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85화 (85/174)

제85편

한 걸음 옆#2

*******************************************************************

“커피가 안 오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프리델라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카밀턴

은 턱을 괸 채로 그런 프리델라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녹갈색

눈이 그런 그를 흘끔 보았다.

“무슨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렇게 배고픈 개구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헤리?”

“글쎄.”

“당신 암살 건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마무리가 될 거야. 좀 더 깊

숙이 파고 들어가지 못한 건 유감이지만, 그레이브 경이라는 대어를

이렇게 깔끔하게 낚아채기도 힘들지.”

“그레이브가 얼마나 지저분한 놈인 지는 나도 알아. 하지만....... 그가

없어진다 해도, 그 후임이 또 나올 거라고. 게다가 이번 건, 너무

깔끔해. 바보가 된 기분이 들 정도로.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렇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나오다니. 속는 듯한, 듣도

보도 못한 연극에 떠밀려 출연한 듯한 기분이야.”

“그것에 대해서는 차차 조사해 봐야지. 하지만... 그레이브가 체포되

고, 그가 재판에 회부된다.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굉장히 클 거야.

돌비체 수상과 니콜라스 추기경, 그리고 그 측근들로 이루어진 철

옹성의 한 구석이 허물어 질 수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나는

큰 것은 바라지 않아. 다만, 이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약간의 희망

과 기대가 되기를 바랄 뿐이지.”

“진짜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일까.”

“그래, 어차피 그레이브는 함정에 빠진 것뿐이지. 이것이 내분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돌비체 수상과 추기경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

꾸민 것인지는 알 수 없어. 어쩌면 그레이브가 그냥 미쳐 버린 걸 수

도 있고. 사실 나도 궁금해, 아주. 일이 이렇게 될 기미는 그 어디

에도 없었으니까.”

카밀턴은 턱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밖에 있는 곰이 곰답게 눈치 못 챈 건 아니고?”

프리델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리 보여도, 바보 근사치인 당신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세심해.”

“그건 또 처음 듣는 평가로군.”

“당신은 칼과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가치를 모르는 것도 당연하

지.”

“그것 말고!!!”

그렇게 버럭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카밀턴은 폐부를 쿡 찌르는 통증

에 눈을 찌푸렸다. 드디어 마취제와 진통제의 효과가 끝나고 있었

으니, 얼굴 해쓱해 질 정도의 고통이 밀려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악, 아파죽겠어!’ 하고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프리델라가 혀를 차더니 다리를 당기며 일어났다.

“의사를 불러 주지. 주사 맞고 엄마 젖 잔뜩 먹은 아기양처럼 푹 잠

들라고.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 해. 어차피, 지금은 정리할 것도 많고

당신도 제 정신이 아니니까. 하긴, 당신이 언제 제정신이었을까.”

“프리델라.....!”

“아, 취소. 여자 꼬실 때는 아니군.”

카밀턴은 끙하니 신음을 내고는 이를 뿌득 갈았다.

“그건 그렇고, 언제 파난에서 출발...했던 거지, 리디?”

“칼 뷰겐트가 당신의 유치하고 찬란한 계획을 알리는 즉시. 나흘, 파

난 총독부의 쾌속정을 빌려서 날듯이 왔지. 방금 전에 도착한 거야.”

“왜 직접 온 거야.”

“그래야 하니까.”

카밀턴은 피식 웃었다.

“그래,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겠지. 언제나 강철로 된 악마

처럼 철저하니까.”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술주정뱅이 천사처럼 멍청하고 엉망진창이니

까, 이번에도 또 실수할 것이 분명했지.”

“........”

프리델라는 머리카락을 넘기고 문으로 돌아섰다. 카밀턴이 말했다.

“돌아 와 줄 수 없겠어?”

프리델라는 한 걸음도 더 떼지 않은 채, 문을 바라보며 그대로 서 있

었다. 카밀턴은 치밀어 오르는 쓴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돌아와 줘, 프리델라.”

“아직도 사랑하니까?”

“아마도 앞으로도 사랑할 테지.”

프리델라가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보았다. 카밀턴은 그런 그녀를 마

주보며, 역시나 쓰게 웃고 있었다. 프리델라가 말했다.

“당신, 지금 굉장히 착각하고 있는 거 알아?”

“전혀.”

“당신이 잘못해서 우리가 이혼한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당신이 사과

하고, 당신이 용서를 빌고, 내가 받아들이고 용서하면 우리가 다시

결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카밀턴은 이를 악물었다. 턱이 부서질 것 같았다. 프리델라가 말했다.

“착각하지 마, 헨리. 내가 당신을 버린 거지, 당신이 날 배신한 게 아

니야. 그러니까, 당신이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소용없어. 당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왜.....”

