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94화 (94/174)

제94편

형제#3

****************************************************************

파난의 쓸만한 학교가 거의 그러하듯, 샹테 풀셰르 학원 역시 사립학

교였다.

국립학교라고 해 봤자, 창고 비슷한 건물에 애들을 우르르 몰아넣은

다음 기본적인 덧셈 뺄셈 곱셈 철자법마저도 헷갈리는 교사(1/2+

1/3 = 1/5라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들이 가르치는 곳이다. 운이

좋으면 봉사정신 출중한 실력 있는 교사를 만날 수도 있지만, 그

건 너무도 드문 일이라 일치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다.

가토에게 글과 셈을 가르쳐 준 것은 유릭이었다. 처음에는 그리어슨

사제가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그가 바빠지자 유릭이 떠맡기로 했다.

사제는 유릭에게 이것저것 묻고 문제를 풀어보게 한 뒤에 조금

놀라워하며 허락했다. 입대 후 1년 만에 드디어 장교 월급을 받기

시작하자 유릭은 주저하지 않고 가토에게 사립학교 시험을 치게 했다

. 정부에서 인정하는 학교에 들어가면, 졸업할 때까지 군입대는

연장되고 졸업 후에는 장교로 복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학비가

꽤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유릭은 망설임 없이 가토를 그 학교로 보냈

다. 가토는 극구 반대하며, 어떻게든 자기도 군에 들어가거나 일

을 하겠다고 했지만 유릭은 아무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고작 두

살 위의 형이었지만, 아버지 대신, 어머니 대신, 선생님 대신 모든

것을 해왔던 유릭이었다. 결국 가토는 학교에 입학했고, 지금까지 다니

고 있으며, 2년 뒤면 졸업하게 된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단아한 담색 벽돌로 된 학교 건물이 나타났다.

정면에 박힌 시계가 오후 한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업이 없는

학생들이 학교 정원 잔디밭에 모여 책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중 몇이 학교 정문을 들어서는 유릭을 발견했다. 그들

모두 유릭의 군복을 보고 놀라 겁에 질린 눈빛을 보냈다. 장교복을

입은 군인이 자신과 별로 나이차도 않는 소년이자 몇몇이 고개를

숙여 속닥이고, 몇몇이 유심히 유릭을 살폈다.

“특무부 제복이야.”

학생 하나가 얼결에 그리 말했다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말

에, 아무 것도 모르던 학생들마저 유릭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과 공포가 어렸다. 하얀 까마귀 내란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고작 2년, 전쟁이 잊혀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이 학교에서도 상급생이나 교사 몇 명, 또는 그 부모들

이 잡혀가 처형되었고, 학생들도 무더기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거나

유형지로 끌려가거나 죽었다. 그런 반란자들을 색출할 때 특무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이들은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유릭은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학교의 현관으로 들어갔다. 들어서

자마자 교직원 여자가 달려왔다. 그녀 역시 아주 창백해져서, 팔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녀 뒤에 교복차림의 남녀여학생들이 모여 겁

에 질린 눈으로 유릭을 보고 있었다.

2년 전에, 거의 매일같이 봐 왔던 모습이었다. 사령부에서는 각 학교

에서 반란주동자들을 색출해 내라 명령했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들 중에서 반란군을 색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릭은 아무

도 색출하지 못했으나, 그의 동료들 중 몇은 학교를 뒤질 때마다 메

뚜기 떼처럼 많은 학생들을 끌고 오곤 했다. 아마도 그 중 절반은

처형된 것 같다. 그건 반란 진압이 아니라, 겁에 질린 위정자가 늘

벌이는 헛된 학살이었다.

간신히 용기를 낸 교직원이 물었다.

“무, 무슨.....일로 찾아오신 거지요?”

유릭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드디어 올게 왔다고 생

각한 학생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고, 마음 약한 여학생들 몇 명이

주저앉으며 실신했다. 교직원은 하얗게 질려 외쳤다.

“서, 설마.......”

“........학부형입니다.”

“......”

“체포영장이라도 들고 온 줄 알았습니다.”

유릭과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교장이, 유릭이 내민 봉투에서 군면제

서를 꺼내 확인하며 그리 말했다.

키가 작고 마른, 평범한 늙은 사내였다. 조용한 검은 눈에, 미소가 소

년처럼 깨끗하고 가식이 없어서 유릭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유릭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나이가 거의 비슷하거나 어림에

도 불구하고 장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른대접을 하고 깍듯이

대해준다. 말투 역시 교사답게 교양넘친다.

그는 서명들을 확인한 후에 만년필을 꺼내어 자신의 서명을 했다.

“여기, 헨리 카밀턴이라는 서명은....... 혹시 그 유명한 서부 전선의

영웅 헨리 카밀턴 경이십니까?”

“맞습니다.”

“굉장하군요. 직접 만나 뵌 겁니까?”

“그분 곁에서 지난 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어떤 분이셨나요? 저는 그런 이름 높은 장군님들을 곁에서 본 적이

없어서, 그분의 서명만 봐도 가슴이 떨리는 군요.”

“여러모로 굉장한 분이시죠. 직접 만나 뵈면, 정말 놀라실 겁니다.”

유릭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으며, 속으로만 ‘아마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되실 겁니다.’ 라고 말했다. 그저 소탈한 성품이라면

모를까, 그가 본 카밀턴은 전시는커녕 평상시에도 정상생활이 불

가능할 정도로 ‘산만한’ 인간이었다. 오늘은 뭘 얼마나 깨고 어디서

어떻게 넘어지고 있을까. 생각하자니 울적해지는 장군님이다.

