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90화 (90/174)

제90편

빛 속의 그림자, 그림자 속의 빛#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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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랍 가에서 로웨나가 말한 테레즈 가 까지는, 마차로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혹시나 잘못 온 가는 건 아닌가, 내내 생각 했던 유릭은, 마차에 내

리는 순간 12년 만에 고향의 거리로 돌아오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나 멀리 있을 것 같았던 그곳은, 제도에 지내던 기간 내내 바

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광장의 분수대에 내리자, 유릭은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어디로 어떻

게 가야 하는 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오래된 상자를 연 듯,

모든 것이 그 안에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다.

아주 어린 시절, 어느 봄볕 따스하던 날 어머니가 동네 아이들과 노

는 아들을 지켜보던 벤치도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털이 아주 긴 암캐

릴리와 함께 산책 나오던 공원도 그대로였고, 한 여름 목마를 때

목을 축이던 식수대도 그대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정하게 웃

음을 주고받으며 속삭이던 노천카페도 낡았지만 그 장소에 그대로 있

었고, 몰래 올라갔다가 크게 혼났던 큰 나무 역시 그대로였다.

“맞니?”

로웨나가 그리 물었지만 유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릴리와 함께 앉아 있던 벤치에 앉았다.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뜨

거운 한숨과 함께 그는 이곳이 그의 고향임을 긍정했다.

12 년 만에 찾아온 고향인 것이다. 6살 아이의 몸으로 내몰려, 12년

간 멀고 먼 식민지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겪고, 그 시절의 어른들

이나 친구들 중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자라나 이렇게 앉

아 있는 것이다.

로웨나가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집은 찾아갈 수 있어?”

유릭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린 듯이 기억한다. 그 피 뿌린 듯 붉은 저녁노을과, 행군하듯 하늘

을 가로지르던 묵직한 구름들을. 온 도시를 음침하게 장악했던 군

대와, 어느 날 밤에 누가 급습할지 몰라 오들 오들 떨던 나날들.

돌비체 수상이 선포한 두 번째 계엄령이 제도와 제국을 그물처럼 덮

치던 날, 유릭도 아버지도 그날의 공포에 얽매여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영광의 시기, 안정과 번영의 시기. 그러나 식민지의 어둠과 이 도시

에 고인 빈곤의 어둠이 빚어낸 황금으로 이 도시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죽은 사람들이 이 도시의 망령이 되어 떠돌고 있건만,

먼 유형지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망령은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오

지 못하고 헤매건만,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때 찍힌 낙인

에서 벗어나지 못하건만, 이 도시의 빛나는 영광은 그 어둠을 황금

빛 옷자락으로 가려버린다.

유릭은 끌린 듯이 일어나, 광장 중앙의 거리로 들어섰다. 아직 불 켜

진 상가를 가로질러, 계속 걸었다. 로웨나가 그 뒤를 따라왔다. 유

릭은 잠시 멈춰 로웨나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달리기 시작했다.

분명 12년이었지만, 그것은 도시 변두리 주택가를 완전히 바꿔버릴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저 빈 공터에 집이 들어선 것 정도의

변화밖에는 없었고, 그 때 있던 집들은 지금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낡은 그네와 아담한 테라스, 커다란 벚나무가 자라 창문을

덮은 집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유릭은 한참이나 그 집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그대로, 그저 조금

낡아 있을 뿐이다. 사진이 낡아가듯, 유리에 먼지가 끼며 흐려지듯,

그렇게 같지만 다른 것이 그곳에 서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실내의 빛이 어두운 마당으로 쏟아지며, 그 안에서

이 집의 주부인 듯 보이는 낯선 여자가 나타났다. 유릭은 거실로

향하는 창으로 집 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모인 일가가 그 집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릭을 경계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금발 머리를 묶은 계집아이 하나가 있고, 유릭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갈색 머리 통통한 소년도 있었다. 가장인 듯 보이는 건장한 남자

가 파이프를 물고 유릭을 보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체구 좋은 노인

이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이

남자와 노인이 두던 것 같다.

부인이 물었다.

“누구시죠?”

유릭은 머뭇거리다 작게 말했다.

“예전에.... 이 집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자 부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저희는 이곳에서 10년 넘게 살았답니다.”

“그 전에 살았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순간 부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거실의 남자가 현관 쪽으로 와서 부

인 옆에 서더니, 그녀에게 안으로 들어가라 말하고 자신이 대신 남

았다. 유릭이 말했다.

“혹시...”

그러나 남자가 먼저 물었다.

“혹시, 예전에 이 집에 살다가 체포되었던 그 사람의 아들인거요, 청

년?”

