 그 찰나는 저문 해가 남긴 노을처럼,
시들 날 얼마 안 남은 장미처럼 아름다워 그 공포를 잊게 해 준다......
“백작, 당신도 흑마법사이십니까?”
“아니.”
그의 답은 참으로 명료했다.
“그렇다면 그런 건 왜 묻는 겁니까.”
“비슷한 어둠이 나를 붙들어 맨 적이 있었거든. 절망마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이 유일한 구원인 그런 어둠 속에서 늙은 식물처럼 살아
갔던 적이 있었지.....”
방황-이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그는. 돌아왔을 때 아무 것도 남
지 않은 그런 한 때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도망치셨군요.”
“그래. 그리고 그 덕에 기회 한번을 더 얻었건만, 내 영혼은 아직도
그 어둠에 붙들려 있지. 아직도 그 어둠은 내 언저리에 머물고 있고,
몇 년이 지났건만 나는 몇 발자국 벗어나지도 못한 듯 해. 바로
어제인 듯, 바로 조금 전 인 듯, 아니 지금이 꿈인 듯 허망하게 느
껴질 정도로 그 절망은 내 옆에 있지. 언제나..... 그래, 마치 겁탈
당한 여인처럼 말이야.”
마지막 말에 어이가 없어서 유릭은 웃었다. 백작은 절반 이상 타 버
린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껐다.
“그 꽃 나 줄 것 아니면 어서 갖다 주게. 나도 곧 들어가야 할 것 같
으니.”
“아.”
그제야 유릭은 꽃다발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양이 여왕님
이 뭐라 투덜댈 지는 뻔하지만(‘왜 이런 데 쓸데없이 돈을 쓰고 그
러니? 이럴 돈 있으면 저축이나 하라고.’) 그 자존심 강한 아이는, 옆
에 아무도 없으면 박수를 짝짝 치며 좋아할 것이다.
들어가려는데, 극장 안쪽에서 여자 한명이 달려 나왔다. 짙은 청색
드레스를 입은, 방금 전에 헤어진 렌든 부인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나와, 방금 전에 유릭에게 꽃을 판 소녀에게 다가가 꽃
몇 송이를 주문하고 꽃값보다 훨씬 더 큰 돈을 건네주었다. 소녀는
두 손을 저었지만 렌든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소녀의 손에 돈을 꼭
쥐어 주고는 돌아섰다. 현관 옆의 유릭을 보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나, 방금 전에 뵌 젊은 장교님이시군요.”
“또 뵙는 군요. 정말 영광인데요.”
“꽃을 사셨네요. 드릴 아가씨라도 있는 건가요?”
“드린 다기 보다는 바칠 아가씨랍니다.”
“어머나. 참 좋을 때네요.”
렌든 부인은 볼에 홍조를 띄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옆의 알렉산
더를 보고는 누구냐, 묻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제야 유릭은 그
녀가 이 알렉산더의 원래 얼굴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막 소개를 해 주기도 전에 현관 쪽에서 렌든이 나타났다.
“여보, 어서 와요. 곧 시작할 거야.”
렌든 부인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미안해요. 곧 갈게요.”
“꽃 정도는 안 사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 해. 어서 와요, 아자렛.”
치익- 옆에서 담배 한대를 더 태우기 위해 성냥 긋는 소리가 들렸
다. 렌든 부인은 실례를 구하고 남편인 렌든에게 달려갔다. 담배
연기 냄새가 확 풍겨 와서 고개를 돌리니, 알렉산더는 곧 들어간다
고 해 놓고서는 또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백작.”
“알렉이라고 불러, 이제는.......그래, 이제는 알렉이지. 어서 들어가,
유리. 나는 좀 더 있다가 들어가야겠군.”
유릭은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기
묘한 느낌이었다. 실체를 알 수 없지만, 가슴 언저리를 휙하니 스
치고 지나가는 유령의 옷자락 같은 그런 느낌이다.....
유리라......이 사람이 대체 언제부터 친한 사람들끼리만 부르는 애칭
으로 나를 불렀었던가. 생각해 보니, 이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너
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잘 안다는 듯이 그를 ‘유리’라고 불러 왔었다.
그리고 유릭 자신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물었다.
“유리, 마그레노에 가 본 적이 있나?”
“몇 번 가 봤습니다. 백부님을 뵈러......”
“그렇다면 가장 유명한 이야기 하나를 알겠군. 기다리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백부님께서 그 곶에 올라갔을 때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그래, 먼 옛날이야기지. 은갑옷의 기사 델판과 소녀 아자렛의 이야
기........그 끝도 알고 있나?”
“해피 엔딩이었지요.”
알렉산더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연기가 그 볼 언저리에서
부옇게 흩어진다.
“그래, 다행히도 해피 엔딩이지..... 어쨌든 어서 들어가, 유리. 이러다
가 끝날 때쯤에 쑥스럽게 들어가겠어.”
“나중에 뵙지요.”
유릭은 현관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보
니, 백작은 담배를 문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분명 나이
많은 남자라 말했건만, 그 눈빛만은 지치고 고된 청년 같아 보인다.
유릭은 고개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밤이었다, 여러 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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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그녀의 이름이 기억 안 나면 처음부터 복습! 에이, 실망!
.........한 2-3주 쉴 예정입니다. 적어도 추석 전에, 아주 늦으면
10윌에 돌아올 것 같군요.
겨울키 수정작업도 해야 하고, 또.........특별히 말씀 드릴 건 없
군요;;; 아하하하;;;
분노하고 있을 때는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말라더군요. 감정적인 상태
에서는 오판을 하기 쉽기 때문이죠. 저 역시, 어제 이 글을 올렸다면
꽤나 감정적인 말을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루 느긋하게
정리하다 보니....... 그럴 것 까지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살 책은 산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썩
잘팔리는 작가는 아니고, 그리 된다면 제가 쓴 것이 '살 가치도 없'
다고 판단한 분이 꽤 많다는 뜻이 되겠군요. 긴 말은 하지 않겠습
니니다. 하지만......... 제가 그 동안 성실하게 해 왔던 일들에
대해 허무함과 좌절을 느끼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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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