“리디아가 왜 죽었는지 알아?”

“사고였어.”

“사고라고 우기지 마.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잘 알고 있음

에도 모든 것을 덮고 잊은 척 모르는 척 했지. 모든 사람이 당신

말을 믿었고, 당신마저도 당신의 거짓말을 믿었어. 헨리,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리디아를 죽인 건 켈비다야. 그리고 당신 역시 그

날 죽을 뻔 했어.”

“사고야.”

“그래, 믿고 싶은 대로 믿어, 그것이 편하다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같이 살았어.”

“고통스럽게, 아주 오랫동안 같이 살았지. 그러나 다시 같이 살게 된

다면 더욱 힘들 거야. 나아 질 거라 말 할 수도 없고,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데도?”

“아무리 그리 생각해도, 그것이 진심이라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어. 그런 당신이 내 옆에 있다면, 나는 두려워 질 거야. 두려움은

삶의 힘이기도 하지만, 짐이기도 하지. 지금의 내게는 짐이야. 헤리,

나는 잃을 것 없는 상태에서 내 운명과 싸우고 싶어. 고독의

고독까지, 바닥의 바닥까지 가서 싸우고 싶어. 진다면 켈비다가 나

를 먹어치워 버리겠지만, 이긴다면.........”

“당신 역시 당신 자신을 기만하는 군. 리디, 그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없는 희망으로 날 현혹시키지 마.”

카밀턴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지쳐가고 있었다, 진실로.

“나도 두려워. 두려워도 상관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행복해 지라고. 행복해 질 수 없다면, 동굴 속 행복한 아기 곰처럼

몸이라도 편해져. 사랑의 이름으로 두려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마.

당신, 죽을 때 까지 힘들 거야.”

“당신 없이 천년을 살아도, 당신과 함께 산 하루보다는 소중하지 않

을 거야.”

“여전히 바보로군. 아이처럼.......하지만 세상에는, 혼자서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더 많아. 당신이 그렇게 되면,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게

될 거야. 나는 그건 싫어.”

프리델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 이상은 돌아보지도, 돌아오지

도 않았다. 그녀는 문에 기대고 서 있었고, 그 손은 이제 문고리에

얹혀 있었다. 카밀턴은 다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용없다. 이

런 몇 마디에 돌아설 여자였으면, 벌써 예전에 돌아섰을 것이다. 그

러나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헤리, 자책할 건 없어. 당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고, 내게 아

주 잘 해주었으니까.”

“......”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당신이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걸 알아. 더 이상 내게 잘못 했다고 하지 마....... 당신은 바보라서,

뭐든 자신이 잘못한 거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는 건 알지만 ....알

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더 이상은 그렇

게 생각하지 마.”

카밀턴은 힘없이 말했다.

“그웬돌린이 말해줬나.”

“언니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어. 그 여자가 언니의 하녀였

다는 것도, 당신과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곳에서 식사 두어번 한 게

고작이라는 것도. 그러니.....나는 그 일을 원망하지 않고, 원망해

본 적도 없어. 아니, 감사해. 그런 식으로... 내게 쏟아질 비난과 잔

인한 호기심을 돌려 준 것에,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희생하고 비난

을 감수해 준 것에 감사해.”

카밀턴은 시선을 떨구었다.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정말 조금도.

“역시.......돌아오지 않겠다는 거로군.”

“아무리 당신이 바람둥이 난봉꾼이라는 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

는 그 일 때문에 헤어진 게 아니니까.”

“완전히 끝난 건가.”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 시간과 망각을 이기고 남겨진 것이 진

실을 말해주는 법이니까. 강바닥이 마르며 자갈이 드러나듯, 그렇게

말이야.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 다면, 그래도 끝끝내 이어지는 것

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끝난 게 아니야.”

카밀턴은 이제 말없이 있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녀

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밀어 나갔고, 문은 기도 끝난

소녀의 입술처럼 담담하게 닫혔다.

카밀턴은 울고 싶은 자신을 간신히 추슬러 침대에 누웠다. 병원 앞으

로 몰려든 군중이 떠들어 대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그에

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제 희미하게 어둠을 비추던 마지막 기대마저도 꺼져버린다.

그녀는 그에게 분노하고 있지 조차 않았다. 담담하고도 무관심하게,

그리고 낯선 여인처럼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하고 가 버린 것이다.

다 알고 있어, 헤리.

그런데... 그것이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것 때문에 헤어졌

다고 믿던 그 때가, 몇 배로 행복했다.

****************************************************************

작가잡설: 카밀턴은 나쁜 놈 아닙니다;;;

오늘 늦었으니, 다음편은 내일 모레!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