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91화 (91/174)

제91편

빛 속의 그림자, 그림자 속의 빛#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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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웨나에게 붉은 장미 한 다발이 배달된 것은 1시 즈음이었다. 그녀

에게 확인 서명을 받은 직원은 오늘 아침에 주문이 들어왔었다는

말과 함께, 그 꽃을 주문한 사람이 훤칠한 청년이었다고 슬쩍 귀띔

해 주었다.

로웨나는 촉촉하게 젖어 있는 붉은 장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저

붉은 장미인 것이 아니다. 꽃잎 깊은 곳은 금가루를 심은 듯이 반

짝이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피처럼 붉어진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는

불에 그슬린 듯 조심스레 말려, 예쁘게 다듬은 치마 레이스처럼

보였다. 꽃에 대해 잘 아는(예전에 꽃집 아르바이트를 했으므로)

로웨나는, 그 빛깔과 꽃잎 모양으로 크로 도비농라는 최고급 품종

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초록색 잎사귀는 방금 딴 듯 신선

했으며, 다발을 감싼 아마포와 리본은 그냥 버리기 아까울 고급품

이었다. 아무리 싸게 잡아도 10카스티야는 가뿐히 넘어갈, 로웨나로

서는 꽃‘따위’에 그 정도 돈을 썼다는 것 자체에 우울함을 느낄만

한 선물이었다(한달 방세가 아닌가. 이럴 돈 있으면 그냥 현금으로 줄 것이지.).

“야, 그거 뭐냐?”

어제 저녁에 아르바이트인지 뭔지를 한다고 거의 자정이 되어 나타났

던 미하일이, 이제 간신히 잠에서 깨어 배를 북북 긁으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 장미꽃을 보게 되자, 입을 딱 벌렸다.

“야, 너 최근에 부자 남자라도 사귀게 된 거냐? 세상에나, 이거 엄청

나게 비싼 거잖아! 가만, 아니지, 아니지. 너 혹시.......한량 클럽 신

사라도 만나는 거 아냐? 하긴, 그 부잣집 놈팡이들이라면 이런 꽃에

쓸데없이 돈 뿌려대고도 남지!”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로웨나는 턱을 휙 돌리고는, 그 꽃을 침실로 가져갔다. 미하일이 당

장에 따라붙었다.

“상관 할 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솔직히 말해, 대체 어느 놈이야?

정신 멀쩡하게 박힌 놈이, 이런 선물을 할 리가 없잖아, 할 리가.”

그리고 미하일은 꽃을 빼앗았다. 로웨나가 이를 드러내며 다시 빼앗

았고, 미하일이 손을 뻗자 그 손등을 콱 깨물었다.

“으아아악! 야, 로이!”

로웨나는 악물었던 입을 벌리고 꽃을 가지고 침대로 갔다. 꽃을 그

위에 놓은 후에, 거울 앞으로 가서 대강 땋아 내린 머리를 살폈다.

그레이브 경의 일을 알고 있는 트레비스가 오늘 내일 이틀간 푹

쉬라고 했기에 극장에는 가지 않아도 된다.

“너, 갑자기 거울은 왜 보는 거냐.”

로웨나는 시계를 보았다. 한시 반이었다. 그녀는 꽃과 시계를 차례로

본 후에 옷장 문을 열어 지갑과 쇼올을 챙겼다. 미하일이 옷소매를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

“로이, 너 어디 가려는 거야?”

“갈 곳이 있으니까 가는 거지. 상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야, 로이! 갈 거면 같이 가!”

그러나 로웨나는 무시했다. 미하일이 따라 오든 말든 문을 뛰쳐나가,

계단을 나는 듯이 내려갔다. 그리고 좁은 골목길을 달려, 큰 길로

나가게 되자 손을 크게 휘저으며 지나가는 마차를 잡았다. 마차는 금

방 잡혔고, 미하일이 외투를 입은 채 간신히 집에서 뛰어나올 무렵

그녀는 이미 마차에 탄 뒤였다.

“로이! 야, 로이!”

뒤에서 미하일이 따라왔지만 로웨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뒤쫓아

오다가 구르기도 했지만, 돌아볼 가치도 못 느꼈다).

“항구로 가 주세요. 어서요, 빨리!”

마부는 뒤에서 구르는 청년을 흘끔 보고, 허름한 차림의 뒷골목 아가

씨 로웨나를 보더니 대강 상황을 오해해준 듯 고삐를 당기고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말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는 하층민들이 사는 곳, 가난이

고인 그 골목을 빠져나가 더 크고 넓은 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늦봄 오후의 햇살이 가라앉고 있었다.

