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76화 (76/174)

제76편

방황하는 노예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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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델로 부인은 호들갑에 지쳐 축 늘어져 있었고, 살비에 마델로 역시

에닌의 손을 꼭 붙잡고 힘없이 앉아 있었다. 그들 옆에는 극장의 총

연출자 자리(그러나 트레비스가 지배인이 되면서 이 자리를 없애

버렸다. 즉, 카스틸리아 대 극장 소속의 세 연출자는 모두 동등한

지위였다)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아르사메 여사는 일부러 눈물까지

콕콕 찍고 있었다. 로웨나가 보니,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은커녕 걱

정하는 기색조차 별반 없었다.

“어쩌면 좋아요, 어쩌면! 오늘 무대에서 고운 마음씨의 에닌 양은 황

녀전하보다 고결해 보였을 텐데.”

연기라도 좀 잘하던가. 에닌만 빼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연기였

다. 그리고 대사라도 좀 괜찮은 걸로 고르지. 으엑. 현역시절에 어

떠했을 지, 짐작이 가다 못해 저런 여자가 역할을 맡아 나오는 오

페라를 보았을 관객에게 동정까지 간다.

로웨나는 어쩔까, 하고 잠시 문에 기대어 생각했다. 지금 이 휴게실

의 분위기를 보면, 에닌이 다 죽어가는 줄 알겠다. 방금 이 방을

나온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냥 기절한 것 뿐’ 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쓰러졌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건 결과 자체를 보자

면 에닌은 무사한 것이다.

아르사메 여사가 드디어 로웨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콱 찌푸렸다. 다

른 연출자들과, 아르사메 여사와 대립하는 극장 전속 가수들(나이도

많으며 만만하지도 않은)과 사이가 좋은 로웨나는 언제나 그녀에

게 눈엣가시였다. 로웨나 역시 보기 싫은 고양이 새끼 보듯 쏘아보

는 그녀를 경멸했다.

“너는 웬일이지?”

로웨나는 말 붙이기도 싫었지만 어쨌건 트레비스 씨와 카밀턴 경의

명령인지라,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트레비스 씨와 카밀턴 경께서 여사님을 오라고 하십니다.”

“왜 네가 그 말을 전하는 거지?”

“그야 방금 전까지 그분들과 함께 있었으니까요.”

아르사메 여사의 눈이 도끼보다 험악해졌다.

“어떻게 그렇게 높은 분들과 같이 있었던 거니?”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고.”

“말씀드리자면 굉장히 긴데, 그 말을 다 듣고 올라가신다면 적어도

10분은 늦을 걸요. 그러면 트레비스 씨가 굉장히 화내실 텐데, 그

래도 해 드려요?”

아르사메 여사가 이를 뽀득 물더니, 바늘 쏘듯 쏘아붙였다.

“나중에 보자, 못된 기집애!”

나중에 얼마나 볶아 댈지 눈에 선했지만 로웨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

다. 처음에는 좀 잘 보이려고 노력해 보기도 했지만, 작정하고 미

워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그냥 되는

대로 대하는 중이다. 왜 그렇게 로웨나를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로웨나가 처음 그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부터

줄기차게, 끝임 없이, 집요하게, 별로 신선하다 할 수 없는 방법으

로 괴롭히고 있다. 어차피 로웨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괴롭히려는

사람을 많이도 만나왔다. 상처받지도 않았고, 크게 괴로워 하지도 않

았다. 늘 겪는 일이라, 늘 대처하는 대로 했을 뿐이다.

아르사메 여사가 치마를 찢을 듯이 당기고 휴게실을 나가자, 마델로

부인이 로웨나를 불렀다.

“이리 오려 무나, 로이.”

마델로 부인은 에닌과는 전혀 닮지 않은, 바짝 마른 얼굴에 매부리코

를 가진 못생긴 여자였다.  그래도 그녀는 로웨나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진솔하고 다정한 사람 중 하나였다. 신분에 대한 강박때문에

실수를 자주 하고, 또 말투가 천박하고 시끄러운 여자인 것도 사

실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착한 여자였다. ‘그 여자’처럼 가증스럽게

위선 떨지 않는다. 그랬기에 지금 그녀의 모습을, 지금 로웨나를

대하는 태도가 진심이라 믿을 수 있다.

로웨나는 에닌에게 다가갔다. 에닌은 곤히 잠든 듯 눈을 감고 누워

있었고, 그런 그녀를 돌보는 사람들은 마델로 부인과 의사였다. 살

비에 마델로는 침대 맡의 의자에 앉아, 침울하게 딸의 얼굴을 바라보

고 있을 뿐이다.