“맞습니다.”

“가시오.”

“바로 이사 오셨습니까?”

“가시오.”

“집은 몰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이 집을 얻게 되

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남아 있던 것이 없었습니까? 사진이

라든가, 책이라든가........”

남자의 얼굴이 뻣뻣해졌다. 유릭이 다시 말했다.

“아니, 아주 사소하고 작은 거라도 좋습니다. 남겨 놓으신 것이 있다

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사면되었소?”

“파난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아들입니다.”

남자는 유릭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턱을 문지르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왔을 때는....... 가구 정도를 제하고는 모두 몰수

해 간 뒤였소. 심지어 장식품도 남겨 놓지 않고 가져갔더군. 아무

것도 없었소. 텅텅 비어 있었지. 그러니 어서 가시오.”

유릭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거실의 창문이 열려 있었고,

노인이 테라스에서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유릭이 그를 바라

보자, 노인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 보게, 젊은이.”

그리고 노인이 집 안으로 사라졌다. 부인이 놀라서 외쳤다.

“아버지! 세상에, 그 사람은 정치범이었다고요! 제가 아무 것도 남겨

놓지 말고 태워 버리라고 했잖아요! 우리도 잡혀 간다고요! 아버지!

제발!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요, 그냥! 아무 것도 없다고요!”

상황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리 없다.

유릭의 아버지 딜버스 크로반이 정치범으로 잡혀갔으니, 그 사적인

물건들은 이 집에 새로 이사 오게 된 이 가족이 긁어다 태워 버린

것이다. 행여나 간직하고 있다가 발각되면 공범으로 잡혀갈 수도 있

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원망할 수 없다. 이곳의 상황이란 것이

늘 그러하니.

그러나 노인은 며느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잠시 뒤, 그 노인이 내려

왔다. 그의 손에 낡은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노인은 현관으로

나와, 유릭에게 그 사진을 건네주었다.

“가지고 가게.”

유릭은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와 그의 사진이었다. 기숙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방학 때를 제하고는 만나지 못하게 될 거라 생각하고

찍었던 사진이다. 아버지는 유릭에게 새옷을 입히고, 머리도 단

정하게 빗긴 뒤에 사진관으로 가서 이 사진을 찍었다.

그 안에는 12 년 전의 유릭이 있었다. 반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몰랐던, 그저 드디어 아들이 학생이 된 것에 들떠있던 평범한

아버지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안과 기대에 가득했던 유릭이 있었다.

노인이 유릭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힘내서 살게나.”

“감사....합니다.”

“아니, 이 사진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고, 그래서 오히려 고맙네. 이

건 내가 여태 했던 일 중 가장 용감한 일이었고, 아마도 가장 좋은

일이 될 것 같군. 잘 가라고.”

그렇게 말하고 노인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며느리가 노인을 급히 안

으로 들어오게 하고 문을 닫더니, 거실의 창문도 닫고 커튼도 내

렸다. 로웨나의 손이 팔에 닿았다. 그 손이 유릭의 팔을 당기며 조용

히 이끌었고, 유릭은 그 손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길옆의 벤치에 앉았다.

로웨나가 사진을 보며 물었다.

“동생은 없네?”

그러나 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벤치의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푸릇한 달빛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웨나는 그가 울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눈은 늘 그러하듯 차갑고

투명했다. 빛깔 진한 수정, 바다처럼 짙고도 차가운 푸른빛 수정

같은 그런 눈으로. 처음 봤을 때, 늘 미소 지으며 상냥하게 대해주지

만 그 눈만은 늘 차가웠다. 언제나 한걸음 뒤, 언제나 다른 세상에

있는 듯, 그렇게 차가웠다. 그래서 로웨나는 그의 상냥함도, 친절함도

믿지 않았다. 로웨나에게 호감이 있거나 좋아해서 그런 거라 생각

할 수 없었다. 그 앞에 누가 있든 똑같이 해 줄 사람이라 생각했다.

유릭이 말했다.

“버둥댔지, 늘.”

“응?”

로웨나는 당황했다.

“행복해 지고 싶었지......하지만 아무 것도 날 놓아주지 않더라. 과거

도, 현재도, 미래도.”

“벗어나서 뭘 하고 싶은 건데?”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허우적거리다 보면, 언제나........... 허리까지 어둠에

묻혀 있고 이 두 손은 피에 젖어 있지. 밝은 곳으로 가고 싶은데,

아무도 그 곳에서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아. 그저 어둠만이 내 옆에

있지. 먼 옛날, 그날부터 시작되어 온 어둠이.....나를 놓아주지 않아.

