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편
형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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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소리가 들리니 항구가 가까워져 오는 듯 하다. 오른손으로는
낡은 가방의 손잡이를 꼭 쥐고, 왼손으로는 잠든 동생을 끌어안은
채, 유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착했구나, 정말 도착했어. 길이 끝난 거야, 여정이 끝난 거야, 이제
일어나서 무언가를 해야만 하겠지.
어린 형제가 웅크리고 있는 곳은 창고나 다름없는 선실이었다. 그 안
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은 가족들끼리, 때로는 혼자서 웅크리고 있
었다. 낡은 모직 쇼올을 두른 초췌한 여자가 잠든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얘, 다 왔단다. 이제 일어나야 해. 여보, 당신도 일어나요. 서
로를 꼭 끌어안은 채 쭈그리고 있던 어느 젊은 부부 중 그 남편이
아내를 흔들었다. 아내는 부푼 배를 끌어안으며 눈을 떴다. 그녀역
시 초췌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부스스했고, 거의 일주일 동안이
나 씻지 못해 눈에 눈곱이 가득 끼어 있었다. 입술을 부르터있고,
그 뺨에는 하얗게 버짐이 피어 있다. 그녀는 남편에게 억지로 웃
어 보이며 말했다. 도착했으니 다 잘 될 거에요. 이제부터 열심히 하자고요.
유릭은 가토를 흔들었다. 며칠이나 계속되었던 지독한 뱃길에 지치고
지쳐있던 어린 동생은, 몇 번이나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토, 일어나. 다 왔단 말이야. 시곤이야.”
그러나 가토의 밀빛 머리는 그저 이리 저리 힘없이 흔들리기만 할 뿐
이었다. 유릭은 동생의 겨드랑이로 팔을 집어넣어, 힘껏 일으켜 세
웠다.
“일어나!”
그제야 가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멍한 눈으로 머리를 더듬다
가, 유릭이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주자 얼결에 그것을 받아 머
리에 썼다.
“다 왔어, 이제 나가자.”
가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릭은 짐
을 들고, 가토의 손을 잡아 당겼다. 곧 내릴 거라면 이 마구간 같은
선실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다. 가토가 등 뒤로 바짝
따르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그리어슨 사제님이 소개해주신 분을 찾아 가야해.”
“어딘지 알고 있어?”
유릭은 그리어슨에게서 받은 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흔들었다. 가
토는 형은 늘 잘 하니까- 라고 말하듯 웃고 있었다. 유릭은 동생의
그런 눈빛에 왠지 우쭐해졌다. 동생이 이런 식으로 바라보거나
말하면, 언제나 자신이 굉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빈정대는 것 밖에 없는 열한 살 꼬마지만, 지금만큼은 다
큰 어른처럼 생각된다. 유릭은 웃으며 가토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
고 둘은 문을 열고 달려 나가, 좁은 복도를 지나, 갑판으로 올라갔다.
하늘은 푸르렀다. 너르게 펼쳐진 바다는 육중하게 물결치며 낡은 화
물선을 시곤 항을 향해 힘껏 밀어붙였다. 거친 바람은 쉴 새 없이
갑판을 휩쓸었다. 육지가 가까워져 왔기에 갈매기들은 낙엽처럼 날
아다니고 있고, 그 울음소리는 너무도 즐겁게 들려왔다.
유릭은 난간을 잡았다. 가토 역시 그 옆에 서서, 드디어 나타나는 커
다란 도시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바다로 쏟아지는 비탈이 보인다. 그 위에, 붉은 지붕을 인
집들과 높은 건물들이 고목의 버섯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우와, 무지 크다! 형, 저거 봐! 저거!”
가토가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거대하고 온후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유릭
은 그것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반대편 뱃전으로 달려
갔다.
검푸른 바다, 물결치며 햇빛을 토해내는 그 바다 위에, 희고 둥근 건
물이 서 있었다. 그것은 대륙과 조금 떨어진 섬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경배하는 사제들처럼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고, 그
가로등마다 깃발이 걸려 휘날렸다. 붉은 깃발이었고, 그 위에는 금
빛 글자가 아름답게 적혀져 있었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그 주변
을 거닐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높은 모자에 정장을 입었고, 예쁜
옷을 입은 여자들은 꽃봉오리 같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샹테 로비니엘 대극장이다. 밤에 오면 정말 굉장하지. 저 가로등에서
조명이 쏘아져 오르는데, 요정들이 모여 노는 듯 하지.”
고개를 들어 보니, 잘 차려입은 노인이 파이프를 문 채 서 있었다.
그는 그 로비니엘 대극장을 정면을 보는 난간에 서서, 느긋하게 파
이프를 피우고 있다가 유릭이 올려다보자 빙그레 웃었다. 얼굴이
네모지고 광대뼈가 높으며 눈은 작고 날카로웠다.
