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84화 (84/174)

제84편

한 걸음 옆#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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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만큼 컸구나.”

그렇게 말하며, 프리델라는 엄지와 검지를 아주 작은 틈을 사이로 둔

채 맞물리게 했다. 유릭이 말했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바셀을 상대할 때. 탑 꼭대기에서 추락하는 유릭의 눈앞을 스쳐지나

간 것은 프리델라의 마령, 켈비다. 그것이 유릭을 향해 갈고리 같은

발톱을 내밀었고, 추락하던 유릭은 간신히 낚아채며 비상할 수

있었다.

프리델라는 별로 뿌듯해 하는 기색도 없이, 그 무관심한 눈길을 들어

치료를 받고 있는 카밀턴을 보았다. 그녀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의사가 달려오고, 피투성이가 된 카밀턴이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

을 받을 때, 그녀는 총알을 뽑는 것도 지켜보았고, 그 상처를 꿰매

고 붕대를 감는 지금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인 트래비스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칼 뷰겐트가 나타나자

주눅이 들어 구석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 쉬는 중이다. 그러나 그

녀는 전부인이면서도 태연하게 서 있었다. 유릭이 극장에서 그를

기다리던 칼 뷰겐트와 만나 일의 전말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

조금 전이었다. 사방에 개미처럼 모여든 기자들이 깔려 있고, 그

앞을 검은 제복의 경찰이 서성이며 저지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며

유릭 역시 제지당했지만, 신분증을 내보이고 브랫 키저 역시 자

신의 신분증을 내 보이자 당장에 통과되었다. 기자 한명이 늘 그레

이브와 붙어 다녔던 브랫 키저를 알아보는 바람에 한바탕 소란이 있

기는 했지만, 경찰이 필사적으로 저지해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유릭이 브랫과 함께 나타나자, 카밀턴과 트래비스는 굉장히 놀랐지만

프리델라와 칼 뷰겐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고했다, 브랫.” 어쩌고

말하다가 카밀턴과 트래비스에게 브랫의 정체를 들킨 것을 깨닫고

둘답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면서 대강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유릭이 묻자, 진통제와 마취제에 반쯤 취해 해롱대는 카밀턴 대신(붕

어 울음 비슷하게 뭐라 말하기는 했다) 트레비스가 답했다.

“그레이브가 헤리를 습격했네.”

“듣고 왔습니다만, 그게 이상한 겁니다. 카밀턴 경과 트레비스 님이

계신 그 자리는, 극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훤히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런 미친 짓을 대체 왜 한 겁니까.”

“말 그대로 돌았다고 밖에 볼 수 없지. 제길. 정말 날벼락이었다니까.

갑자기 쾅, 하더니 어깨에 총을 맞았더군. 돌려보니 그 자식이 악

마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하며 날뛰고 있는 거야. 어디서 약이라도

처먹었나.”

카밀턴이 다 풀어진 목소리로 그리 웅얼거리듯 말하고는 다시 침대에

고꾸라졌다. 어깨에 총을 맞아, 그는 팔까지 붕대로 고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몸의 절반을 덮은 붕대를 우울하게 내려다보며

투덜댔다.

“다리가 나을 만 하니, 이제 어깨가 날아갔군. 올해는 아주 작정하고

놀겠어.”

프리델라가 말했다.

“원래 노는 거 좋아했잖아. 아, 여자와 놀지 못하게 된 건 조금 유감

이군.”

“당신하고 이혼 한 뒤에, 수도승처럼 살고 있다고! 자꾸 그렇게 파렴

치범으로 몰지 마.”

“당신이 이혼하고 나자, 여자들 부모와 그 남편들이 그녀들을 엄중히

단속하기 시작했으니 주변 환경이 삭막해진 거겠지. 당신이 당신의

의지로 욕망을 뿌리쳤다고는 안 믿어.”

“왜 ‘못’ 믿어가 아니고 ‘안’ 믿어, 인거지?”

“당신을 믿어야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조금도 못 느끼니까.”

카밀턴의 입술이 치솟아 올랐다.

“본격적으로 부부싸움 하자는 건가, 당신?”

“이미 부부가 아닌데 그렇게 칭하니 아주 싫은데.”

불과 몇 초전만 해도 잔뜩 취한 주정뱅이 비슷하던 카밀턴의 눈빛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카밀턴이 갑자기 침대 일어나 앉더니, 그

둘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유릭, 트레비스, 뷰겐트, 브랫 키저에

게 으르렁대듯 말했다.

