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82화 (82/174)

제82편

되돌아오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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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현관에 도착한 알렉산더에게, 오터가 다가온 것은 공연이 재개

된 지 20분가량 지난 뒤였다. 알렉산더는 담배를 빼 바닥에 던졌다.

“받아 온 건 있나.”

오터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품안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알렉산

더는 말없이 봉투를 받아 뜯은 후에, 그 내용을 확인했다.

“추기경께서 따로 전한 말은 없었나?”

“적힌 대로. 머뭇거림 없이. 그리만 말씀하셨습니다.”

알렉산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봉투를 흔들자, 오터가 품

안에서 성냥갑을 꺼내었다.  성냥을 뽑아 그은 뒤에 불꽃을 봉투

끝에 댔다. 봉투에 삽시간에 불이 번지며 쭈그러들었다.

알렉산더는 불길이 손끝까지 번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손가락 마디

정도로 줄어들자 손을 놓았다. 재는 죽어가는 나비 날개처럼 펄렁

이다 바스러졌다.

“이만 들어가겠다. 금방 성으로 돌아갈 테니, 마차를 준비 해 두도

록.”

“네.”

알렉산더는 거미줄 위를 걷는 거미처럼 느릿느릿 극장 안으로 들어갔

다. 경비원이 들어와 저지하려 했지만, 그가 카드를 내 보이자 당

장에 물러났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지나자, 어렴풋이 노랫소리

가 들렸다.

아주 좋은 목소리다. 단단하고, 정교하며, 힘차고, 동시에 풍부하고

섬세한, 위대한 것으로 화하여 가슴을 메칠 것 같은 목소리. 그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복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

고 멈추었다.

단단한 체구의 남자는 창밖을 옹골차게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모두 음악회에 몰두하여, 평소라면 대 여섯 명은 나

와서 노닥거리고 있어야 할 복도에는 외진 동굴마냥 싸늘한 정적

뿐이다.

알렉산더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레이브 각하.”

순간 남자가 고개를 휙 돌렸다. 강철 같은 콧수염은 움찔거리지도 않

았지만, 그 얼굴만은 평소와는 달리 잔뜩 일그러져 불안감에 시달

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누구시오.”

“알렉산더 란슬로 입니다. 가면을 안 써서 못 알아보시는 것 같군요.”

순간 그레이브의 눈이 아주 커졌다가, 이내 의심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카락 색은 분명 잿빛이었으나 그는 가면이 없었고,

복장 역시 평소의 그 단순하나 우아한 차림새가 아니다. 사무원처럼

평범한 차림새다.

“무엇으로 믿으란 말이오.”

“제 목소리, 제 체격. 각하 정도 되는 안목이라면 금방 알아보실 텐데

요.”

그레이브가 조금 안심한 듯 했지만, 그 눈의 의심은 여전히 살벌할

정도였다. 알렉산더는 손을 들어 문쪽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에 관한 것이오.”

“당신의 의심쩍은 수하 중 하나에 관한 일입니다. 그리고 추기경 예

하의 전언도 있고, 제가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더의 억양과 목소리는, 그 누가 들어도 그레이

브가 아는 백작의 나른한 어조 그대로였다. 그레이브는 결국 그를

믿고 알렉산더를 따라야 했다.

“가, 가면은 언제부터 벗은 거요.”

“얼마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거의 치료가 끝나서, 낮에도 이렇게

다녀도 됩니다.”

“생각보다 훨씬 미남이시군. 나이도 젊어 보이고.”

“저는 절대 젊은 나이가 아닙니다. 보기보다 나이가 들었지요.... 어쩌

면 각하보다 많을 지도 모른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좌석과 바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벽을 통해 뭉툭

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문이 열리자마자 수정처럼 선명하게 들려

왔다. ‘승리의 신이여’. ‘팔루제의 승리’에서 여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돌아온 남자 주인공에게 바치는 노래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눈부

신 무대가 보였다. 그 위에서, 코러스 소녀들이 입는 검은 옷의 소

녀와 화사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 소프라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술 달린 커튼은 위로 듬뿍 젖혀져 무대를 굽어보고, 그 무

대를 감싼 관객석의 사람들은 새카맣게 숨죽이고 있었다.

아스라, 그것은 새벽의 빛.

도리사, 그것은 승리의 창.

알렉산더는 웃으며 말했다.