어깨와 목덜미로 부드러이 내려앉는 온화한 햇살에, 가슴은 묘하

게 두근거려온다.

로웨나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쉴 새 없이 뒤바

뀌는 건물들 사이로 똑바로 뻗은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같은 방향

으로 가는 마차가 있고, 마주 오는 마차가 있으며, 빠르거나 느긋하

게 길을 오가는 말과 기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길 끄트머리에 푸르게 넘실대는 강과 수많은 배들이

머무는 선착장이 나타났다. 강가에 솟은 시계탑이 보인다. 그 시계는

정확하게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막 로웨나가 마차를 멈추

어 세우고 내렸을 때, 두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뎅- 뎅. 흰 여객

선이 다리를 접고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로웨나는 멍하니 그 배

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영원히 닿지 않을 듯한, 너무나 먼 곳에 있

는 듯 보였다. 배전의 난간으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

웅하는 사람들이 선착장가로 몰려가 손을 흔들었고, 그 난간위의 사

람들 역시 손을 크게 휘저었다. 손수건을 흔들고, 모자를 흔들거나

던지며, 배웅하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한다. 선착장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주부가 있었고, 늙은 노부부가 있었으며, 떼 지어 몰려

다니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좋은 옷을 입은 젊은이도 있고, 낡은 옷

을 입은 젊은이들도 있다. 아가씨들도 꺅꺅대며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그들이 배웅하는 것은 파난 행의 배. 식민지 파난, 구대륙에서 그 어

떤 희망도 없는 자들을 위해 열린 미지의 지옥. 그곳으로, 그곳으로.

이 땅의 지옥은 누구나 알지만, 그 땅의 고통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모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의지하며 웃고 떠들어 대며, 그곳에서 황금을 찾아 이곳의 아가씨

들과 행복하게 살게 될 거라 생각하며 떠난다.

로웨나는 달렸다. 배는 빠르게 강을 타고 내려갔다. 치마가 걸지적거

리자, 힘껏 당겨 올린 다음 달렸다.

“유리--!”

그렇게 외치며 배 난간을 보았지만, 달리는 그녀의 눈에는 아는 얼굴

은 보이지 않았다. 선착장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남녀들이 있었

지만, 새카맣게 몰려든 그 사람들 중 그 어디에도 유릭은 없었다. 배

를 잘못 찾은 건 아닐까? 아니, 아닐 것이다. 두 시 정각에 파난으

로 떠나는 배는 이것뿐인데.

“유리!”

그리고 어느새 구릉을 오르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자, 길이 급히 비

탈져 강가로 내려간다. 로웨나는 더 힘껏 달렸다. 잠깐이나마 그녀는

배를 앞질렀다. 로웨나는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그 배를 향해

외쳤다.

“유리 크로반--!”

그러나 뱃머리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배의 후미로 가서 선착장

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 받고 있었기에, 그곳은 쓸어낸 듯 허허

롭기만 했다.

안 들리는 게 당연하지, 로웨나는 체념하며 손을 내렸다. 배는 굽이

도는 강을 따라 로웨나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갈매기들이 그 배 주

변을 떠돌았다. 아이들이 모자를 흔들며, 아는 사람이 없는 데도 “잘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따위를 떠들어 댔다.

로웨나는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때, 배의 난간 위로 검은 옷의

키 큰 소년이 나타났다.

“유리?!!”

그러자 그가 로웨나를 향해 손을 이마에 대보였다.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웨나는 크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잘 가--!”

어차피 다시 올 거라 약속했으니까, 다시 만나면 좀 더 즐거운 시간

을 보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하니까, 그러니 로웨나는 웃으며 인사

했다.

“다음에 봐--!!”

배는 금방 멀어졌다. 강 끄트머리로, 그 흐릿한 그림자마저 지워지자

로웨나는 땋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돌아섰다.

온 몸에 기분 좋은 피가 훈훈하게 돌고 있었고, 심장은 새로 태어난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막 돌아섰을 때, 언덕 위에서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긴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단장을 쥔 손에는 오늘이 화창한 늦봄

임에도 흰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로웨나는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옆모습만 보았을 때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라 생각했었는데,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자 누

구인 지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그의 체구와 머리카락, 눈동자 색

과 귀 모양과 머리모양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란슬로 백작님 아니세요?”

가면은 없었다. 얼음에 묻힌 듯 싸늘한 얼굴로, 그렇게 묻는 로웨나

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빙그레 웃었다.

“금방 알아보는 군, 그린 양.”

“못 알아보면 바보죠. 가면이란 건 말이에요, 잘 아는 사람사이에서는

통하지 않아요. 뒷모습이랑, 여기 목 모양, 턱 선, 머리 모양, 이런

것만 봐도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 볼 수 있거든요.”