아니, 내가 처음부터 그 어둠에 속해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로웨나는 충고해주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 말해주지도, 힘내라고 말

해주지도 않았다. 그의 차가운 손 위에 손을 얹으며, 그러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뿐이었다. 유릭은 그녀의 손등에 다른 손을 얹어,

그 손을 떼었다. 로웨나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부끄럽고 쑥

스러웠다.

유릭이 말했다.

“같이 와 줘서 고마워.”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였으면........ 또 엉망진창이었을 걸.”

“엉망진창?”

“파난에서...........주기적으로 사고 쳤거든, 나란 녀석. 탈영만 두 번이

다.”

군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로웨나는 탈영이 얼마나 중죄인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뭐, 크게 잘못한 거구나- 그리만 생각했다(그녀가

생각하는 건 ‘기숙사에서 도망치면 매우 혼난다’ 정도였다).

유릭은 벤치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바래다줄게.”

로웨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자 유릭이 웃었고, 로웨나는

지금 그의 눈빛이 조금은 따스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인지 그리 믿고 싶어 그리 보이는 것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어둠 젖은 푸른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 그 눈빛이 조

금은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가 손을 당겼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로웨나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긴 채 걸어갔다. 마차를 잡고,

그 마차에 타고, 슬랍 가로 돌아오는 내내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웨나는 멍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텅텅 빈 듯 해서, 아무 생각도 나

지 않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로웨나가 집 안으로 들어오라 말했지만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헤어지자. 그리고.....아직 아무 말 못해서 미안한데......... 아

버지 일은 안 됐어.”

로웨나는 힘없이 웃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집

안 사정을 잘 아는 미하일이라면 안 됐다는 말조차 하지 않을 것

이다. 그러나 유릭은 상황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로웨나의 진심 역

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말에 씁쓸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고마웠고, 고마워하는 자신에게 안쓰러움을 느꼈기에 그렇게 웃

은 것이다.

유릭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고양이 여왕님.”

그리고 그는 돌아서 어두운 골목길을 향했다. 로웨나는 아파트 현관

에 기대어 한참이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그리고 어디에서 올지 알 수 없는 까마귀 임금님은, 왔을

때 그러했듯 갈 때도 그리 훌쩍 날아가 버렸다. 노을의 저편, 메마

른 황야의 지평선 너머, 앙상한 가지를 넘어 멀리 멀리 날아간다.

어둠이 그의 모습을 지우자, 로웨나는 아랫입술을 꾹 물며 돌아섰다.

문을 여니, 역시나 카밀턴은 트레비스와 함께 카드놀이 중이었다.

유릭이 한 시간 만에 깨닫게 된 것은, 지금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입원한 카밀턴 경의 침대 옆뿐이라는 것이다. 남은 돈은 나중에 가

토의 학비에 보태기로 하고, 유릭은 느긋하게 카밀턴 경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건 신분증을 보이는 것만으로

간단히 해결되었고, 잠시 브랫 키저가 기도를 올렸던 그레타 상

앞에 머물렀다가 기도 없이 지나쳤다. 그레타도 몇 년 간 그녀를 쳐

다보지도 않던 소년의 기도를 들으면 꽤나 짜증낼 것이다.

카밀턴의 병실 앞을 지키는 정장 차림의 건장한 남자가 유릭이 나타

나자마자 일어났으나, 유릭의 얼굴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무십니까?”

그러나, 그리 묻자마자 안에서 “젠장, 나는 환자라고! 좀 봐 주면

안돼!” 라고 외치는 카밀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주무시는 군요.”

“아마도 밤새실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기록적인 속도로 돈을 잃고 있을 것이다. 트레비스가 카밀

턴이 주먹으로 짓눌러 기를 쓰고 사수하려는 지폐를 손끝으로 집었다.

“구차하게 굴지 말고, 내 놓게나.”

“자네는 양심도 없어? 지금 자네는 자그마치 35카스티야를 털어 갔다고!”

“나는 자네 덕에 죽을 뻔 했어. 그것도 자네의 그 멍청한 팔이 내 팔

을 놓치는 바람에 말이야. 생각 같아서는 1만 카스티야라도 청구하고

싶다고!”

그리고 트레비스는 카밀턴이 가련할 정도로 힘주어 누르고 있는 마지

막 지폐마저 빼갔다. 카밀턴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후려치고 허리를

폈다. 저 상태로 나가면 사흘 만에 펄펄 날아다니겠다, 하고 생각하

며 유릭은 문을 닫았다. 그제야 유릭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된 카밀턴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크로반 하사. 언제 온 건가.”

