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편
형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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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소나기 같은 시선을 받으며, 유릭은 가토를 끌고 학교를 나
섰다.
구름이 하얗게 빛나는 화창한 여름 날씨였다. 학교가 마주보는 녹색
벌판은 풍요롭고 울창했고, 그 위로 잠자리떼들이 부산히도 날고
있었다.
“조용한 곳 있으면 안내해라.”
유릭은 앞주머니를 뒤져 담배갑을 꺼냈다. 가토가 눈을 찌푸렸다.
“여긴 학교야, 형.”
“내가 입고 있는 건 교복이 아니라 군복이야.”
선생이 달려와서 너, 담배 꺼! 한다면 유릭의 신분상 그 이마를 담뱃
불로 지진다 해도 상관할 사람은 없다. 유릭은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풀숲으로 던졌다.
“근 반년 만에 간신히 얻은 휴가다. 되도록 즐겁게 해 주면 좋겠다.”
가토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무엇을 물어보려 할 지, 그러나
그 말을 꺼내는 것을 얼마나 어려워하는 지 뻔히 하는 유릭은 무덤
덤하게 말했다.
“복무는 계속하기로 했다. 너는 면제되었으니, 앞으로 편하게 학교 다
녀.”
“형!”
유릭은 풀숲으로 뛰어 들었다. 풀벌레들이 우수수 튀어 올랐다. 살찐
메뚜기들은 펄떡 펄떡 뛰어 도망가고, 훌쭉한 방아깨비들도 따다닥
소리를 내며 멀찍이 날아갔다. 희게 무리지어 핀 꽃에 매달려 꿀
을 따던 벌들도 놀라 날아올랐다.
멀리, 햇살을 퉁겨내며 유쾌하게 흐르는 시냇물이 보였다. 무성하게
자란 버드나무들이 그 냇물을 굽어보고 있었고, 그 무성한 잎 너머로
오후의 햇살은 싱그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유릭은 그 냇물 쪽으로
달려갔다. 가토가 뒤따라 달려왔다.
“형, 어디 가는 거야!”
“도착해 보면 알겠지.”
유릭은 길 없는 풀을 밟으며 계속 달렸다. 중간 중간, 얇게 흐르는
실개울이 있었다. 그것을 밟자 흙탕물과 물이 튀겨 올랐다.
보랏빛 자그마한 꽃을 단 달개비들이 있었으며, 그 위를 훌쩍 훌쩍
뛰어다니는 메뚜기들도 있었다. 청개구리들이 풀 속으로 달아나고,
까만 날벌레들이 붕붕대며 배회하다가 그들에게 잡혀 먹히기도 했다.
검푸른 나비들은 게으른 귀부인들처럼 유유하게 날고, 붉은새들
은 발랄한 아가씨들처럼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날아다닌다.
마침내 냇가에 도착하자, 유릭은 발을 멈추었다. 흰모래사장이 넓게
깔린 냇가였다. 물은 푸르고 맑았고, 깊어 보이지도 않았다. 수북한
잿빛 물고기 떼가 헤엄치다가 유릭이 나타나자 쏜살같이 도망갔다.
아마도 휴일날이 되면 학생들이 이곳으로 샌드위치를 싸들고 와
물장구를 치거나 노닥거릴 것이다. 남학생들은 웃통을 벗고 물에
첨벙 첨벙 뛰어들 테고, 여학생들은 저 풀숲에서 꽃을 딸 테지.
잠시 뒤 가토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형,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성적표 봤다.”
가토의 숨소리가 멈추었다. 유릭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개판이더군.”
가토는 변명하지 않았다. 무엇을 잘못했다고 시인하지도 않았다. 그
저 불안한 숨소리를 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군대 올 거냐?”
가토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갈게.”
“좋아, 간다고 치자. 나는 군내에서 생존확률이 아주 높다. 나 자신이
높기도 하고, 나와 일반병사가 똑같이 위험에 처한다면 군은 나를
구하니 더더욱 높아지지. 나는 아주 드물고 비싼 병기니까. 하지만
너는 아냐. 의무병 중 1/4이 신병훈련기간이 끝난 직후 죽는다.
