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72화 (72/174)

제72편

달이 노래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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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쓸데없는 데 돈 쓰고 그러니? 이럴 돈 있으면 저축이나

하라고. 한 푼이라도 아껴야 미래가 요만큼이라도 밝아질 거다.”

로웨나는 유릭이 꽃을 내밀자 그렇게 투덜댔다. 에닌이 오히려 더 당

황해서 그렇게 말 하면 어떻게 하니, 하며 충고한다. 로웨나는 꽃 한

송이를 뽑아 이리 저리 살펴보더니, 분장실에 놓인 가위로 줄기를

반으로 석둑 잘랐다. 에닌이 놀라서 그러면 어쩌니, 하고 작게 말

하며 유릭의 눈치를 살폈다.

로웨나는 장미 가시를 가위 날로 박박 긁어낸 후에, 붉은 머리를 묶

은 노란 리본무더기 안에 꽂았다. 그리고 그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코러스들에 파 묻혀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이 꽃으로 찾아. 알겠

지? 눈 마주치면 손을 흔들어 주도록.”

답다, 하고 유릭은 생각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어차피 귀빈석이지? 내가 너를 똑바로 보고 있을 테니까, 보지도 않

아놓구선 거짓말 하지도 마. 알겠지?”“알았어. 그리고.......역할이 그

래도 어쨌건 잘 해. 네 목소리가 들릴지는 모르지만.....”

“걱정 마. 아르사메 여사 말을 빌리면 내 목소리는 ‘주변과 전혀 조화

를 이루지 못하는 거칠고 투박한, 가수로서의 미래를 도저히 기대해

볼 수 없는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는 목소리’니까 금방 알아 들을

수 있을 거야.”

아르사메, 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에 모든 단원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누군가는 하늘을 보고 누군가는 바닥을 보고, 그러며 일제히

이를 뿌득 물었다.

“굉장한 반응이군.”

“여러 모로 굉장한 분이니까.”

로웨나는 손을 흔들었다.

“어쨌든 구경 잘 하고, 일도 잘 해.”

유릭은 웃으며, 경례하듯 손을 이마에 대 보이고는 대기실을 나갔다.

그리고 유릭이 나가자마자, 동료 단원들이 로웨나에게 우르르 모여

들었다.

“지난번에 그 애지, 맞지?”

“맞아! 저 얼굴은 특이해서 절대 못 잊겠는 걸. 그런데 로이, 이제 둘

이 본격적으로 사귀는 거야?”

“멋지다, 그럼 상류층 출신의 애인인 거잖아!”

“축하해, 정말! 나도 귀족 남자하고 사귀어 보고 싶어! 그런데 로이,

저 사람도 매일 매일 마차로 데리러 오고, 장미 손수건이랑 온갖

보석들을 선물로 주니?”

“그건 골빈 발레리나 계집애들의 멍청한 한량 애인들이나 하는 짓이

지. 저 애는 카밀턴 경의 친척인, 진짜 중의 진짜 라고.”

그리고 다들 까르르 웃었다. 다들 그렇게 속살같이 떠들어 댔지만,

로웨나는 저 놈은 카밀턴과 약간의 친인척관계도 없고, 유형수의

아들이라는 매우 불량한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답하고 싶은 것

을 간신히 참았다. 애인 비슷하기라도 한 관계라면 기분이라도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오히려 언짢다.

그래도 꽃을 받으니, 싱숭생숭 가슴이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 집을

나간 다음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도 물어 보고 싶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말머리도 못 꺼냈다. 나중에 물어 볼까,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을까. 아아, 트레비스 씨에게 물어 보면 되겠구나.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공연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직원이 알려왔

다. 단원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각자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무대로 향했다.

“로웨나, 너도 그만 넋 놓고 어서 오라고. 새 남자친구에게 헐레벌떡

달려와 헥헥 대는 모습을 보일 생각은 아니겠지?”

수잔나가 말은 그리 해도 로웨나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녀도 축

하해 주는 것이다. 코러스를 맡은 단원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대기

실에 혼자 남게 된 로웨나는 붉은 장미다발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

중 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돈 아깝게 왜 사왔냐고 투덜댔어도, 그

래도 기분은 너무 좋았다. 대 놓고 좋아하기가 자존심 상해서 그렇게

새침 떤 것뿐이다.

극장 앞에서 사온 것이라 리본도 없이 싸구려 흰 종이로 싸 놓은 초

라한 물건이었지만, 로웨나로서는 처음으로 받아 보는 꽃다발이다.

지금 그녀에게는 10년 뒤에 받을 천 송이의 장미보다 더욱 예뻐

보였다.

“그만 헤헤 거리고 어서 오라고, 로이!”

밖에서 수잔나가 외치자, 로웨나는 장미를 놓고 일어났다. 어차피 노

래 부르는 인기 가수들 뒤에서 장단이나 맞추는 역할이지만, 월급

타는 처지이니 하라는 대로 해야지 뭐...... 그러나, 그렇게 걸어가다

로웨나는 멈칫 얼어붙었다.

“그 표정, 참 귀엽군. 고양이 아가씨.”

대기실 문 옆에, 검은 옷의 남자가 서 있었다. 후드가 그의 코끝까지

덮고 있었다. 로웨나가 뒤로 주춤 물러나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이마에 손을 댔다.

“아가씨가 해 줄 일이 있어서. 아, 부탁할 생각인데....... 거절하지는

말아줬으면 해.”

유릭이 돌아오니, 카밀턴은 심드렁하게 앉아있고 트레비스는 멍하니

무대를 보고 있었다. 주변을 감도는 침울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

바탕 굉장한 일이 터졌었던 것 같다.

