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88화 (88/174)

제88편

빛 속의 그림자, 그림자 속의 빛#1

***************************************************************

얇은 구름이 벗겨지며, 푸른 하늘이 쏟아지듯 드러났다. 그 너머는

얼룩 한점 없는, 새파랗게 말간 하늘이다.

기울어진 햇살 속이라, 그 금빛 햇살에 젖은 구름 끄트머리는 금박

입힌 듯 빛난다. 터진 빛살은 집무실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고, 그

빛의 끝이 닿자 사람들은 퍼뜩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일이 끝나고 집으

로 돌아갈 생각에 마냥 행복해 지기 시작한다.

집에 특별한 일이 없어도 좋다. 굉장한 미인 아내나 요리 솜씨 좋은

남편이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드디어 퇴근하여 몇 시간 동안 직장을

떠나있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소박한 기쁨에 붕

붕 떠오르는 것이다.

유릭은 이마에 손을 얹고, 그렇게 하루를 추스르고 마감하려는 하늘

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한 기분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한방 맞아 쓰러져 있는 데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가 지나가며 ‘엄마, 거지다!’ 하고 외치는 것

같다.

유릭이 마주하는 책상 앞에는 두 시간 뒤에 정식으로 가판대에 얹힐

석간신문이 놓여 있었다. 책상 뒤의 커다란 창문 옆에, 프리델라가

늘 그렇듯 무관심한 얼굴로 제도를 바라보고 있다.

창밖 하늘은 개고 있었지만, 지금 이 안에는 푸짐하게 살찐 장마철

구름이 가득 끼어 있는 듯 했다. 칼 뷰겐트는 팔짱을 끼고 앉아,

총구 앞의 곰처럼 험악한 얼굴로 신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릭은 책상의 신문을 손끝으로 두어 번 쳤다. 그 부분에, 보일락 말

락 한 글자로 ‘그레이브 경, 자살.’ 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새벽에 인쇄된 조간신문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레이브

의 자살 건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금일 새벽, 전날 발생

한 사건의 참조인 자격으로 치안청에 머물다가 자살했다는, 도무지

인과파악이 안되는 애매한 기사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약간이나마

반정부 성향이 있는 신문들은 오늘 판매되지도 못했다. 윤전기를

돌리지도 못했다. 그저 정부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신문들만, 이렇

게 정부에서 쥐어주는 기사로 그레이브 경의 사건을 다루었을 뿐이다.

이제 곧 무언가를 알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카밀턴 경의 암살 배후

(비록 겉핥기에 끝날 지라도)를 알아내 그레이브 경의 재판과 몰락

으로 유릭의 마지막 임무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들은 단 한번

에 그 모든 기대와 예상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무력함을 느낀 적

은 많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느껴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유릭이 마침내, 그 침묵하는 모두를 대신하여 프리델라에게 물었다.

프리델라는 고개를 젖히며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이렇게 쉽게 그레이브를 버릴 줄은 몰랐어. 그것도............. 이렇게나

어리석은 방법으로 버릴 줄은 더더욱 몰랐지.”

“왜 어리석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레이브는 개지만, 충직한 개다. 모든 개들의 모범인 개. 그런 개들

의 대장을 효수한 거야. 다른 개 몇 마리는 그 자리를 차지하려 싸울

것이고, 또 몇 마리는 불안해하며 더 설칠 것이다. 행여나 자기도

그렇게 될까, 더욱 미쳐 날뛸 거야. 결론은 추기경과 돌비체의 개들,

안보위원회의 분열이다.”

“쓰레기들의 본성이지요. 개자식이란 말도 아까울, 악마의 열아홉 번

째 꼬리 같은 자식들 같으니.”

뷰겐트였다. 프리델라는 말없이 그를 볼 뿐이었고, 결국 눈치 살펴서

나와야 할 말을 꺼낸 것은 유릭이었다.

“결국, 그를 살해한 것은.............최악의 선택이라는 말이군요.”

“보호하려 노력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은 건 실수다. 정말 최악의

실수. 훗날 역사의 실수를 비웃기 좋아하는 역사가가 나타난다면

이번 일에 대해 꽤나 즐겁게 서술할 테지. 그리고.... 아마도 카밀턴도,

레반투스 대공도, 특무부의 사람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개

들이 미쳐 날뛰며 충성을 맹세하려 할 테니, 산 속의 토끼와 사슴

들이 고달파지겠지.”

그렇다면 카밀턴은, 여태까지도 괴로웠는데, 이보다 더 심해진다면

어찌 될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부상 낫는 대로, 서부 전선 복귀

하는 것이 아니라 안보 위원회 지하실의 장기 입주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임무는 실패인 건가. 유릭은 담담한 무력감을 느끼며 그리 생각

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찌 되는 걸까.

그 때, 문득 프리델라가 고개를 돌렸고, 그 시선이 유릭을 향했다. 유

릭은 그 눈에 긴장감을 느꼈다. 늘 물속의 달처럼 무관심, 무덤덤한

눈빛만을 가진 그녀였지만, 어느 순간에, 어느 시점에 그 눈길을

보내느냐에 따라 느낌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프리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기 전에, 네 전역에 대한 식민 특무부의 특별 명령이 전달되었다.”

유릭은 목안 쪽이 마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뷰겐트가 그런 유릭의 어

깨에 손을 얹었다. 그 역시 무언가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프리델라가 말했다.

