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89화 (89/174)

제89편

빛 속의 그림자, 그림자 속의 빛#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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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델라가 준 봉투 안에는, 배표 외에도 10카스티야 가량의 돈도 들

어 있었다. 잠시 그 돈을 내려다보던 유릭은, 특무부 건물 정문을

나서자마자 마차를 불렀다.

“슬랍 가로 가 주십시오.”

그러자 늙은 마부의 눈이 유릭을 아래위로 훑었다. 눈빛을 보니, 무

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잠시 뒤, 마부는 딱딱한 목소리로

이리 말했다.

“거기는 길이 좁아서 마차가 못 들어가.”

“아, 괜찮습니다. 입구에서라도 멈추어 주세요.”

“타.”

타면 죽이겠다고 말하는 마부라고 생각하며 유릭은 마차에 탔다. 그

리고 오후 햇살 따스하게 들어오는 그 마차에 앉아, 이제 해 저무는

노곤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유프렌 가, 정부기관이 많이 들어찬 이 거리의 저녁은 우울한 노파

같은 분위기다. 유릭은 담배 한대를 물었다. 마부가, 아직 소년티

가시지도 않은 유릭이 담배를 뻑뻑 피워대니 고얀 것, 비슷한 눈초리

를 보냈다.

연기가 퍼지는 창 너머로 거리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거대한 정부

청사들이 사라지고, 잠시 뒤에 상가와 사무실들이 들어찬 거리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분주해지고, 마차들도 많아진다. 얼마 지나자, 이

제 길고 긴 그림자들에 뒤덮인 주택가가 나타난다. 가로수가 길게

늘어진 길로, 아이의 손을 잡고 저녁을 위해 집으로 들어가는 부

인들과 학교에서 돌아오는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보인다. 유릭은 담

배를 창밖으로 던졌다. 어느덧 마차는 좁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

트가 빽빽하게 들어찬 곳으로 비껴가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다른

이들보다 더욱 지쳐 있었다. 반항하는 가난한 소년 같은 그곳은, 어

둠 덮이는 곳 중에 가장 어두운 곳에 웅크려 헤어진 코트와 누덕진

바지를 입고 음울한 눈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유릭은 좁고 후미진 골목 앞에 마차를 세우고, 값을 지불한 후에 골

목길로 들어섰다.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 그림자가 손짓하듯 어깨위로

늘어졌다. 오물과 빗물에 얼룩진 벽이, 그를 음침하게 응시하고 있다.

아이들 떼가 우르르 달려갔고, 그 중 덩치 큰 아이 하나가 유릭을

퍽 치고는 사과도 없이 골목 끝으로 내달렸다. 유릭은 어깨의 먼

지를 털며, 남루한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악스런 욕설이

그들 사이에서 오고갔다. 크면, 아마도 이 골목길을 누비는 터프한

사내들이 되거나 그들에게 집값이나 자릿세를 내는 힘없는 가장들이 되리라.

유릭은 걷다가, 주변이 참을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지자 달리기 시작

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길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조차 하지 않

으며 거침없이 달렸다.

낯익은 아파트 앞에 도착한 것은 해가 저문 뒤였다. 그 좁은 계단으

로 뛰어들어, 유릭은 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 꼭대기

층의 문중 하나를 두드렸다. 아무 답도 없었다. 이름을 불러 볼까,

했지만 왠지 싫게 느껴진다.

“젠장!”

아무도 없으니, 유릭은 마음 놓고 험악하게 외쳤다. 머리카락 속으로

양 손을 밀어 넣으며, 그러며 울분이 터지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제기랄!”

이미 갈라진 목소리였다. 다시 이를 악물었을 때, 턱이 부서질 듯 아

파왔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러 벽을 후려치고, 다시 후려쳤다.

관절이 긁히며 쓰려왔다. 다시 후려쳤을 때, 벽에 피가 튀었다.

“개자식들!”

