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74화 (74/174)

제74편

달이 노래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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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정과 흰 벼락. 전자는 모르겠지만 후자는 확실히 나로군.”

브랫은 나른한 눈길로 박쥐가 보낸 편지를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신께서 축복하신, 빌어먹게도 질기고 번거로운 놈이야. 그냥 카밀턴

경 암살이나 하러 오면 간단했을 것을, 뭐 하러 인질잡고 설치며

거기까지 달려가게 만드는 걸까.”

“쥴리안 시저 반 가스코 공자에 대해서는 압니까?”

브랫은 편지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퇴보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중 하나지. 자, 오리스케.”

브랫 키저는 편지를 흔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우윳빛이 뿜어져 오르

더니, 그 편지로 젖어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자, 브랫은 힘을

거두었다.

“별 다른 손장난은 없군. 그건 그렇고 크로반 졸병, 너는 카밀턴 각하

를 지키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가지 않으면 상부에 직무 태만으로 보고해서 한 번 더 강등시켜 놓

을 거라, 아주 험악하게 엄포를 놓으시더군요.”

“.......잠깐.”

둘은 막 현관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브랫 키저가 칼자루에 손을 가져

갔다. 잠시 뒤, 현관으로 향하는 오른쪽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나타

났다.

“여어.”

알렉산더였다. 브랫의 손이 칼자루에서 내려갔다. 유릭 역시 막 옷깃

을 건드렸던 손을 내렸다. 알렉산더가 인사하듯 빙그레 웃었지만,

가면이 없는 얼굴인 데다가 복장 역시 조촐했기에 브랫은 그를 알

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사람이 무턱대고 반말

부터 쓰니, 브랫은 누구냐고 묻는 듯 그를 가리켜 보이며 유릭을 보았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오면서 오터에게 들었네. 누군가가 납치되었고, 치안청 소속의 브랫

키저 경감이 그를 구하러 간다고 말이야. 물론 사정은 상세히 몰라.

비밀이라면 더 묻지 않겠네.”

그 목소리를 듣자 브랫도 그가 알렉산더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뭐야, 미남이었잖아? 얼굴은 왜 가린 거야?” 하고 중얼

거렸다(아무래도 남자들이 알렉산더의 가면 아래의 얼굴에 대해 기대

해 왔던 것을, 그 역시 기대한 듯 했다).

“그래, 먼 곳으로 가나. 멀면 도와줄 수도 있는데.”

“시룬달테 거리요.”

유릭 대신 브랫이 말했다. 브랫 키저는 수도 토박이여서 수도 지리를

잘 알고 있었으니, 주르필리아 대성당 자체를 말하기 보다는 그 근

방만 말했다. 어차피 알렉산더는 외부인이며, 까다롭게 따지면 적

이기도 하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달려가도 되는 거리로군. 마차라도 빌려 주려고 했더니.”

“백작의 기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브랫이 말하자, 알렉산더가 묘하게 웃었다.

브랫은 발걸음을 빨리하여 모퉁이를 돌아 현관 쪽으로 달리듯 걸어갔

다. 유릭이 그 옆을 따랐다. 브랫의 눈빛은 훨씬 더 어두워져 있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로 이가 꽉 맞물려 있었다.

“경감님?”

“분명히 말해두지. 내가 너를 전혀 신뢰하지 못하는 건, 그리고 내 신

분을 다른 사람도 아닌 너에게 말해 주었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건, 저 알렉산더인지 지랄인지 하는 녀석이 자네에게 눈에 뜨이게

치근덕대기 때문이야.”

“죄송하지만 그것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와의 일은 빠짐없

이 보고하고 있는 데요.”

“예전의 네 행실이 어떠했든 상관없어. 그 전의 네가 믿을 만했으니

칼 뷰겐트가 네게 내 정체를 말했겠고, 신께서도 허락하셨겠지. 중

요한 건 다음이야. 저 놈은 지나치게 많은 걸 가지고 있고, 너 같은

꼬맹이는 그런 권력에 정말 쉽게 홀랑 넘어 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

아. 나는 스무 살 미만 꼬맹이의 분별력은 절대 믿지 않으니까.”