로웨나는 에닌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다행히 아주 따스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쓰러졌는지 모르겠단다, 로이. 어제만 해도 힘든

사람들을 위해 공연하게 되었다고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너무 긴장 했나 봐요.”

거짓말이다. 에닌이 무대에 긴장한다는 건, 고양이가 쥐잡기 전에 두

려움에 떤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에닌은 언제나 자랑스럽게 무

대에 서고, 당연한 듯이 사랑을 받는 아이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

것만 수 백 번은 될 것이고, 작년에는 정규 시즌의 공연에 몇 번

이나 주역을 맡아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긴장할 리가.

“그런데 로이, 귀빈석이 소란스럽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마델로 부인이 묻자, 로웨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스코 공자에 대한

말은 할 수 없다. 게다가 카밀턴에게 그 일은 비밀로 해 달라는 부

탁(아니 협박)을 받고 오는 길이다.

“에닌은 괜찮은 건가요?”

“그래. 의사분이 조금 무리해서 쓰러진 거라고 하니까, 금방 깨어날

거야. 그러면 곧 노래를 부를 수 있어.”

“하지만......”

관객들이 오래 기다려 주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몇

사람이나 빠져나갔다. 2층 귀빈석의 귀족들이야 노닥거리려고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무슨 노래를 불러도 잘 듣지 않을 테지만, 1

층 관객들은 아니다. 그들은 정말 노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일 테고,

가장 실망하고 초조해 하고 있을 것이다.

에닌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누군가가 공연을 이어 나가야 할 텐데. 로

웨나는 모들린과 파미나를 떠 올렸다. 그 두 사람이 에닌의 빈 자

리를 메워줄 동안 에닌이 정신 차리고 나가면 될 것이다. 지금 관객

들 중 상당수가 에닌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일 테고, 그것을 아는 에

닌이 전날에 그들을 위해 열심히 연습했는지, 연습을 도와준 로웨나

가 더 잘 안다.

“이제 돌아가려무나, 로이.”

마델로 부인이 로웨나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로웨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야 어차피 코러스인 걸요. 저 하나 빠져도 괜찮아요. 그냥 여기 있

죠, 뭐.”

“그런 말 하면 못써. 네가 얼마나 잘 부르는데.”

이 말도 진심일 것이다. 로웨나는 에닌의 볼에 키스하고, 마델로 부

인의 볼에도 키스하고는 휴게실을 나섰다. 이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들 모두 에닌이 쓰러지고

로웨나도 사라져서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로 가려는데, 왼쪽 모퉁이에서 아르

사메 여사가 나타났다. 그녀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고, 정말 짜증

스럽다는 듯이 로웨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로웨나는 입술을 뾰족하

게 내밀고는 투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나하고 같이 가자. 어서.”

그리고 아르사메 여사는 고개를 획 돌렸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알겠니. 트레비스 씨하고 카밀턴 각하께서 너를 보자고 하는데,

네가 더 잘 알겠지. 이 앙큼한 것, 대체 그분들에게 언제 그렇게

꼬리를 친 거니?”

로웨나는 에닌과 자세를 바꾸고 싶어졌다. 네가 여기 있어라, 내가

기절해 있을 테니. 젠장.

“여사 님, 언제나 저보고 못생기고 애교 없는 아이라고, 그러니 한량

클럽 신사들도 저에게만은 데이트 신청은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거라고 늘 그러셨잖아요. 그런 제가 꼬리치면 과연 효과가 있

을까요?”

아르사메 여사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주제는 잘 아니 다행이구나! 어서 냉큼 따라오기나 해라.”

로웨나는 그녀가 보지 않을 때 얼른 혀를 내밀고는 그녀를 따랐다.

아르사메 여사는 로웨나를 대기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카스틸

리아 극장 소속의 오페라 단원들은 물론이고, 특별히 초대된 모들린

양도 있었다. 그녀는 쇼올로 어깨를 감싸고 불쾌하다는 듯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파미나 양도 마찬가지라, 아르사메 여사를 노

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렸다.

트레비스는 남자 가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로웨나가 들어오

자 웃으며 반겼다. 그제야 로웨나는 그의 옆에 멜리잔드 피케 양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지만 별로 미인은 아닌

여자였다. 못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강단진 턱과 서늘한 눈을 가

지고 있어 호감이 가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녀는 야회복 차림에,

머리는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그녀답게 대강 말아 올려 장

미꽃을 꽂고 있었다. 늘 그러고 다니기에, 아르사메 여사는 그녀를

‘못생긴 주제에 여자답게 꾸미지도 않는 게으른 노처녀’ 라고 숙덕

대곤 했다(그러나 아르사메 여사의 패션 감각은 보는 사람이 괴로운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단원은 차라리 신경 쓰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곤 했다.).