유릭은 벽에 이마를 기댔다. 차디찬 벽이 이마를 쓸었다. 벽을 짚으

며, 고개는 더 깊이 숙이며 뇌까렸다.

“개자식들.........!”

성난 이리처럼 으르렁거리며, 그러며 유릭은 한 번 더 벽을 후려치

고는 숨을 골랐다.

후미진 빈민가, 옛 성 보다 더욱 낡은 듯 영락한 아파트에서, 유릭은

어느 샌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

각이 스쳐지나가고, 잡지 못한 채 흘려보내다 보니 이제 입엔 담배

가 물려 있었다. 담배연기가 좁은 복도에 가득 찼다. 밖에서 사람

패 죽이는 소리가 나도 들여다보지도 않는데 익숙해진 이 영락한 뒷

골목의 주민들은, 단 한번도 나오지도 주의를 주지도 않았다. 어두운

복도로, 문틈으로 스며 나온 빛이 비껴드는데도, 그럼에도 그들은

나오지 않는다.

유릭은 웃었다. 어떤 웃음이었을 지, 그 누구 앞에서도 이렇게 웃어

본 적 없으며 이렇게 웃을 때 거울 한번 들여다 본 적이 없기에 모

르겠다....

그러며 유릭은 고개를 젖히다가, 그를 내려다보는 소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한 손에는 식료품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과 검은 편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여어, 늦게 오네.”

로웨나는 말없이 유릭의 발치에 신문을 던지고, 열쇠꾸러미를 꺼내어

문에 꽂았다.

“알고 온 거지?”

“뭘?”

“아버지 일.”

왠지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이 미안해져서, 유릭은 반도 안 핀 담배를

빼 바닥에 비벼 껐다. 로웨나가 검은 봉투를 흔들었다.

“어제 일이 끝난 뒤에 트레비스 씨 댁에 있었어. 오후에 집으로 돌아

가려는데...... 이게 오더라. 그 여자가 보낸 거야.”

그 여자, 라면 아마도 그레이브 경의 지금 아내를 말하는 걸 테지.

로웨나가 말했다.

“장례식은 3일 뒤래. 얼씬할 생각도 말라신다.”

“혹시, 귀찮게 하는 사람은 없어?”

로웨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손을 썼는지, 다른 사람 일이었다면 벌써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을 텐데....... 한 사람도 안 오더라. 정말 얼씬도 안 해. 그

여자 덕이지. 소문내기 좋아하는 여자인 만큼, 어떻게 해야 소문

이 안 나는 지 잘 알고 어떤 방식으로 소문이 퍼지는 지도 잘 아는

여자야. 다 막았어. 덕택에 편해서 다행이야. 게다가, 어차피 장례식

은 갈 생각도 없었어.”

그리고 로웨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다시 나왔

다. 유릭은 여전히 앉아 있었다. 로웨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 들어 올 거야? 당장 안 들어오면 문 잠가 버릴 거라고.”

유릭은 로웨나의 눈가를 가리켰다.

“여기 눈물 다 안 닦았어. 코도 빨갛다, 너.”

로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꾹 물고 있다가 눈물

을 훔쳤을 뿐이다. 유릭은 고개를 돌렸고, 역시나 그제야 로웨나는

조금 훌쩍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바보, 제대로 미

워하지도 냉정해 지지도 못하는 주제에 강한 척 하기는.

“미하일은 없어?”

“곧 들어 올 거야. 맨날 바쁘지, 그 녀석은.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없어.”

유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웨나는 그가 안으로 들어오려는 줄 알

고 비켜섰지만, 유릭은 벽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말했다.

“나, 내일 식민지로 돌아가.”

로웨나는 잠시 멍하게 유릭을 바라보았다. 흠뻑 젖은 큰 눈이 그렇게

빤히 보고 있으니, 유릭은 기분이 묘했다. 결국 눈길을 돌리며 웃

었다. 어색하게 보였을 것이다.