이병에게 계급장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너무 많이 죽으니까......
.. 네가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각오.... 할게. 형도 한 일이잖아.”
“너는 나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될 거야. 내가 알아. 너는 아니야.”
“형 혼자서 다 하게 할 수는 없어! 뭐야, 언제나 형 혼자서 다 희생
하고! 유형지에 있을 때부터 그랬어! 아버지를 보살피고, 나를 보
살피고, 그리고 고아원에서도 그랬고! 지금도......나도 내 할일은 할
수 있다고! 형이 그렇게 보호하고.......지켜주지 않아도 된다고!”
“죽어도 좋다는 거냐.”
“각오 하는 거야.”
“나한테 죽을래?”
“응?”
유릭은 돌아서, 그대로 가토의 턱을 갈겼다. 빠악--! 가토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모래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모래먼지가 부옇게 일
었다.
“나보고 희생한다느니 뭐라느니 하지 마. 나는 지금 내가 이 일을 해
야 하니까 하는 것뿐이지, 너를 위해 없는 고생 찾아 가는 게 아니
니까.”
가토는 누운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유릭은 턱까지 채운 제복의 단추
를 풀며 고개를 들었다.
“너를 지켜? 무엇 때문에 너를 지키지? 너를 보호해? 미쳤냐. 벌써
열여섯 살이나 처먹은 사내자식을, 내가 뭐 하러.”
가토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단한 놈 아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라도 언제나 항상 늘 사랑
하는 건 아니야. 때로는 미치도록 밉고,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을 정
도로 밉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밉지. 책임지는 것이 귀찮고,
신경 써 줘야 하는 것이 귀찮고, 돈 벌어서 먹여 살려야 하는
것도 너무나 귀찮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희생하여 가족을 보살필
수 있을 리 없어. 한결같이 희생하는 데 기뻐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고.”
“그러면 나한테도 시키라고! 하라고 하란 말이야. 형을 위해 내가 아
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끝까지 들어! 아무리 그래도 버릴 수 없고 바꿀 수 없으니까 돌아가
는 게 가족이고 형제야. 아무리 싫어도, 그래도 이어져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돌아가야 하지.........어쩔 수 없이, 때로는 내가
손해 보기도 하고 양보해야 하기도 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도
해. 그들과 헤어질 수 없으니까 감수해야 하는 거야. 네가 군대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런데 대체 왜 가겠다는 거냐.”
가토가 몸을 일으켰다. 터진 입술에 먼지가 부옇게 달라붙어 있었고,
가토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형은 너무 변했어!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예전의 내가 어떻고, 지금의 나는 어떤데.”
“예전에는.........예전의 형은....... 훨씬 더 밝았어. 말도 많이
하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그런데 지금은.........지금은
관심도 희망도 꿈도 없어 보여! 그냥 사니까 사는 것 같아 보인다고!
그런데 내가 할 일은 뭐지? 얌전히 여기 처박혀서 공부하는 거야? 형이
그렇게 변해가는 데도, 이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니까 가겠다는 거야.”
“이건 내가 하는 일이지 네가 해야 할 일도, 네가 뭔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나도 이러기 싫어! 학교에 가고 싶으면 형이 가, 하고 싶은 일이 있
으면 나더러 하라 하지 말고 형이 하란 말이야! 이젠 내가 갈 테
니까, 형은 군대에서 나오라고!”
이번에는 그냥 발로 차 버릴까, 하고 유릭은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두들겨 패기 시작하면 도저히 자제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부담 되는 거냐? 내가 너 대신 고생한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바보 자식, 나는 나대신 무얼 하라고 너를 학교에 보낸 게 아니야.
너를 통해 대리만족 같은 거 느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네가 하기 싫으면 네가 알아서 때려 치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라고! 그런데 대체 왜 네가 나를 동정하는 거야! 변하지 않는 건 없
어. 네가 기억하는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건 당연한 거라
고!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달라져야 살 수 있는 법이니까. 너는
아직 아이여도 되지만, 나는 어른이 되어야 하니까 어른이 되는 것
뿐이라고. 그런데 공평하게 고생하면 뭐가 달라지지? 그건 나누는
게 아니라, 두 배가 되는 거라고. 쓸 데 없이 두 배가 되는 거야!”