“방금 전에요. 오늘 밤 여기서 지내도 될까요?”

“물론 괜찮지. 그런데......”

그리고 카밀턴은 간절한 눈으로 유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 당

장 트레비스와 한판 붙어서 잃은 돈을 다시 되찾아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레비스를 보니, 내가 그냥 10카스티야 정도 줄 테니 이

놈 부탁 같은 거 들어주지 말라고, 하고 말하듯 웃고 있었다.

유릭은 지난번에는 카밀턴 편에 섰으니, 이번에는 트레비스의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즉, 카밀턴의 처량한 눈길을 무시했다).

“내일 떠나게 됐습니다.”

카밀턴이 막 입에 대려던 파이프를 떨어뜨렸다. 유릭은 그의 얼굴이

‘자네가 떠나면, 이제부터 난 어떻게 살라고!!’라는 표정으로 보이

는 건, 제발 자신의 착각이기를 바랬다.

“그, 그거 무슨 말인가? 벌써 간다니.”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칼 뷰겐트

님이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 곰돌이가 참 잘도 설명해 주겠군.”

카밀턴은 투덜대며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 들였다. 유릭은

그에게 다가가, 그 파이프를 뽑았다.

“병실에서는 금연입니다.”

카밀턴은 사탕 뺐긴 아이 같은 구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유릭은

그것을 트레비스에게 넘겼다. 트레비스는 히죽 웃으며 그 파이프를 흔

든 다음 앞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럼 파난에서 근무를 마치겠군. 미리 제대 축하하네.”

“못하게 되었습니다.”

“응?”

“최소 1년, 아니면 꽤 오랫동안 군에 있게 되었습니다. 특무부 총사

령부에서 제게 1년의 관찰기간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끝나면 연장하겠고.”

“그것이 끝나면 또 연장되겠지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군에 대해 잘 모르는 트레비스도, 둘의 대화만

으로 분위기를 대강 알아챌 수 있었다. 카밀턴은 무표정했지만, 트레비

스는 그래도 연신 턱을 문지르며 어찌 말해야 할지 곤혹스러워했다.

카밀턴이 트레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트레비스는 별 수 없이 파이프를

돌려주어야 했다. 카밀턴은 유릭에게 좀 봐줘, 하고 작게 말하고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잠시 파이프를 빨아들이고 내 쉬고, 다시 빨아 들였다.

병실 안은 금세 담배연기로 가득 찼다. 카밀턴이 물었다.

“이리 될 줄, 전혀 모르고 있었나.”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한번에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

을 가지기는 했었지요.”

“버리지 말게나.”

“네?”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구원을 포기하지도 말고, 노력하는 것도 포기하

지 마.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네.”

카밀턴은 고개를 숙였다. 연기는 가느다란 실처럼 파이프에서 빠져나와 흩

어지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콧잔등을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 내가 말했지. 희망은....... 절망에 지친 자의 마지막 고문

같은 거라고. 하지만 자신을 구원할 자는 자기 자신 밖에 없네. 자기 자

신이 자신을 구원하기를 포기한다면, 그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아.

그리고........ 그리 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으면,

더 나빠지는 것 밖에는 남지 않아. 하사, 자네는 아직 젊어. 앞으로 좋은 일

만 생길 거라 말하지는 않겠네. 편해 질 거라 말하지도 않겠어. 하지만, 적

어도 포기하지는 마.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네. 더 좋아질 수도 나빠

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해 주게나. 몇 주, 자네와

같이 지낸 시간은 정말 짧았지만........ 한 번 더 자네를 믿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믿을 거야. 지난 한달 간, 자네는 그렇게 세상

을 변하게 했네.”

유릭은 빙그레 웃었다. 카밀턴이 멋쩍어하며 고개를 돌렸고, 트레비스는

그런 그를 아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어라, 너 언제 철들었냐? 라

는 눈빛이었다.

“감사합니다.”

유릭은 트레비스 앞에 앉았다. 대체 뭘 하려는 건가, 하고 트레비스가 바

라보자 유릭은 카드를 모아 섞기 시작했다.

“한판 하죠, 트레비스 씨. 딱 35카스티야만 따면 그만두겠습니다.”

트레비스가 끄흠, 하고 신음을 토해냈고 카밀턴이 “좋았어!” 하고 작게

외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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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아키나 라닌보다 작업수완이 좋은 유리 군. -_-;

하긴, 공주나 아낙보다야 메이드가 더 프로페셔널한 것은 당연한 일!

오타 수정;;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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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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