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73화 (73/174)

제73편

달이 노래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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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총을 뽑았다. 아무 느낌도 없는, 숨죽인 정적이 그 순간을 삼

킨 듯이 장악했다. 모두가 놀라 숨죽인 가운데, 쥴리안마저 무슨

일이냐, 내가 잡겠다, 어쩌고 떠들어 대지 않고 조용히 입 닥치고

있었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계속 떠들었다간, 어둠을 틈타 그 턱

을 갈겨 버렸을 테니.

유릭은 자신의 심장소리와 숨소리를 가까이 다가온 남의 것 인양 느

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 고립된 자가 늘 그러하듯, 모든 것이 적

이고 모든 것이 자신이었다. 순간, 목덜미 쪽으로 바깥바람이 불어왔다.

유릭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그리고 셋, 하는 순간

에 총구를 돌렸다. 총구에서 흰 문자가 드리워졌다가는 사라졌다.

푸른빛이 스치듯 떠올랐다.

순간, 불이 확 켜졌다.

엄청난 빛이 쏟아지고, 부신 눈을 잠깐 감는 순간에 바깥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 닥쳤다. 유릭은 총구를 밀어 붙이며 바람이 불어온 곳

으로 꽂아 넣었다. 총구가 누군가의 이마에 닿고,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객석의 사람들이 술렁였다. 특히나 1층의 관객들은 놀

란 짐승들처럼 당황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2층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유릭은 드디어 빛에 익숙해진 눈으로, 깨어난 듯 술

렁이는 객석을 등지고, 그 총구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로웨나?”

놀랍게도 그건 로웨나였다. 종이처럼 하얀 얼굴에 눈을 크게 뜨고 총

을 바라보며, 한 손에는 은색 나비가 그려진 검은 봉투를 들고 있

었다.

“유, 유리. 이, 이것 좀 치워 줄래? 조, 좀 무섭다.”

“어떻게 된 거야?”

총을 내리자 로웨나는 기절할 듯 비틀 거렸다. 유릭이 부축해 주려

했지만 로웨나는 손을 휘휘저은 다음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그런데 로웨나가 더욱 창백해지더니 객석의 난간으로 달려갔다. 그제

야 유릭도 무대 쪽에 일어난 소란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로웨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에니--!”

무대 위에 에닌이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던 꽃이 산

산이 부서져 피처럼 무대위에 흩어져 있고, 몸은 축 늘어져 동료

가수의 팔에 안겨 있었다. 로웨나가 다시 소리쳤다.

“에니, 정신 차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거람!”

사람들의 술렁임과 혼란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화살처럼 정확하

게 들렸다.

로웨나는 무대로 내려가기 위해 돌아섰지만, 유릭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로이, 어떻게 된 거야? 이 편지는 뭐고.”

“펼쳐 보면 알거 아냐. 그런데 왜 에닌이....!”

유릭은 다시 무대를 보았다. 살비에 마델로가 무대 위로 뛰어와 딸을

안아 들었다. 그 뒤로,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혼 빠지게 놀란 마델로

부인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보는 유릭이 안

쓰러울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며 고함을 빽빽 지르고 있었다. 그 목소

리를 들으니, 에닌의 성량이 대체 누구 유전인 지 알 것 같았다. 멀

찌감치 있는 유릭에게도 소름끼치도록 생생하다.

“빨리 확인해 봐!”

로웨나가 다그치자, 유릭은 봉투를 열었다. 그러다가 그는 봉투 너머

로 앞에 있는 카밀턴이 창백한 얼굴로 망연히 서 있는 것을 발견

했다. 유릭은 봉투를 다시 닫고 그가 바라보는 곳을 돌아보았다. 아

무 것도 없었다. 내려진 커튼과 텅 빈 의자 두개, 단지 그 뿐이었다.

그리고 단지 그 뿐인 것이 문제였다.

유릭은 급히 봉투를 열고 그 안에 든 편지를 확인했다.

지팡이의 열 번째, 나팔 소리의 모퉁이 다섯 개와 열 하나의 강림자.

별의 제단에 달이 노래하니, 열여섯의 스카리아의 눈동자. 셋의 둘,

둘의 다섯.

푸른 수정의 불꽃, 흰 벼락의 발톱으로 채워라.

카밀턴이 외쳤다.

“쥴리안이 없어졌어!”

공연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겨우 몇 분이 지났음에도, 사람들

은 천년의 혼란을 겪은 듯 불안해하고 성급하게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트레비스는 에닌의 상태를 듣고,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모두에게 잠시

만 기다리라 말했다. 카밀턴은 얼음덩이처럼 싸늘하게 바닥을 노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를 쓸어 올리고는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리

듯 말했다.

“왜 하필 쥴리안인 거지. 쥴리안이냐고! 가스코 공작의 아들인 데다

가, 그 아이의 국적은 브라키니아라고!”

유릭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웨나가 무대위에

없자, 유릭은 너무도 당연하게 로웨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만 알

았다. 그것은 인과가 확실한 일이기도 했다. 로웨나는 박쥐의 정체

를 알고, 유릭을 도와준 적이 있으며, 둘 사이가 어떤 지 박쥐도

잘 안다. 인질로 잡는 다면 가장 먼저 손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속단 때문에, 등 뒤에까지 박쥐가 다가왔었음에도

멍청하게 당한 것이다.