“이봐, 본격적으로 민망한 싸움질을 할 생각이니, 다들 나가주면 좋겠

네. 밖에서 엿듣지도 마.”

유릭이 말했다.

“커피 타 드릴까요?”

“블랙으로.”

프리델라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만날 때마다 저러십니까?”

유릭이 묻자 트레비스는 크르, 하고 한숨을 내 쉬고는 답했다.

“아주 예의바르고 다정하게 서로를 씹어대는, 참으로 암울한 케이스

지. 저런 부부는, 당사자 둘은 마음껏 싸우고 상관없는 사람은 구

경만 해도 되지만 친구는 고달프다고. 싸움 끝나면 교대로 나한테

찾아와서 몇 시간 동안이나 푸념 늘어놓다 집으로 들어가서 또 싸

운다니까. 절대 결혼 따위는 하면 안 된다는 둥, 너는 안드로마케가

도망가 준 걸 다행으로 알라는 둥, 신이 너를 위해 안드로마케를 채

간 거라는 둥- 제기랄.”

조금만 더 물어보면 하소연만 한 꾸러미 쏟아질 것 같아, 유릭은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트레비스는 대기용 의자에 쭈그리듯 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처진 어깨와 안색을 보니, 카밀턴이 드디어 안전하

게 된 지금 그 역시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것 같았다.

유릭은 그에게도 커피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칼 뷰겐트와 브

랫 키저에게도 필요한 지 물어보려고 그들을 찾았다. 그들은 서로

전혀 모른다는 듯 시선이 어긋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유릭의 시선

을 먼저 느낀 브랫 키저가 돌아보더니 지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유릭은, 그의 손이 목에 걸린 투란바코스의 십자가에 얹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브랫은 고개를 돌려, 입원실 옆에 서 있는 그레타의

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십자가 목걸이를 벗어, 그것을 손에 감고

두 손을 그레타의 양 옆에 얹었다. 그 목걸이는, 사실 둥글고

붉은 장미구슬과 은사슬로 이어진 낡은 묵주였다. 유릭은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지금 이곳에 있는 모두

에게 휴식이 필요하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 걸면서 이 암살의 배후를 밝혀 보려고 했던 카밀

턴도, 그 옆에서 덤으로 고생한 트레비스도, 몇 년 간 집요하게 니

콜라스 추기경을 실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결국 파난으로 좌천된

프리델라도, 그녀의 후임이 된 칼 뷰겐트도, 그리고 오늘 오랜 시간

죄책감과 애증의 강철 사슬로 얽혀 있던 형을 떠나보낸 브랫 키저

도. 내일 아침에 오늘 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쉬어도 괜찮을 듯 했다. 아니, 쉬어야 한다. 쉬지

않으면 더 빨리 쓰러진다. 갈증에 타는 목을 축이듯, 지금은 그저

머릿속을 하얗게 하고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좋다.

유릭은 복도끝의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끝의 창문에 다다

르자, 잠시 그 창턱에 손을 얹고 병원 현관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온통 환했다. 사람들이 새카맣게 모여, 카밀턴이 입원한 병원의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기자인 듯 보이는 사람은 이제 없

다. 아마도, 각 신문사로 벌써 돌비체 추기경이 내려 보낸 보도

지침이 도착했을 것이다. 내일 카밀턴의 암살 기도 사건은 실리지

않을 것이다.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 라는 황당한 기사가 실릴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번질 것이다. 특히나

군쪽으로 이 소문이 돌아간다면, 카밀턴이 속한 서군은 심하게 동요할 것이다.

그러고 있으니, 심장 언저리가 싸해지며 숨이 짧아지는 것이 느껴진

다. 유릭은 주머니를 뒤져 약 병을 꺼냈다. 그러나 가죽주머니에 잘

싸두었지만, 워낙에 싸움이 격해서 병은 다 깨어져 있었다. 주머니

를 털자, 알약과 유리조각이 뒤섞여 쏟아져 나왔다. 유릭은 그 중

무사한 것 한 알을 골라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창에 기대어 숨

을 골랐다. 입김에, 창이 부옇게 흐려졌다가 이내 투명해진다.......

“어이, 유리.”

조심스러운 어조였지만, 그리 해도 이 목소리는 어디에서든 선명하게

들린다. 천부다, 이건. 이 아이가 어디로 숨든, 이 목소리는 무엇으

로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유릭은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로웨나.”