“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나요?”

카밀턴은 우울하게 유릭을 보았다. 트레비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정말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일이 터졌었던 것

같아, 유릭은 뒤퉁수가 근질근질 할 정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카밀턴이 힘없이 유릭의 등을 가리켰고, 그 순간 그대로 자빠트리려는

듯 엄청난 한방이 등을 후려쳤다. 퍼어억!

“야아, 오랜만이다, 너!”

“.....”

유릭은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카밀턴과 트레비스가 정말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유릭의 뒤를 보고 있었으며, 유릭은 그 눈빛만 봐도

우울해졌다.

“정말 반갑다, 유릭 크로반!”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힘을 다해 돌아보니, 줄리안 시저 반 가스

코, 이제 이름조차 진절머리 나는 그 소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옆에서 카밀턴이 신음을 끄응 흘리며 말했다.

“헨리에타가.......보냈다는 군.”

유릭은 트레비스를 보았다. 트레비스는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저

었다.

“카밀턴 경을 보호라라는 임무를 가지고 왔다는 군. 서로 잘 협조해

보게나.”

유릭은 쥴리안을 보았다.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뛰어왔는지 세일러

칼라 팔랑이는 발랄한 교복 차림이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빛내며 외쳤다.

“엄마가 보냈어! 오늘 삼촌이 위험하다며? 내가 삼촌을 지킬 거야!”

“수고해.”

이런 저런 이유로 너에게는 힘들다, 라는 당연한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카밀턴처럼 쥴리안과 친인척 관계라도 있다면 모를까, 유릭

으로서는 그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선도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역시나 쥴리안은 어깨를 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동안 많이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삼촌을 그 나쁜 놈들로부터 지

켜드릴 수 있을까, 해서.”

“공연 시작한다.”

유릭이 무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쥴리안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노래 같은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아무리 미소녀 가수

에닌 마델로가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할 일, 제국의 정

의를 구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유릭이 무성의하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카밀턴 경. 제국의 정의셨군요.”

“나도 방금 알았네.”

전혀 상황 파악 못하는 쥴리언은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어쨌건 내 말 잘 들어, 유릭. 범인이 어디서 삼촌을 암살하려 할 지,

내가 이 극장의 구조를 연구해서 알아내 왔어.”

“결정 되었으면 가르쳐 줘. 어쨌건 그 쪽은 안 지킬 테니까”

“이봐, 유리 크로반! 그게 말이 돼? 아무리 나를 믿는다 해도, 나한테

만 그런 일을 맡기면 어쩌려고 그래?”

그야, 네가 말하는 곳으로는 절대 안 올 테니까, 하고 말하려 했지만,

카밀턴이 유릭을 쿡쿡 찔렀고 그것을 ‘그냥 장단 맞춰줘’ 쯤으로

알아들은 유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객석의 불이 꺼졌다. 천장에서 쏘아진 조명 두 어 개가 무대

로 몰리자, 그곳에는 사회를 맡은 남자가 근사하게 정장을 빼 입고

서 있었다. 그가 이 음악회가 어째서 열렸는지를 설명하고, 간단

한 인사치례를 했다. 유릭은 별로 듣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쥴리안

이 내내 어디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그 범인을 공격할지 온갖 헛

소리를 다 하고 있고, 앞의 사회자의 말소리와 옆의 잡소리가 어우

러져 완전히 ‘잡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유릭은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다. 트레비스와 카밀턴은 벌써 귀를 막고 있었다.

사회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물러났다. 막이 올라가자

일제히 박수가 터졌다. 사람들이 흥분하고 열광하는 것이 느껴진다.

피아노 한대와 고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가수 두 명이 나타나

허리를 숙였다.

첫 곡, ‘로잘린’을 부를 가수들이었다. 그 중 한명은 에닌 마델로였다.

카밀턴이 넌지시 말했다.

“이상하군. 어째서 최고 스타가 제일 먼저 나오는 건가?”

“살비에가 그렇게 하래. 안 그러면 후원금 안 낼 거라는 군.”

“미쳤군.”

“그래도 돈은 듬뿍 내고 갔잖아.”

유릭은 합창을 맡은 소녀들을 살폈다. 똑같은 옷에 머리스타일들도

똑같이 하고 있어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로웨나는 머리에

장미를 꽂고 있을 거라 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의 표정이 묘했다. 유릭과도 약간의 안면이 있는 그녀들은

처음에는 음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다가, 조금 지나자 주변을 살피

기 시작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초조하게 속삭이기 도 했고,

고개를 젓거나 난처한 얼굴로 무대의 문을 살폈다.

유릭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대체 무엇이? 유릭은

로웨나라면 눈빛이나 표정으로라도 알려 줄 거라 생각해서 다시 로

웨나를 찾았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드디어 깨달았다.

아무리 살펴도, 붉은 장미를 꽂은 로웨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대의

입구를 보아도 그 곳에서 누가 나오는 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 와

중에 음악이 시작되었다. 합창단의 한명일 뿐인 여가수가 있든 없든

동료들을 제하고는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옆에서는 쥴리안이 열심히 떠들고 있었고, 피곤하다는 듯 카밀턴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같은 것을 발견한 트레비스의 얼굴이 창

백해졌다.

“로웨나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칼이 날아왔다. 유릭은 이를 꽉 물었다

떼며 말했다.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유릭은 돌아섰다. 트레비스가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고 그 순간에, 극장의 모든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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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3주만에 꽃을 주다니, 유릭;;;

다 시들었을 거야........(중얼중얼)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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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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