“따님이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군요. 살비에 마델로 씨의 따님과 견

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아니, 제가 듣기에는 그레이브 양이

더 훌륭해요. 여신같은 목소리입니다.”

“헛소리 그만하고, 할 말이나 어서 하시오.”

알렉산더는 커튼을 잡아당기며, 그 기둥에 등을 기댔다. 그 모습에,

그레이브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유별난 건 누구나 아는 바였지만, 이 조롱하는 듯 느긋한

태도는 자존심 강한 그에게 아주 불쾌하게만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

까, 한 소절이 끝날 때 즈음에 알렉산더가 말했다.

“바셀이 죽었습니다.”

그 말은, 툭 떨어진 한 방울 차가운 물처럼 고요하고도 섬뜩하게 나

왔다. 그레이브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좌악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무슨....말이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바셀이 죽었습니다. 당신의 부하 브랫 키저와,

카밀턴의 경호원인 유릭 크로반 군에 의해 죽었지요.”

그레이브의 수염 끝이 부르르 떨렸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시오.”

“물론 압니다.”

“그와 나는 아무 상관도 없소. 그는 내 수하가 아니라, 니콜라스 추기

경 예하의 수하였소. 내가 한 일은 그저, 그가 특무부와 다른 사람

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었소! 이건 내 전임이었던 워

튼 경도 했던 일이기도 하고! 그러니 그가 죽던 말든, 나는 아무 상

관도 없어!”

“아뇨, 상관있습니다. 니콜라스 추기경은 그를 보호하고 처분하는 일

을 당신에게 맡겼고, 당신은 그 일에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그건 억지야!”

알렉산더가 피식 웃었다.

“억지는 당신이 잘 하시는 일 아닙니까. 그래도 영광이군요. 당신에게

그런 판정을 받다니.”

모멸감에 그레이브는 이를 악물었다. 알렉산더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니콜라스 추기경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전해!”

“그 동안 정말 수고했다고 하시더군요. 이제 퇴임하십시오. 재산도 좀

있으시니, 좀 이른 나이에 퇴임한다 해도 그다지 슬픈 일은 아닐

것입니다. 추기경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재산몰수는 하지 않으시겠

다합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레이브는 순간 알렉산더의 멱살을 잡아 비틀 뻔 했다.

“무슨 헛소리 하는 건가.”

알렉산더의 잿빛 눈이 가늘어졌다. 심술궂은 고양이 같은 눈빛이었

다. 그 눈이 ‘글쎄요?’ 라는 반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다시 화가 치

밀어 올랐지만, 그레이브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제대로 말해 주시오.....이건 너무 갑작스러워. 아니, 억울한 일이라

고. 내가 그 동안 해 드린 일이 얼마인데 고작, 고작 뜨내기 하나

보호하지 못했다고 쫓아내신다니!”

“당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왔는지는, 지금 파난과 잉겔 유형지에

있는 죄수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설명해 줄 것입니다. 압니다, 당신은

정말 이 돌비체 정권의 모범적인 관료였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필요 없겠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귀 언저리로, 노랫소리

는 창을 찍듯이 높고도 깊게 파고들어오고 있었으며, 그 소리에 그

레이브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분노보다 더욱 그를 압도하

는 것은 공포. 니콜라스 추기경이 얼마나 든든한 그의 보호막이었는

지, 그리고 그것이 치워지는 순간 얼마나 사나운 아귀떼들이 몰려

들지 그는 잘 안다.

“나를 버리신다는 건가.”

“네.”

“정말 나를 버리겠다고, 추기경 예하께서 그러셨다는 건가. 이 나, 사

냥개처럼 열심히 적을 물어다 준 이 개를 버리시겠다, 그리 말하셨

다는 건가.”

“네.”

“고작 그 반란군 잔당 하나 간수 못했다고?”

“그렇지요.”

그레이브의 손에, 대체 언제 쥐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집을 나설 때 총을 들고 나왔었는지, 그것조차 그레이브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의 손은 권총을 꽉 그러쥐고 알렉산더의 이마를 겨냥하고 있

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눈은 더없이 무관심하기만 했다.

허무한 가짜,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싸구려를 보는 듯한, 그 오만

에 찬 무관심.

“이렇게 하셔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각하.”

그 목소리에는 달래는 어조도, 두려움도 없었다. 총구를 바로 이마에

대고 있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차고 건조했다.