“자, 그린 양을 데리고 왔으니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당신의 의견을

말해 봐요, 피케 양.”

아르사메 여사의 말에 피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지요. 지금 마델로 양은 공연을 지속할 만한 상태가 아닙니

다. 하지만 계획된 공연을 가수 한명이 아프다고 해서 취소시킬 수는

없지요. 안 그런가요, 여러분?”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주변의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고개를 끄

덕였고, 에닌을 미워하는 파미나 양은 가장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자존심 강한 모들린 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카스틸리

아 극장 전속 주역이었지만, 에닌 덕에 밀려나 다른 오페라 단으로

옮긴 소프라노 가수였다. 그러나 트레비스와의 친분이 두터워 이

공연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저는 에닌 양이 하기로 했던 곡을 모들린 양이 대신 해 주었으면 해

요.”

“하지만 피케. 사람들은 에닌 양을 보러 온 거지, 모들린 양을 보러

온 건 아닐 텐데요.”

“아르사메 여사, 이건 가수 한명의 콘서트가 아닙니다. 게다가 에닌

양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어요. 관객 모두 이해할 것입니다.”

“이번 무대는 제가 감독했어요. 누구를 세우든 권한은 제게 있어요”

“그래서 에닌 양이 일어날 때까지 모든 관객을 앉혀둘 생각인건가요?

다른 가수들은 대기시키고요? 맙소사, 황후마마도 그러시지는 않겠

어요.”

“그거야 말로 피케 양의 지나친 간섭입니다. 뭘 하든 제 마음이에요.”

모들린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파미나는 이제 프로그램을 물어뜯고 있

었다.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라, 여자들은 물론이요 남자들까지

험악한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며 아르사메 여사를 노려보았다. 멜

리잔드 피케가 말했다.

“모두를 위해 양보해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그, 그야........관객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잖아요.”

“아무도 나서지 않는 다면 더 실망할 겁니다, 여사.”

드디어 잠자코 있던 트레비스가 나섰다. 아르사메 여사의 얼굴이 창

백해졌다.

“이 음악회의 주최자이시기도 한 카밀턴 각하께서도 허락했고, 간곡

히 부탁하기까지 했습니다. 에닌 양이 깨어나면 따로 무대를 준비

하도록 하고, 나머지 가수분들과 함께 어서 공연을 시작해 달라고

말입니다.”

“트레비스 씨! 그, 그래도 이건 예의가 아니지요. 사, 사람들은......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훌륭한 가수들이오. 그리 말한다면 모두에

대한 무례야. 자, 모들린 양. 에닌이 하기로 했던 곡을 6번까지 해

주었으면 해. 그리고 파미나 양, 7번부터 9번 까지. 프란츠 군, 자네

는 파미나와 이중창으로 ‘제비꽃, 사랑의 마음’을 불러 주었으면 해.”

“하지만 트레비스 씨. 그리 한다면 가수 한명의 자리가 비잖아요. 5

번의 ‘아가사’와 6번의 ‘나는 여기 있다오’는 2중창이에요. 소프라노

한명이 더 필요해요.”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아주 간단한데. 그것은 에닌 양의 연습을

도와주었던 사람이 해 주면 될 것 아닌가. 안 그런가, 로웨나 양.”

모두의 시선이 로웨나를 향해 쏠렸고, 로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가리켰다.

“제, 제가요?”

트레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웨나 그린 양. 에닌 양을 도와줄 때처럼 해 주면 돼. 어렵지

는 않을 테니, 긴장 말고 수고해 주면 좋겠어.”

이제 아르사메 여사는 이를 득득 갈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 무엇 때

문에 연출인 그녀에게 로웨나를 데리러 오라는 잔심부름을 시켰는

지도 깨달았다. 그녀가 없을 때 모든 논의를 마치고, 아르사메가

돌아오기만 기다린 것이다!

로웨나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트레비스를 보았다. 트레비스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잘 해 보라고. 헤리도 아주 기대하고 있다네.”

그리고 로웨나는 이것이 카밀턴 경의 보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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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커그 작연난의 개인연재실화!!!

..................가 좋을 리 없잖아요!! 왜 다들 안 올리는 거야!!!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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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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