노인은 파이프 끝으로 극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중에 커서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저 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를
구경해 보려무나. 저 곳은, 신께서 내려 보내시는 노래의 천사들이
강림하는 곳이란다. 정말 멋진 곳이야. 신의 기적이 펼쳐지는 곳
이니까.”
“다음 역은 시곤입니다, 시곤!! 내릴 분 준비해 주세요--!.”
눈을 뜨기 싫어 계속 웅크리고 있었다.
“시고오오오온--!”
유릭은 간신히 눈을 떴다. 머리가 찡하도록 고함을 친 차장이 막 객
실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덮고 있던 담요를
내렸다. 딱딱한 의자 위에서 몇 시간이나 웅크리고 잤기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목과 어깨가 비명이라도 지르듯 뻐근해졌다.
“도착했네.......”
짐을 챙기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앞자리에 앉은 늙은 부부가 움
찔했다. 유릭은 지끈거리는 어깨를 두드린 다음 신발장에 넣어 놓
았던 군화를 찾아 발에 꿰고 끈을 조였다. 잘 조여졌는지 발을 굴러
확인하고, 허리춤에 꽂아 놓았던 권총을 뽑았다. 객실 문을 향해
총구를 겨누어 보아, 손에 잡히는 느낌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권총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제복 상의를 찾
아 입으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앞의 부부는 이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복까지 입었다가는 아마 졸도 할 것이다. 사실, 이 부부
는 유릭이 처음 이 객실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아들을 본
듯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군인이군요. 휴가 나오신 듯 한데, 혼자십니까?
그렇게 묻던 남편은, 유릭이 들어오며 그 팔에 있는 소속 부대의 마
크를 확인하게 되자 당장에 새파래졌다.
-네, 혼자입니다.
하고 웃으며 답해봤자, 객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노부부는 시퍼
렇게 질려 발발 떨기 시작했다.
유릭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라 판단한 후에, 사흘 내내 밀린
잠이나 한꺼번에 자기로 했다. 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거의 사흘
걸러 한번씩 야간근무를 해 왔으니, 눈을 감자 잠은 한여름 소나기처
럼 쏴아아 몰려왔다. 그리하여 식당 칸에 가서 식사를 해결할 때를
제하고는, 꿈쩍도 하지 않고 내내 잠만 잤다. 그럼에도 그가 눈을
뜰 때마다 부부는 겁먹은 쥐처럼 벽에 바짝 등을 밀어붙였다. 그런
부부를 볼 때마다, 유릭은 출발 시간이 늦더라도 군용 열차를 탈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그곳에서도 특별수용되어 있을 가능
성이 매우 높지만).
기차가 느려지기 시작하자, 유릭은 가방을 찾아 열었다. 맨 위에는
서류 봉투가 곱게 놓여져 있었고, 그 밑에는 간단한 세면도구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유릭은 봉투를 집어 그 내용물을 잘 확인한 후에,
끈으로 입구를 맸다.
마침내 기차가 멈추었다. 유릭은 군모를 집어 머리에 쓴 다음, 제복
상의와 가방을 양 손에 나누어 잡고 객실을 나섰다. 등 뒤로 부부의
안도하는 길고도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유릭이 내린 뒤에 저 부
부 앞자리에 누가 앉을지 모르겠지만, 유릭은 잠시나마 사흘 동안
괜한 두려움에 떨며 잠도 제대로 못잔 부부가 이제부터는 편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행운을 빌어주었다.
기차에서 내리자, 이내 따가운 햇살이 눈을 스쳐지나갔다. 유릭은 모
자를 기울여 햇살을 가리고 플랫폼을 걸었다. 마중 나올 사람은 어
디에도 없었다. 개찰구 너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며 내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건만, 그 어디에도 유릭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 역무원이 유릭에게 손을 내밀자, 유릭은 산스
카발테의 군행정실에서 준 열차표를 내밀었다. 역무원은 기계처럼
그것을 받아 그 끝에 구멍을 뚫은 뒤에 돌려주었다. 유릭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그것을 버린 후에, 느릿느릿 역사를 나갔다.
비둘기떼 거니는 역 앞 광장은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탈진
항구라, 바다는 눈 앞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유릭은 가방을 내려
놓고 군복 상의를 입었다. 사람들이 휴가 나온 장교라 생각한 듯 한
번 흘끔 보고는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제복 상의를 다 입고, 단추
를 채우고, 말아 올렸던 소매를 내리자 그제야 그가 어디 소속인지
알아본 사람들 몇 명이 당장에 해쓱해지며 저 멀리 도망쳤다.
유릭은 광장을 가로질러 도시로 걸어갔다. 넓은 항구 도시 앞에는 이
곳에 처음 와서 보았던 그 아름다운 오페라의 궁전 샹테 도비니엘이
웅크리고 있었고, 그 흰 살결은 연분홍빛 아침 햇살에 흠뻑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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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시즌2 시작입니다~!
이번챕터의 부제는 유릭의 파난에서의 하루, 정도겠군요. ^^
오타 수정했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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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