“특무부 사령부는 너에게 1년의 관찰 기간을 명령했다. 네 출신 성분

과, 그동안의 네 기록들, 그리고 네 두 번의 강등 사유를 모두 고

려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더군. 그 기간 동안, 지금까지 그래왔듯

중립지역이나 자유지역을 제한 해외 출국은 금지된다. 군에 있는

것을 제한 그 어떤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것도 금지된다. 물론 식

민지와 본국을 오고가는 것은 괜찮다.”

“.......”

어깨의 힘이 탁 풀리고, 긴장감 역시 사라진다. 예상했던 일이었고,

그만큼 제발 아니기를 바랬던 일이기도 했다. 뷰겐트도 나른히 한

숨을 내 쉬었다.

“결국- 이건 제 마지막 임무가 될 수 없게 된 거군요. 다행입니다.

특무부에서의 마지막 임무가 실패가 아니라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아주 많겠네요.”

“너는 이번 임무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일이 이리된 것은 네

책임이 아니고, 아마도 네가 없었으면 더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 그

점에 있어서만은 자부심을 느껴라. 그러니...... 약속했던 보상은

다 주어질 거야.”

“네?”

“보상금은 물론이요, 네 동생이 깨끗하게 면제될 수 있도록 해 주겠

다. 내가 못하면 헨리가 알아서 해 줄 것이고, 안하겠다면 걷어차

서라도 그리하게 해 주지. 어쨌건, 미안하다.”

미안하다- 라는 말 한마디가, 프리델라의 딱딱한 어투에 미약한 온

기를 불어 넣었다.

유릭은 미묘하게 웃었다.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실망인지, 만족

인지 모를 일이다. 억지로 나간 맞선 자리에 영 아닌 사람이 나온

것처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기색을 표하기도

곤란한, 그런 상황이다.

“괜찮습니다. 예...상은 했던 일이니, 정말 괜찮습니다.”

“휴가를 주겠다.”

“네?”

프리델라는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한 봉투 하나를 꺼내어

유릭의 앞에 놓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깨끗한 흰 봉투였다.

“내일 오후 2시에 식민지로 출발하는 배표다. 이그리테스 항에서 내

려 군전용선으로 바꾸어 타, 쾌속으로 파난으로 가라. 나 역시 최

대한 빨리 갈 거야. 내가 이곳에 오래 지체하면 지체할 수록 위험해

지니 당연한 일이니. 너 역시, 최대한 빨리 제도를 떠나는 것이 좋

아. 방금 말했듯이, 사냥개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너 같은 사

냥감을 놓칠 리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부터

24시간의 휴가를 주겠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일 테고, 이곳에서

한달 반 머무는 동안 아는 사람도 생겼을 테니.......인사 정도는 해라.”

“감사합니다.”

유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상위의 봉투를 집어 들고 자

리에서 일어났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뷰겐트의 집무실을 나서니, 역시나 뷰겐트가 따

라 나왔다. 유릭은 담담하게 그를 돌아보며, 늘 그렇듯 웃었다. 그런

유릭을 보는 뷰겐트의 눈이 어두워지더니, 그의 머리를 두툼한

손으로 헝클어 놓았다.

“안셀의 푸른 폭풍, 그 주먹에 쥐어진 흰 배처럼, 네 속 뒤집어 지고

있다는 거 안다. 늙은 선장의 떨리는 손만큼 무력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유릭, 그래도...........”

“제게 희망 같은 건 없습니다.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도, 이미 오래

전에 버렸습니다. 하려해도 무력하군요. 지키려 해도, 그래도 세상은

제게 배덕과 절망을 요구하는 군요. 하지만........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부딪힐 때마다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언제쯤 세

상이 저를 놓아줄까요. 아니, 영영 놓아주지 않을 테지요. 압니다.....

아니까, 그러니까 저는 아직은 괜찮습니다.”

“.........”

뷰겐트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유릭은 고개를 젓고는, 그에

게 손을 내밀었다.

“제도에서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부탁드리겠습니다.”

“요청할 지도 모른다.”

“네?”

뷰겐트는 그의 손을 후려쳤다. 유릭은 그대로 팔이 부러져 나갈 뻔

했다. 신음을 삼키며 팔목을 쥐는데, 뷰겐트가 말했다.

“의무복무기간은 끝난다. 그럼으로써, 너는 제국 안의 그 어디에서도

복무할 수 있게 된다. 이제부터는 제국 식민 특무부가 아닌, 제국

특무부 소속. 그러니........ 아마도, 이제부터는 제도에서 근무하게 될

지도 모른다.”

“......”

“네 동생은........ 제도로 유학 올 정도로 공부 잘 하잖아. 전입시켜.

그리고 이제부터는 둘이 같이 지내라고. 군인 아파트 같은 거 알아봐

줄 테니, 걱정 마라.”

그리고 뷰겐트는 끄흠, 하고 신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세상에 너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이렇게 태어난 이상 반드시 가야

하는 고달픈 가시길,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는 마녀의 자식들처럼

똘똘 뭉쳐야 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너 혼자이되, 혼자인 것만

도 아니야.”

유릭은 웃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곰처럼 거대한 옛 상관이자 스

승을 안았다. 뷰겐트의 얼굴이 벌개지더니, 큼큼-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

작가잡설: 어, 참;; 거이.....거시기...............뷰겐트는 응큼쟁이~~!!!

난 몰라!

아직 길은 많이도 남았고,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군요.

참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한 지점만 바라봤다

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인 걸까요, 아니면 이제서야

알았으니 바보같은 걸까요. 애매한 나날들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