가토가 입을 다물었고, 괜히 입술만 문질렀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
었다. 유릭은 품안을 뒤져 수첩을 꺼내어, 그 안에서 사진 한 장을
빼내 가토에게 건네주었다. 가토는 젖은 눈으로 멍하니 사진과
유릭을 번갈아 보다가 받아 들었다.
“아버지 사진이다. 브란 카스톨에 있는 옛날 집에서 찾아 온 거야.”
가토는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얼굴......... 기억이 안나. 미안.”
“별 수 없지.”
“형........ 무지 작다.”
“뭐?”
가토가 피식 웃었다. 유릭은 고개를 돌렸고, 눈물에 반짝이는 가토의
눈과 마주쳤다. 축축하게 젖은 채, 그 눈가에 눈물이 맺혀 햇살에
떨리고 있었다. 가토는 소매로 눈물을 문질러 닦으며 웃었다.
“형........ 정말 작았구나.”
“기어 올라와도 된다고 허락한 적은 없는데.”
“미안- 하지만.......무지 귀여운 걸. 이렇게 어른인 척 하는 얼굴이라
니! 정말.........너무 귀엽다, 형.”
그러다 가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턱이 부르르 떨리더니, 결국
눈을 감으며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
“......”
“미안해, 형.”
조용한 여름의 오후였다. 벌 떼가 붕붕대고, 간혹 따닥따닥 날아오르
는 방아깨비 소리에, 지저귀는 새 소리와, 쾌활하게 떠들어 대는
시냇물 소리. 그 위로 오후의 햇살이 작렬하고, 잎과 풀들은 그 강
렬함에 힘겨워 하면서도 힘껏 자라나고 있다. 그리고 가토의 울음소
리는 나무의 허리에 새긴 칼집처럼, 그 아름다운 여름하루의 광경
을 할퀴듯이 들려왔다.
그날 밤, 유릭은 밤 기차를 타고 그의 근무지가 있는 카발테로 향했
다.
2-3등 객실에 자리를 잡아 눈총 받기 싫어, 비싼 돈을 내고 1인용
특실을 샀다. 멀지 않은 2등칸에서 기타 소리에 맞추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소녀의 작고 고운 목소리였다.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으나, 잘 들어보니 유릭이 얼핏 아는 노래였다.
유릭은 귀를 기울였다. 머리 위로 뚫린 창문으로 넓게 펼쳐진 파난
섬의 숲과 벌판이 보인다. 별과 구름이 그 벌판 위를 따르고, 먼
지평선 너머로 시곤 항의 불빛이 보인다. 유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거센 바람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유릭은
창에 기대어 그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기차는 화살처럼 대지를 가로지르고 하늘을 할퀴며 지평선을 꿰뚫고
달려갔다. 길에서 벗어나지도 목적지를 외면하지도 않으며, 심장
같은 소리를 내며 끝없이 달려간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옆 칸의 이름모를 소녀의 가냘픈 노래가 아니었다. 바로 귓가에서,
그의 눈앞에서, 형형한 달처럼, 반짝이는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속
삭이듯 깜빡이는 별빛처럼 들려오는 밤의 아리아였다.
불멸할 듯 명멸하나, 파도위에 바스러지는 달빛처럼 금세 거꾸러지는
허망한 찰나. 순간의 반짝임이지만, 그래도 각인되어 기억되는 강
인한 창검같은 추억이었다.
유릭은 객실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이 기차가 목적지에 도
착하면 또 고달픈 나날이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유릭은 지금의
그녀가 그와 만났을 때보다 조금은 더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무엇도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까마귀 임금님의 이름이라도 기억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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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간만에 휴일다운 휴일을 보내는 중입니다.
이제 다음 챕터부터는 본격적인 시즌2! 입니다. 5일 뒤에 뵈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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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25장 구원의 악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