유릭은 다시 편지를 보았다. 뜬금없는 그 말이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알아내기 어려웠다.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나도 읽어 봐도 돼?”

옆에서 로웨나가 물었다. 유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편지를 보여주었

다. 로웨나는 눈을 이리 저리 굴리며 그 내용을 읽다가, 그 편지를

아예 낚아채어 뚫어질 듯 골똘히 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가 가지

고 있어 봐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으니, 유릭은 당장 달라 하지

않았다.

카밀턴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문질렀다.

“크로반 군, 감....잡히는 것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

카밀턴은 다급하다고 과한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릭이

모른다 하면, 정말 그러하기 때문이며 최선을 다해도 그렇다는 뜻

이다. 다그친다고 뭘 알아낼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나

른하게 내 쉬었다.

그런데 그 때 로웨나가 불쑥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트레비스 씨, 혹시 극장 안에 성경이 있나요?”

“사무실에 있지. 그런데 성경은 왜?”

“아, 빌려 주시겠다면 제가 가지러 갈게요.”

그러나 트레비스는 직원을 불러 성경책을 가지고 오게 했다. 로웨나

는 여전히 그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유릭에게 물었다.

“유리, 푸른 수정이랑 흰 벼락, 하면 생각나는 거 없니?”

“전혀.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로웨나는 편지를 아래위로 스윽 쓸어 올리며 말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는 숫자들이 많이 나와. 이건 아마도 가스코

공자를 데리고 간 장소에 대한 이야기겠지. 어렵지는 않게 했어.

지나치게 어려워서 아무도 풀이하지 못하는 암호라면, 가스코 공자

를 끌고 간 이유가 없지. 이 사람은 처음부터 누군가가 쥴리안을 찾

으러 오기를 바라고 있고, 무지막지 어려운 문제를 내서 상대방이

아예 풀지도 못하거나 삽질하는 건 바라지 않을 거야. 오해 없는

단순한 말장난놀이지. 하나를 알면 금방 다른 것을 알아낼 수 있는.”

트레비스와 카밀턴도 로웨나를 보기 시작했다. 카밀턴의 눈에 희망과

희미한 기쁨이 어렸다.

그러고 있는데 직원이 성경책을 들고 왔다. 로웨나는 성경을 펼쳐 차

례를 확인하더니 어딘가를 폈다. 그리고 입 속으로 숫자를 세며

하나, 둘 셋- 하고 중얼거리고 고개를 젓고 페이지를 듬뿍 집어

넘기고 그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찾아낸 듯,

그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빠르게 훑어 내렸다.

“유리. 펜 좀 빌려주라.”

유릭은 만년필을 내밀었다. 로웨나는 성경 뒤의 여지를 북 찢어(다른

사람이라면 기겁했을 테지만, 트래비스는 묘하게 통쾌한 표정을 지

었다) 그 위에 이것저것 적기 시작하고, 여기 저기 선을 팍팍 그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 위에 무언가를 크게 적었다.

“성 주르필리아 대성당, 오른쪽 탑의 옥상이에요. 하지만 마지막, 푸

른 수정과 흰 벼락은 대체 뭔지 모르겠군요.”

카밀턴이 눈을 크게 떴다. 트레비스는 입을 멍하니 벌렸고, 유릭은

그녀가 엉망진창 적어 놓은 암호보다 더욱 암호 같은 악필을 들여

다보았다(이건 읽을 수조차 없었다).

카밀턴이 물었다.

“어떻게 알아낸 건가.”

“지팡이는 당연히 성전이죠. 이건 예언자 하두릅이 말한 것, ‘이 모든

것이 이들의 지팡이가 되리라’ 라고 말했으니 누구나 알 테고. 지

팡이의 열 번째, 이것은 아마도 예언집 10장. 성 주르필리아의 예

언록이지요. 복음서와 시편은 아니에요. 복음서의 열 번째는 하두릅

의 것이고, 시편의 열 번째는 그레타의 자애를 노래하는 것이긴 하지

만, -째, 하고 말하고 있으니까 주르필리아일 가능성이 커요.

복음서에서는 제1, 제2라는 식으로 장이 나뉘고 시편은 하나, 둘, 셋,

하는 식으로 장이 불리지요. 하지만 -번째, 라는 식으로 숫자가

붙는 것은 오로지 예언집 하나뿐이에요. 그 다음, 별의 제단에 달이

노래하니, 이건 성자 중 하나이자 시인인 노어의 시에 나오는 말

이죠. 그리고 그의 시는, 제도의 모든 사원의, 거의 대부분의 종에

적혀 있어요.”

“나팔...어쩌고 하는 건?”

카밀턴이 물었다.

“천국의 나팔이 들리니, 구원되도다. 역시나 노어의 시로 만든 찬송가

중 하나의 제목이에요.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건 노어일 거라 암

시하는 단어들이 몇 개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 찬송가의

가사를 떼어 온 성경의 대목을 살펴보도록 하죠. 모퉁이 다섯 번째.