“누구를 배웅하러 나온 거지?”

그제야 로웨나는 방금 전에 자신이 얼마나 수선을 피웠는지 깨달았

다. 곱게 써 놓은 일기장을 누가에게 들킨 듯 쑥스럽고 창피했다.

“유리요. 오늘 파난으로 갔거든요. 그런데 백작님은 웬 일이세요?”

“나도 배웅하러 나온 거지.”

“누가 보면 같은 사람 배웅하러 나온 줄 알겠네요.”

백작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모자를

들어 머리에 썼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로웨나는 이 남자가 기분 나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듯, 작은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사악한 마법사처럼 군다. 그럼에도,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서늘한 안개처럼, 물위의 차가운 달처럼.

“아버지 일은 안됐어.”

“고마워요. 백작님께 그런 위로를 들으니, 슬픔이 삭 가시는 군요.”

빈정대는 말이었는데도 백작은 별로 기분 나빠 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그는 로웨나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품종

좋은 새끼 고양이를 대하듯, 정말 제 멋대로 다 하도록 내버려 둔다.

알렉산더가 돌아섰다. 로웨나는 그가 사라진 뒤에 집으로 돌아갈 생

각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잠시 걷던 그가 멈추어

서더니, 쥐고 있던 단장을 뒤로 당겼다. 어깨가 한숨쉬듯 천천히

오르내렸다. 단장에 힘이 들어가며, 그 끄트머리가 찍힌 땅에 홈이

파였다.

로웨나는 그래서 그가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말 누

군가를 발견하고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어보니, 가벼운 구두를

신은 발이었다. 치마 끄는 소리도 들렸다.

언덕 위로 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늘빛, 선이 곱고 단정한 모

자를 쓴 귀부인이었다. 뒤로 땋아 내린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에,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자,

로웨나는 자신이 착각한 거라 판단했다.

“아자렛 아주머니--!”

“로이, 여기 있었구나.”

그녀는 알렉산더를 지나쳐 로웨나에게 달려왔다.

랜든 부인, 아자렛 마렐 랜든이었다. 어떻게 여기로 온 건지, 왜 여기

로 온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면서도 로웨나는 그녀가 반가웠다.

그녀는 달려와, 로웨나의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아까 네 집에 갔었단다. 너와 같이 사는 그 청년이, 네가 항구 쪽으

로 갔다고 말해주더구나.”

“저....찾으셨어요?”

아자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부터 계속 찾았단다. ....힘들었지?”

“아뇨, 뭐........ 별로.”

로웨나는 자신의 손을 잡은 아자렛의 흰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언덕 위에, 알렉산더는 아직도 멈추어 서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모자에 손을 얹자,

선착장 쪽에서 아주 키가 큰 남자가 성큼 성큼 다가와 그의 어깨

를 검은 망토로 덮어주었다. 그 하인은 낯익은 바리암 인 오터가

아니었다. 로웨나는 처음 보는 남자였고, 너무나 기분 나쁘게 생

긴 남자이기도 했다. 긴 얼굴에, 코도 칼을 붙인 듯이 날카로웠다.

거무죽죽한 얼굴은 시든 오이 같아 보였고, 훤칠하게 까진 이마를

가지고 있어 어찌 보면 대머리 독수리같아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로웨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 했다. 정말 기분이 나빠져

서, 로웨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그 남자가 휘파람을 불었

다. 굉장한 휘파람이었다. 음율이 느껴진다. 귀를 기울여보니, ‘풀코

바겐의 묘약’ 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였다. 아마도 저 부분은 ‘자

, 밤이 왔군요. 사랑하는 내 사람....’ 하는 소절이었던 듯 하다. 기

억난다. 지난 번 홀라그로 성으로 괴도가 왔을 때, 그에게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로이.”

아자렛이 부르자 로웨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자렛의 검은 눈이 감기

며, 그 투명한 입술 사이에서 한숨이 스며 나왔다. 로웨나가 말했다.

“그런데 웬일로 오신 거에요?”

“장례식 때문에.”

로웨나는 전날 배달되었던 편지를 기억해냈다. 고개내밀지도 말라는

말과 함께, 배달한 하인으로부터 나타나면 꽤나 친절한 대접을 받게

될 거라는 으름장을 들었다.

“저는 안 갈 거에요. 어차피........ 뭐, 남남처럼 지냈잖아요. 새삼.....

눈에 뜨이고 싶지 않아요.”

“그레이브 부인이 벌써 편지를 보냈구나.”

