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77화 (77/174)

제77편

방황하는 노예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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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총을 든 채, 지금까지 얼마나 서 있었나 생각했다.

기도가 막힌 듯이 답답하기만 하다.

브랫은 어디로 갔을까, 그의 목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총을

쏘고, 브랫이 검을 날리고, 벼락이 치고 바람이 허공을 찢는 순간에

갑자기 천장의 빛이 꺼지고 어둠이 쏟아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상태다.

-어둠 속에 혼자 있지 마라. 외치기라도 해....하지만 절대 혼자서,

가만히 있지 말거라. 그러면 그것들이 다가와 너에게 속삭일 거야.

결코 귀 기울여서는 안 되는 말을 속삭일 거란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눈물범벅인 볼에

키스하고, 동정과 슬픔 가득한 눈으로 유릭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유리야, 내 충고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어라, 유리. 단 하나도 놓

치지 말고, 단 하나도 어기지 마. 그래야 너는 살 수 있어. 인간답게,

자유롭게. 싫더라도 나를 위해 그리 해 다오.

유릭은 숨이 가빠왔다. 그런데 내가 뭘 지켰더라. 대체 뭘 지켰지?

유릭은 땀에 젖은 손바닥에 움켜잡힌 총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군인이야. 유릭은 이를 악물었다 떼며 말했다.

“키케.”

어둠에 먹힌 허공 속에 금빛 점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작은

별처럼 주변을 떠돌며 점점 더 빛을 키웠다.

묵직한 어둠 속에 그 빛은 나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 흐릿한 빛에나

마 주변이 조금씩 드러난다. 녹슨 난간이 보인다. 벽토를 바르지

않은 맨 돌벽도 보인다. 그리고 얼핏, 가면이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가 어둠 속에 사라졌다.

“!”

유릭은 빛을 옮겼지만, 그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캉! 푸른 섬광이 번쩍이며 주변을 흐릿하게 밝혔다.

무언가가 잽싸게 사라지며 검은 옷자락이 언뜻 보였다. 총알은 그

옷자락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릭은 다시 총을 쏘았다. 캉-! 푸른

섬광이 어둠을 할퀴었고, 검은 옷자락이 나타났다. 유릭은 총구를

내리며 달려가려 했지만 허리를 난간에 부딪쳤다. 조금만 더 서둘

렀다면 난간 밖으로 나가떨어질 뻔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키케!”

순간 심장 부근에 빛이 흐릿하게 얼룩처럼 터졌다. 유릭은 왼쪽으로

피했다. 츠쾅! 엄청난 것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허리를 스치고 지

나가며, 옷이 베이고 피가 튀었다. 끔찍한 통증이 몸을 찢을 듯이

파고들어왔다. 유릭은 뒤를 돌아보았다. 돌로 된 벽에, 흐릿하게 빛

나는 푸른 탄환이 박혀 있었다. 주변으로 둥근 파문을 그리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유릭의 탄환이었다. 분명 맞은 편을 향해 쏘았건만,

되돌아 날아온 것이다.

순간 무언가가 다가오는 듯 기척이 느껴졌다. 유릭은 다시 총을 쏘았

다. 푸른 섬광이 어둠을 할퀴며 박혀 들어갔다. 그러나 그 앞에 다시

검은 옷자락이 나타났다. 파고드는 탄환을, 검은 옷자락이 덮었고

잠시 뒤 이번에는 왼쪽 목덜미 근방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제길!”

유릭은 몸을 날렸다. 이번에 등으로 그 푸른 탄환이 스치고 지나갔

다. 힘의 파동에 옷이 찢어졌고, 등에 얼음덩어리로 맞은 듯한 차

가움과 통증이 치밀었다. 쏘는 것마다 유릭을 향해 되돌아오고 있었다.

유릭은 턱의 땀을 훔쳤다. 그러나 이마에 맺힌 땀이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그의 탄환에 맞았던 많은 이들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

었다. 미안, 미안.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정말 눈물이 쏙 빠질

정도군.

순간, 턱으로 엄청난 타격이 날아들었다. 몸이 날아가 난간에 부딪혔

다.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명치로 타격이 날아들었다.

“컥!”

유릭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발에 힘을 주고, 난간을 꽉 움켜잡았

다. 다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턱 근처였다. 유릭은

고개를 젖히며 몸을 날렸다. 목덜미 쪽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유릭

은 몸을 돌리고 총구를 밀어 넣었다. 총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유

릭은 미끄러지듯 총구를 내려 더 깊이 밀었다. 역시나 더 부드러운

살이 총구를 밀어냈다. 유릭은 총을 당기고, 반대편 손으로 주먹

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무 것도 짚이지 않았다. 허공만이 놀리듯이

유릭의 주먹을 받았다.