“닥쳐! 네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네 놈이

나타난 후부터 세상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고! 빌어먹을,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대체 무엇으로 예하를 꼬드겨 나를 내치게 하

는 거냐고!”

“모든 것은 예하의 판단일 뿐, 지금 당신이 파면당하는 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그레이브는 총구를 더 바짝 밀었다. 이마가 닿았고, 이제 알렉산더도

고개를 조금 젖혀야 했다.

“좋아, 그럼 예하가 나를 버리시겠다면 내가 할 일은 아주 많아. 그중

한 가지만 해도 예하께서는 당장에 나를 찾아와, 내게 용서를 빌게

될 거다.”

“그래,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자네도 지저분한 일 뒤치다꺼리 하고 있으니 알거 아닌가. 지금 예

하의 힘, 철십자 기사단의 압도적인 지지와 복종을 받아낼 수 있는

진짜 이유가 뭘까. 나는 그걸 알고 있고, 내가 그것을 폭로하는

순간에 그 모든 권력의 탑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이다. 나는 이런 식

으로 버림 받을 정도로 멍청하게 있지는 않거든!”

“그러니까 당신이 제거되는 겁니다.”

“무슨 헛소리!”

“예전에 저더러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죄송하지만,

저보다 더 깊이 관여한 것은 당신입니다. 주인은 사나운 개를 사슬에

묶어 놓지요. 한 자, 한 자 사슬을 늘리며, 조금씩 마음대로 움직

일 수 있는 거리를 넓혀 줘요. 그러다, 주인까지 물 정도로 너무

늘려 놓으면....개를 쏴서 죽여 버리는 겁니다. 사슬을 줄일 수는

없으니까.”

알렉산더는 관람석의 의자에 앉았다. 그의 좌석은 구석진 곳에 있는

데다가 벽이 깊어, 지금 그 모습을 그 누구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레이브는 떨리는 총구를 내렸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다시 그레이브

의 눈을 바라보았다. 회색 눈, 정말 기분 나쁜 회색의 눈동자라고

그레이브는 생각했다.

그레이브가 말했다.

“나는 멍청한 개가 아니야.”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레이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절대 쉽게는 안 당할 거라고! 이건 그냥 으름장이 아니야.”

“레반투스 대공에게 갈 겁니까?”

“교황에게라도 갈 수 있지! 너는 물론이고, 니콜라스 추기경도 파난

에 처박아 버릴 수 있어.”

알렉산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정말, 예나 지금이나 오만하군요. 마그레노의, 행실 나쁜 아

내와 원숭이 닮은 딸밖에 없던 그 시절에도 그러셨으니, 지금은 오

죽할까. 하지만 그레이브 각하, 사람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상대방을 우습게 여기는 순간, 상대방은 당신의 방심 아래를 찔

러 버립니다.”

그레이브가 흠칫 놀랐다.

“자네, 마그레노에 있었나?”

“좀 오래 살았지요. 그 곳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 거라 생각했었답니

다. 열심히 살았지요. 바닥부터 차근차근 시작했어요. 가난한 청년

에서, 작은 상점의 주인에서, 결국에는 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좋

은 집과 나와 그녀의 아이들을 위한 넓은 뜰도 마련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 약혼녀, 내 재산,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숨겨 왔던 보물들......”

그레이브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총구가 다시 올라가, 알렉산더의 이

마를 향했다. 이제 알렉산더는 웃고 있었다. 그 눈 안으로, 열기어린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광기와 희열과 닮은 무엇이었다.

“뭔가, 자네는....”

“....그리고 돌아와 보니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재산은 어느

천박한 자에게, 상단은 나를 배반한 파렴치한에게, 약혼녀는 속 검은

남자에게, 그리고 내가 배신을 값으로 치르고 간직했던 소중한 아이들

은 근본도 모를 자의 노예가 되어있었지요.....”

“......!”

순간, 그레이브는 누군가의 얼굴을 본 듯 했다. 아주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 전혀 닮지도 않았다. 분위기도, 얼굴도, 그 태도도. 그러나 그

누군가의 얼굴이, 안개 겹치듯 어렴풋이 알렉산더와 겹쳐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턱을 괴고,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마치 왕처럼 앉아 자

신을 바라보는 알렉산더와.

“넌 뭐냐.”

“뭘까....?”

목소리가 기묘하게 달랐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그레이

브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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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아하~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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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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