“일이 급하게 되었어. 머뭇거리다가는.........위험해 질 것 같다고 해

서. 내일 오후 2시 배야.”

“잘 가. 그 동안.... 뭐, 썩 좋은 일만 있었다고 하기는 곤란하지

만.........그래도, 뭐......”

유릭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은 보지 않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은 계속 샘솟아 흐르고 있었기에, 결국 손끝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잠시 그렇게 있었다. 한시도 조용할 날 없는 슬

랍 가, 그리고 지금도 그렇건만 유릭에게는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한달 쯤 뒤에 다시 돌아올 지도 몰라. 더 걸릴 지도 모르지만.......그

때.... 내 의무복무 기간이 공식적으로 끝나고, 식민지 외에서도 근

무할 수 있게 돼. 그리고...... 아마도 여기로 발령 받을 것 같아. 할

일이 생겼거든.”

잠시 훌쩍거림이 멈추었다.

“바쁠 테지만............ 그래도 가끔 찾아 올 수는 있을 거다. 아마도,

네 공연을 보러 올 수도 있을 테지. 리자베따 씨 네에도.........여자

만나러 거기 가는 놈은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을 것 같네.”

순간 로웨나가 유릭의 무릎을 발로 퍽 찼다. 여자 발이었건만, 단단

한 구두코로 맞으니 눈물 쏙 빠지게 아팠다.

“나쁜 놈아, 그런 말은 좀 더 일찍 해 주는 거야! 뭐야, 정말! 사람

철렁하게 만들어 놓고! 가지고 논 거지! 그렇지! 나쁜 놈, 정말 나쁜

놈! 미하일보다 더 나쁜 놈!”

원래 그 순서로 하는 게 정상인데, 어쩌고 해 봐야 소용없을 듯해서

유릭은 그녀가 차고 때리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한참을 두들겨

팬 로웨나는, 성난 고양이처럼 씩씩대며 집 안을 가리켰다.

“얼른 들어오기나 해!”

“아, 저기.......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건데.”

“뭐야!”

“내일 오후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그러니....... 예전에 아버지와 살던

곳에 잠시 들러 보고 싶어. 그러니까.. 아버지가 체포될 때까지 있던

집.”

“거기는 왜?”

“그냥..... 여기까지 왔는데, 들여다보지도 않고 가는 것도 서운해서.

어차피 하루밖에 없으니까.....하지만 6살 때 나와서, 기억나는 게

거의 없어.”

“뭐뭐 기억하고 있는데?”

“벚나무가 아주 많았던 것 같아. 그리고........ 집이 아주 많았는데, 대

부분이 붉은 벽돌에 갈색 지붕을 얹고 있었지. 커다란 분수대와 회색

돌로 된 사원이 있는 광장이 있고, 그곳에......... 휴일이 되면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왔다. 크게 기억나는 건 없는데,

분수대에..... 잉어와 여자가 있었던 것 같아.”

“성 브류넬라의 상이겠네. 다산과 풍요의 성자니까, 잉어와 함께 있

지.”

“근방에.... 일리본느 대학이 있었어. 아버지가...... 강의를 나가시던

곳인데, 그러니까 정식 교수는 아니었지만.....”

“테레즈 가, 아마도 1가 나 2가 쯤 되겠구나. 너희집이 중산층 가정

이었다면 거기서 살았을 거야. 사원이나 광장 근방, 그것도 그 거

리를 지키는 성자의 상이 근방에 있었다면 그럴 테지....... 집이 어

딘 지는 알아?”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웨나는 문 밖으로 나오더니, 현관문을 잠

갔다. 그리고 열쇠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다음, 유릭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같이 가줄게. 촌놈이 제대로 길 찾아 가기나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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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로웨나, 연전연승! (뭐가?)

다음 편은 내일 모......가 아니라, 3일 후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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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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