즉 다섯 번째 연. 이 첫마디는 ‘구하소서, 구원하소서, 우리 모두

가 그대의 자식이니’. 하는 말이에요. 아마도 자기가 쥴리안을 데

리고 갔으니, 구하러 오라는 말일 듯 하군요. 열여섯의 스카리아의

눈동자, 셋의 둘, 둘의 넷. 스카리아의 눈동자는 도박꾼들이 마방진

을 말할 때 쓰는 은어에요, 자 이거.”

그리고 로웨나는 자신이 그려 놓은 열여섯 개의 칸으로 된 정사각형

을 가리켰다.

“열여섯이라고 한 것은 처음이 16으로 시작되는 걸 테니까, 이렇게

짜면 되죠. 그리고 그리 그려 놓으면 셋의 둘, 둘의 넷. 가능성이

있는 숫자는 두 개. 하나는 10과 14. 다른 숫자는 6, 8.“

“번지수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1014, 이건 주그필리아가 죽은 해. 그러니까

그가 말한 장소가 대성당일 가능성이 더 커지지요. 첫 줄은 솔직히

좀 애매하긴 하거든요. 아닐 가능성도 높고, 그 예언록이 말하는

다른 성자일 가능성도 높고. 68은.... 1868. 주그필리아 대성당에

는 두개의 탑이 있고, 그 두개의 탑 모두에 종과 시가 적혀 있지요.

1868이라면....왼쪽 것. 즉, 1868년에 세워진 거죠.”

그리고 로웨나는 펜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제가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푸른 수정과 흰 벼락은

대체 뭔지 모르겠네요. 무슨 조건 같은데. 이건 뭐지?”

“푸른 수정과 흰 벼락이라.....”

카밀턴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두

런두런 말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는 분명 익숙한 사람들의 것이

었다. 유릭이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로웨나도 창백해지며 안절부

절 못하기 시작했다. 유릭은 오른 손으로 그런 로웨나의 팔을 두 어

번 부드럽게 쳐 주었다. 로웨나가 멍하게 그런 유릭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특별 귀빈석의 커튼이 열어젖혀졌다.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고 들었소.”

그레이브 치안청장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브랫 키저가 따라와 유릭

과 로웨나에게 눈을 찡긋 하고는 웃었다. 로웨나는 입술을 앙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유릭은 대체 누구에게 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로웨나에게 했다면 왠지 언짢은 일이었고, 자신에게 한 것이라면

소름끼치는 일이었다....하나님, 제기랄! 급이다.)

그제야 로웨나를 발견한 그레이브 청장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아는

척 하지는 않았다.

카밀턴이 말했다.

“내 조카가 납치 되었소. 물론, 가출한 녀석 좀 찾아 달라고 이리 신

고하는 것은 아니오. 납치범이 보낸 편지도 있고, 그가 내 조카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 지도 알고 있소.”

“그건 치안청의 일이군요. 알려 주십시오. 저희가 공자를 무사히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납치범을 잡아 드리는 건 물론이고요. 경과

경의 조카분인 가스코 공자에게 정말 행운이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 제가 이 자리에 있었기에 이렇게 빨리 공자님을 찾을

수 있게 되니.”

그러나 카밀턴은 자신 만만하고 오만하게 미소 짓는 그레이브를 경멸

어린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아주 고맙소.”

“그래, 납치범은 누구이며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요.”

“그야......”

카밀턴은 유릭을 돌아보았다. 브랫의 눈도 유릭을 향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맞물리며 마주치는 순간에 유릭은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깨달았

다. 깨달음은 번개 같았다.

그레이브가 반문했다.

“그야?”

유릭이 나섰다.

“어느 장소인 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 지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레이브 청장님, 브랫 키저 경감님, 도움을 요청해도 될까요.”

그레이브가 웃었다.

“그야 아주 당연한 일이지. 치안청의 일은 시민의 안전을 보호 하는

일, 그러니 이건 ‘우리의 일’이지 자네가 도움 청할 일이 아니야.

도와주는 건 자네지, 내가 아니라는 말이네.”

카밀턴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레이브의 말뜻이 무엇인지

모르면 바보였고, 그리 되면 카밀턴에게 있어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닌

것이다. 유릭 역시 마찬가지라, 제발 그와의 말이 길어지지 않기만을

바랬다.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우겨댄다’

“자, 키저. 크로반 하사의 도움을 유쾌히 받아 들여 공자를 구해오

게나. 이번에는 잘 하리라 믿겠네.”

브랫의 눈길이 무대를 향했다. 평소에는 게을러 보일 정도로 무관심해

보이던 눈빛이 그 때만큼은 아주 어두워 보였다. 어딘지 슬퍼보이기

까지 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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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왜 잡혀갔냐, 쥴리안. 다들 너 구하기 싫어한다;;;

추석 끝나고 올리려고 했는데...... 겨울키 6권이 빨리 넘어간 덕

에 이렇게 일찍 올립니다.

모두 즐거운 추석 되세요. ^^

p.s 오타 이제야 수정;;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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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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