로웨나는 아주 씩씩한 얼굴로 서 있었지만, 유릭은 그녀가 불안해하

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존심이 강해 언제나 아무

렇지도 않은 척 강한 척 하지만, 이 바보 녀석은 자기가 얼굴이나

눈빛으로 다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가르쳐 주

지는 않기로 했다. 말해 준다면 이 자존심 덩어리는 창피해서 다시

는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로웨나가 물었다.

“아팠어?”

유릭은 고개만 끄덕였다. 로웨나는 이제 수수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공연은 다 취소되어 버렸다. 이 소동이 있고도 공연이 계

속될 리 없고, 로웨나 역시 아버지가 체포되어 끌려간 오늘 같은 날

제정신으로 공연을 할 정도로 강심장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몰라.”

아니, 안다. 그레이브 경은 이제 어떤 방법으로도 이 함정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증인이 너무 많다. 그리고 아무리 니콜라스라도,

그레이브를 사면시켜 줄 수 없다.

...그래, 이건 함정이다. 진짜 범인은 지금 대사원의 탑 위에 누워, 브

랫 키저의 명령을 받은 경찰들이 올라와 수습해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배후는 아마도 유셀바인의 대사저나 수상궁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고. 이리 알아도, 어느 누가 그들이 범인이라 증

명할 수 있겠는가. 유릭과 브랫 키저는 알지만, 그들은 ‘수사관’의

입장이다. 진짜 증인이 필요한데, 그 어디에도 없다. (물론, 쥴리

안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로웨나가 나즈막하게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날 공손하게 말할 걸.”

“그 사람은....... 이렇게 될 줄 알아도 너에게 잘 해줄 것 같지는 않은

데.”

“중요한 건 내 마음이라고. 아버지가 나한테 뭘 어떻게 하든 상관없

어. 나한테 내가 화나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내가 나를

싫어하는 건 정말 싫어.........그리고........아무리 미워도.....그래도

아버지잖아........어, 엄마랑..... 사이가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로웨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땋은 머리카락이 지친

강아지의 꼬리처럼 축 처졌다. 유릭은 로웨나의 머리에 손을 얹어,

그 떨리는 몸을 끌어 당겼다. 그저 위로해 주고 싶었다. 위로의 말

을 건넬 수도, 이해하니 괜찮다고 말 할 수도 없기에 유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였다. 이 바보 녀석은, 진심으로 미워할 줄도 모

르면서 강한 척 하니까...... 아버지 일은 안 됐어, 같은 말을 하면 ‘흥,

그런 아버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하고 돌아가 구석진 곳

에서 혼자 울 것이다.

그러니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숨죽인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안도한 작은 고양이 아가씨는, 이제 마

음 놓고 울고 있었다. 아버지의 몰락을 슬퍼하며, 아버지의 운명을

슬퍼하며, 그렇게 동정하고 사랑하며 우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끝나는 게 차라리 행복한 거야, 로이.

유릭은 마음속으로만 그리 말해주었다. 로이, 너는 이제 마음 놓고

아버지를 사랑해도 돼. 네가 미워하던 아버지는 이제 몰락할 테니까,

너는 그를 마음껏 동정하고 사랑해도 되는 거야.

가족이란 그런 것이며, 핏줄이란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질긴 것

이다. 사랑스럽지도, 고맙지도 않아도, 그럼에도 끝끝내 이어지는

질기디 질긴 끈. 핏줄이기에 대가 없이 받을 수 있으나 대가 없이

주어야 한다. 핏줄이기에 고독의 언저리에 있을 때마저도 곁에 머물

러 주지만, 핏줄이기에 고통 받고 거듭 배반당해도 지켜주어야 한다.

핏줄은 무상의 선물인 동시에 무가치한 짐이기도 하다.

창문 너머로 제도의 불빛이 보였다. 이곳에 온 첫날, 파난의 먼지 덮

인 황야와 깊고 깊은 숲을 누비며 피와 흙먼지 범벅이 되어 구르다가

마침내 귀환하여 보게 된 차갑고 오만하며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도시의 불빛과, 지금의 불빛들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유릭은 외롭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아주 외롭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지금은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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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유리가 고생하지 않는 듯 보인다고요? 아닙니다!!

이래뵈도 6살 때부터 병석에 누운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돌보던

소, 년, 가, 장 이었습니다!!

아무리 아키 녀석이 고생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밥 굶은 적은 없

지 않습니까? 게다가 철창이 있어서 문제였지 집도 있었잖습니까.

(맞는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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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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