“정말, 크로반 씨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고 다니면서 동생 뒷바라지까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 할지라도, 소위님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가토 크로반 군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서.”

“이제 소위가 아닙니다.”

“진급하셨습니까?”

“하사입니다. 강등되었지요.”

교장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 혹시........그 때 저희들을 도와준 것 때문에 그리 된 건......”

“아닙니다.”

처음 강등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두 번째는 마약전과범이 되어 버린

지라 프리델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도 엄청나게 걸렸던 것을

넘겨주고 넘겨주다가, 결국에는 그 누구도 참지 못하게 된 것이다.

크리스펠로와 카바냐도 강등 먹고 정신 차려라, 하고 말한 다음

매우 예뻐해 주었다. 너무 사랑을 받은 덕에 다음날 제대로 일어나

지도 못했다.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교장이 안경을 벗어 책상에

놓으며 말했다.

“가토 군은 만나고 가실 예정입니까?”

“네.”

“그렇다면- 만나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시다시

피, 가토 크로반 군은 교장인 저도 눈여겨보는 특출한 학생입니다.

아니, 특별반의 학생들은 하나하나 다 알고 있지요. 그래도 크로

반 군은 출신도 출신이거니와, 가족사항도 참 남달라서...... 늘 유

념해 보고 있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지난번에 크로반 하사께서 학생들에게 신경 써 준 것에 대해

저는 아직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사께서....... 도움을 주지 않았

다면, 저는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며, 학부모들에게 알

려 주지도 못했을 겁니다. 특히나........ 내 큰아들의 주검을 수습하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유릭은 웃었다. 이 학교 교사였던 그의 큰아들의 주검을 수습해 준

것은, 호의 때문이 아니었다. 반란 사건으로 체포되어 총살된 이

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속에 가토가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명

단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직접 시체를 뒤졌던 것이다. 그 일을 한

덕에 유릭은 진압군 장교로부터 그 시체들을 그 부모와 가족에게

인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학교 학생들과는 만나지 않았지만, 진압

군 시곤 사령부가 있던 마을 회관으로 찾아온 교장과는 만나야 했다.

낯익은 얼굴이라는 데 안도하고, 그 사람이 어린 소년이라는 데

불안해하는 교장에게 유릭은 처형자 명단을 내밀었다.

확인하십시오, 그 명단에 없다면....... 저로써도 어쩔 수 없습니다. 교

장은 지치고 멍한 얼굴로 명단을 하나하나 확인했고, 회관 앞마당에

있는 시신의 얼굴도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날 모든 시신을 수습해

갔다. 가토가 처음으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던 것

이 그때였다. 그리고 그날, 유릭은 참 오랜만에 가토를 죽여 버리

고 싶었다.

“가토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가토 크로반 군은 파난 안보 위원회의 감시 대상 리스

트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어쨌건-”

“정치범의 아들이니까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유릭은 담배라도 한대 물고 싶어졌다. 가는 곳마다 재확인이다. 정치

범, 정치범, 정치범.

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을 열고 그 안에 즐비하게 꽂혀 있는

파일 중 하나를 빼 왔다. 특별반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였다.

“가토 크로반 군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정치서클이나 모

임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토론회조차 참석하지 않을

정도고, 디글러 선생 같은 대학출신 교사의 특별수업은커녕 그냥

수업도 듣지 않지요. 그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힘든 일을 많이 당하

고 있는 듯 합니다.”

“어쩔 수 없지요.”

교장이 가토의 생활기록부를 내밀었다. 이번 학기말 성적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고, 그 숫자를 확인하자 유릭은 잠시 멍해졌다. 아연하다

못해, 정말 기가 막혔다.

“이게-”

“보시다시피, 가토 학생이........ 요즘 이상합니다.”

중간고사 성적에서, 정확하게 절반씩 점수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반 등수는 옆에 적힌 총학생수와 매우 근접해 있었다.

“담임과 제가 물어도 요즘 공부가 안된다고만 할 뿐, 솔직하게 말하

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아무래도, 학교 안에서 가토 학

생을 괴롭히는 학생이 있다고 생각 중입니다. 하지만 이건 저나 다

른 선생이 물어보기 곤란하지요. 그러니 형 되시는 크로반 씨가 물

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특별반에서 탈락됩니다. 그리 되면.....

대학진학에 지장이 생겨요. 생활기록부 점수가 나쁘면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힘들답니다.”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난 학기에 없던 과목이 추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음악-프란첼러 존스 담당. 그 과목만은 중간

고사나 이번 시험이나 거의 만점에 가까웠다. 실기가 대부분일 거라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서 만나 보십시오. 방금 전에 사람을 보내어 가토 크로반 군에게

연락을 했답니다. 지금쯤 교장실 앞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건강하십시오.”

“크로반 씨도 언제나 건강하시오.”

유릭은 문을 열었고, 그 문 앞에는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소년이 서

있었다. 키는 유릭보다 작았다. 어렸을 때부터 작더니, 커서도 유릭

보다 작다. 금빛 머리는 목덜미 까지 깎아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잠

깐 고개를 푹 떨구었다가 들었고, 그러자 금발은 밀밭처럼 흔들렸다.

얼굴을 들었음에도, 긴 속눈썹에 둘러싸인 맑고 선명한 초록색

눈은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유릭 자신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유릭은 손을 들어 그 어깨에 얹었다.

“가자, 가토.”

가토가 머뭇거렸다.

“저, 저기 오후 두시부터 수업이 있어.”

“째라.”

****************************************************************

작가잡설: 드디어 다 자란 가토군의 등장입니다.

어제 올렸어야 했는데.............. 그놈의 유리가면에 홀딱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한번 손대기 시작하니 정말 주체불가!! 아악.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