“!”

“왜 봐 주는 거냐.”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바람처럼 오만한 목소리다. 유

릭은 답하지 않았다. 그야 당신을 살려서 잡아 가야 하는 게 내 임

무니까. 유릭은 웃었고, 그러자 그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바셀 아브롤라인.”

“유릭 크로반. 박쥐보다 훨씬 부르기 좋네.”

“나도 동의해. 그 별명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촌스러웠거든.”

그리고 유릭은 발을 휘둘렀다. 빡-! 턱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신음이 터졌다. 유릭은 주먹을  휘둘렀다. 퍽-“컥!” 후려 맞은 옆

구리를 움켜잡으며 바셀이 허리를 숙였다. 유릭은 팔꿈치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 찍었다.

“헉-”

유릭은 상대의 무릎을 가격하고 걸어 넘어뜨렸다. 쿵-! 거창한 소리

가 들렸다. 유릭은 어둠 속에서 그의 옷자락을 찾아 움켜잡았다.

그러나 손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유릭은 이를 갈아붙이며 옷자락을

당겼다. 힘없이 딸려와 허공에 붕 떠올랐다.

순간, 목에 차가운 손이 감겼다. 유릭은 몸을 뒤틀어 상대의 배를 치

려했지만, 손의 힘이 약해지는가 싶더니 그 순간에 내동댕이쳐졌다.

등에 난간이 쾅 부딪혔다. 그 반동에 머리를 크게 부딪쳐 얼얼했다.

“크으-”

“나를 생포하라는 명령을 듣고 온 거군.”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유릭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피식

웃었다. 주변이 조금 밝아지며, 그의 검은 코트와 흰 가면을 덮어쓴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검은 장갑을 낀 손이 가면 아래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사랑스러운 것을 쓰다듬듯이 그 가면을 더듬었다.

“나를 이길 수 없어, 크로반.”

“관심 없어. 너를 잡아 가면 그것으로 내 임무는 끝이거든, 애송이.”

“아하.”

유릭은 몸을 일으켰다. 바셀이 말했다.

“너는 늘 나를 애송이라고 부르더군. 하지만.....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아.”

“마령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시기는 내가 더 길거다.”

바셀이 두 손을 뻗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군대에서, 품종 좋은 개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았던 그 경력을 말하

는 건가? 으흠, 식민지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골라내는 지는 나도

알아. 일렬로 죽 세워놓고 좋은 돼지 고르듯이 검사하지. 그러다가

걸리면 평생을 군에 묶여 살아야 해.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데,

지겹도록 감시당하지. 우리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언제나 없는 셈 치고 살아가려고 해.”

유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앞에 있는 바셀만이 따로 떨어져

있는 듯,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난간과 끝 간 데 없이 뻗어

있을 듯한 바닥. 브랫 키저도 보이지 않는다.

유릭은 다시 바셀의 흰 가면을 보았다. 바셀이 말했다.

“자유롭고 싶겠지?”

“아니.”

“분명 생각하고 있을 걸.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쇠사슬에 묶인 사자

도, 우리에 갇힌 용도, 아무리 그리 하는 게 안전하다고 모든 사람

들이 말해도 그들은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지. 너도 억울하겠지. 그렇

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 힘을 가지게 된 것 역시

네 권리일 뿐인데, 그렇게 군에 묶여 있지. 감시당하며, 외면당하

며, 온갖 힘들고 위험한 일을 목숨을 내 걸고 해야 하는데, 정작 보

답은 돈 몇 푼뿐.”

“너는 자유롭나.”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지. 내가 원할 때 하늘

을 날고 벽을 넘고 원하는 것을 움켜쥔다.”

유릭은 총구를 그의 이마에 댔다. 그러나 바셀은 움직이지 않았다.

붉게 빛나는 눈 역시 그대로.

“니콜라스 추기경과는 무슨 관계냐, 바셀.”

“나는 그의 부하도 하수도 아니야. 나는 그에게 협조하고, 그는 나를

보호해 주지. 우리는 아주 훌륭한 동업관계라고.........나는 너를 자

유롭게 해 줄 수도 있어.”

유릭은 대강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것은 예상이 맞

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역시나- 확인하니 허탈하기도 하다.

애들(카밀턴 경 포함)이 아주 실망하겠다.

그리고 이 바셀의 말이, 유릭은 지겹고 진부하게 느껴졌다.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며, 어린 시절의 그는 그런 생각을 매일 매일 하기도

했다.

“바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건 나의 적이다. 나의 분노, 나의 증오,

억눌린 그 뜨거운 것들을 해방시켜는 건 언제나 적이었지. 아주 강한

적.”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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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익숙한 이름이 하나 나왔을 텐데요. 맞추는 분은 원츄해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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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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