로웨나는 뜨끔했다. 아자렛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다 선

량할 거라 착각하는 어리석은 바보는 아니었다. 그저 상대방의 악의와

악행을 참아 줄 정도로 너그러울 뿐이라, 그레이브 부인이 어떤 사람인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참아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정말 가지 않는 다면, 그레이브 부인은 또 나쁜 소문을

퍼뜨릴 거야. 자기가 편지를 보냈는데도 네가 일부러 오지 않은 거라

고, 정말 배은망덕한 딸이라고 소문낼 거란다. 그러면 네가 힘들어져.”

“어차피 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지도 않을 텐데요, 뭐.”

“내가 같이 가 줄게. 그러면 아무리 그레이브 부인이더라도 널 쫓아

낼 수 없을 거야. 아니, 지금 당장 우리 집으로 가자꾸나. 우리 집에

서 준비하고 내일 같이 나가자. 마차는 잡아 놨으니, 가서 타기만 하

면 돼.”

로웨나는 당장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 랜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옛날 마그레노에 살 때부터 그를 무서워했다. 그는 펜리키언들보다 더

사나운 늑대 같은 남자였다. 아자렛에게 건포도 쿠키와 과일 사탕을

받다가도, 그녀 뒤로 그 남자만 나타나면 혼비백산 도망치곤 했던

로웨나였다.(그리고 노트에 ‘비둘기 공주님과 늑대 악마’ 이야기를

소설이랍시고 써서 돌린 적도 있었다.)

지금도 랜든만 보면 오싹 오싹하다.

“어서 가자, 로이. 레오폴트도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 애를 위해서

라도 같이 가줘.... 네가 안 오면 정말 실망할 거야.”

병약한 레오폴트 이야기가 나오니, 로웨나도 마음이 약해졌다.

아자렛이 로웨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로웨나는 결국 주춤하면서도 그

녀를 따랐다. 그러나 막 돌아섰을 때, 언덕 위에는 아직도 알렉산더가

서 있었다. 아자렛이 놀랐고, 로웨나는 그녀에게 “홀라그로 성의 백

작님이에요.” 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아자렛은 정말 놀라고 미안해했다.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백작님- 가, 가면 벗은 모습은 처음 뵈어서요.”

그러자 알렉산더가 모자를 벗어 가슴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순간 로웨나는 백작의 웃는 모습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다시 생각났다. 멀고 먼 날, 정말 멀고 먼 어느 날. 흰 식탁보에 뒤덮인

테이블들과 아름답게 차려입은 남녀들이 돌아다니고, 그 멋진 정원에 서

서 사람들을 맞이하던 젊은 남자가.

이 남자,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과 처음으로 만났던 그날 떠올랐던 광경이,

지금은 마치 그 안에 백작이 있는 듯 강하고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대체 왜 일까, 아니 그날이 대체 어떤 날이었길래 이리도 분명하게 생각

나는 걸까. 맞다, 이제야 기억난다. 그날은 아자렛의 약혼식 날이었다.

한 남자, 죄가 무엇인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약혼식 날

개처럼 끌려가 멀고 먼 파난의 지하에서 죽은 그 남자와 아자렛의 약

혼식 날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남긴 많은 것들이 송두리째 남의 손에

넘겨져 갈가리 찢겨지고 갈라졌던, 그 나날의 시작이기도 했다.

로웨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자렛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백작을

보며, 로웨나는 잊혀져야 마땅한,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과 죄책감과 슬픔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그런 악령이 돌아와 미소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대체 왜?

로웨나는 도무지 그 기억과 백작을 연관시킬 수 없었다. 그 남자와 이

백작은 얼굴도 다르고, 나이는 더더욱 맞지 않는다. 고작 서른으로 보이는

이 백작과, 아버지와 거의 나이가 비슷한 그 남자는 같은 사람일 수조차 없다.

아자렛이 백작의 손을 잡았다. 백작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그 손등

에 입 맞추었다.

“편안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자렛 랜든 부인,”

그러나 그 목소리만은, 사랑스러운 장미에게 속삭이듯 너무나 부드러웠다.

마지막, ‘랜든’ 이라는 말이 묘하게 강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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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시즌1 종료 합니다. 2주 정도 쉰 후에 다시 올게요.

쉬는 동안 잊지 마세요. ^^

벌써 90회. 그러나 놀랍게도, 유릭은 아직 눈에 뜨이는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라닌은 드디어 메라디스를 만나 훤한 고생길로 들어서고 아키

공주는 탈로스에게 잡혀가 탑에 갖힐 무렵, 유릭은 온갖 남자 후리고 작업까지!

이런 뛰어난 놈!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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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24장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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