유릭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 라는 뻔한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어쨌건 유릭이 노력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일단 가지요. 믿든 말든, 그건 당신이 선택할 바입니다만 할 일은 해

야 하지 않을까요. 쥴리안 왕자님이 저기 저 교회의 탑에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그 말에, 브랫의 얼굴은 정말 대판 구겨졌다.

“인질로 잡힌 ‘사내놈’을 구하러 가야 하다니, 정말 최악이야. 로웨나

그린 양이나 에닌 마델로 양이라면 정말 할 만 했을 텐데. 안 구하면

욕먹고, 구해봤자 보람없고. 쳇- 역시나 신이 내 책임감을 시험

하시는 군.”

유릭은 남자인 것도 억울한데 그 남자가 자그마치 쥴리안이라는 데

적잖은 슬픔을 느꼈지만 그것 역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저 울적함 만 삼켜야 했다.

그렇게 둘은 현관을 나섰다. 반쯤 먹힌 달빛이 어둠으로 스며들고,

흐릿한 별들도 수도 카스톨을 비춘다.

추하나 화려하고, 어두우며 사치스럽고, 위대하며 천박한, 그 성스러

운 제국의 수도로.

돌비체 수상의 집권 이후, 버려져 있던 많은 사원들이 증축되었다.

로웨나가 가리킨 성 주르필리아 대성당 역시 마찬가지로, 이 유서

깊으며 낡아빠질 대로 빠져 언제 무너질 지도 모르는 노인네 성당은

전통과 역사를 담은 건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예전부터 있던 곳인지 알 도리 없으나, 어쨌건 최근에 ‘보

수’된 곳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지금도 보수중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멀지 않다는 브랫의 말 그대로, 유릭과 브랫이 달린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성당의 첨탑이 지평선 위로 나타났다. 첨탑 끝, 투란바코스의

십자가가 달빛에 반짝이고, 그 꼭대기의 종 역시 을씨년스레 빛난다.

달은 풍만한 어머니의 가슴마냥 부풀어 오르며 다정스런 빛을

발하지만, 얼룩진 음험한 구름은 첨탑을 스쳤다.

유릭은 발을 멈추어 그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자신이 로웨나의 말을 전혀 의심치 않고 왔다는

것이 좀 의아스러웠고,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잖아.’ 라

는 생각도 든다. 브랫이 발을 멈추더니,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그 아가씨 말이 상당히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했다만, 아닐 경우에는

말 그대로 삽질하는 셈이니 주의는 두어야겠지.”

“즉?”

“오리-”

무엇을 하려는 지 단번에 알아챈 유릭은 그를 말렸다.

“저기는 성당인데요.”

“성지를 향한 예의보다, 내가 귀찮기 싫은 게 더, 매우, 아주 중요하

다고.”

“합리적이시군요. 아직 안 잡혀가신 것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이보라고, 졸병. 이 제도 안에 사원과 성지가 얼마나 많은 지 알고나

그런 말을 하라고. 개똥보다 많은 게 그놈의 사원이고, 그런 거 다

일일이 신경 써 주다가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게다가 신께서는 자

기 집이 좀 금갔다고 화낼 정도로 쪼잔한 구두쇠는 아니라고.

오리스케!”

회색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팍 치솟아 오르더니, 사원을 향해 쏜살같

이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중간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화살에 맞은

듯 벽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브랫이 말했다.

“신께서도 동의하시길, 아가씨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하는데.”

유릭은 망설임 없이 외쳤다.

“키케!”

바닥에서 금빛 섬광이 치솟아 올라 천장을 향해 쏘아져 올라갔다. 망

설임은 전혀 없었다. 사원의 벽돌 벽을 타고 올라가며, 덩굴처럼

이리저리 휘감기고 파고들어 치솟고, 그러다가 벽 속으로 빨려 들

어갔다. 유릭은 사원의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브랫이 투덜거리며

그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너도 신께 경배를 드리지 않는 건 매 한가지잖아. 성당에다 마령

을 날려먹어?”

“저는 신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두려워하라고 윽박지르는 인간들은

아주 귀찮습니다.”

“불경하게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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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우울한 인질구출. 인질구출의지 0, 인질 구출 보람 0. 내

버려두고 싶은 의지 100.

왜 잡아 갔냐, 박쥐. 여자 잡아 간 것보다 더 욕먹고 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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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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