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97화 (97/174)

제97편

구원의 악마#2

*******************************************************************

로웨나는 그날, 여러 ‘언니’들의 사랑과 배려에 감사했다. 그들은 ‘힘

내라고! 언젠가는 정말 스타가 되면 배로 갚게 될 거야!’하고 우렁

차게 외치며 격려해 주었다. 듬직한 ‘언니’들의 막내 동생이 된 듯한

기분이라, 로웨나는 돌아가는 길만은 가뿐 했다.

깜깜한 밤이었다. 달은 없이, 흰 별만이 무리지어 빛날 뿐이다. 이제

는 밤도 제법 훈훈해졌고, 그 덕에 추운 날에는 조금 덜 했던 도시의

악취는 더욱 심해졌다.

로웨나는 마음 놓고 밤의 골목길에서 웅크리고 자는 부랑자들을 지나

쳐 집이 있는 골목길로 향했다. 그리고 막, 그나마 가로등불이 있는

길로 들어서 집으로 향하려는데, 골목길 모퉁이에서 그녀를 기다리

고 있던 그림자와 마주쳤다.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으나, 간신히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입을 딱 다물었다.

컴컴한 가운데 더욱 컴컴해 보이는,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의 하인 오

터였다. 로웨나는 큰 눈을 깜빡였다. 예전에 홀라그로 성으로 괴도

박쥐가 들어왔을 때 이후로, 그와 다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어라, 웬일이세요?”

“내가 여기로 오는 건 간단하지. 누군가가 너를 보고자하고, 백작이

그 부탁을 받았고, 너희 집이 어디 있는 지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

데리러 온 거다. 가자.”

“자, 잠깐요. 어디로 가는 건데요?”

오터는 주변을 살폈다. 컴컴한 하층민 주택가의 건물들이 지치고 딱

딱한 얼굴로 그들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오터는 돌아서며 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가면 안다. 어서 와.”

“알아야 따라가죠!”

“불안하면 네 과거를 살펴봐라. 위험해 질만한 짓을 한 적이 있다면

따라오지 말고, 없다면 따라와라.”

“저는 아니라 생각해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

는 일 아닌가요? 예를 들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 저는

아무 잘못도 상관도 없는데, 추기경 예하라면 전혀 다르게 생각할

지도 모르지요. 저는 조심성이 많은 편이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까지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아이는 아니라고요.”

오터의 검은 눈이 로웨나의 얼굴에 똑바로 박혔다. 로웨나 역시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그를 마주보았다.

“누가 너를 부르는 지, 벌써 짐작하고 있군.”

“다른 사람이 저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다른 사

람 명이라면, 알렉산더 백작이 당신을 보냈을 리 없죠. 하여튼, 정말

추기경 예하가 저를 부르는 건가요?”

“거의 맞은 셈 쳐 주지. 너를 부르는 건 추기경 예하가 아니라 추기

경의 부인인 코지마 님이다.”

“네?”

추기경의 아내인 코지마. 로웨나는 그 여자에 대해 소문만 조금 들었

을 뿐, 전혀 몰랐다. 그녀가 정치 일선에 나오거나 추기경의 일에

끼어든다는 소문은 깃털 부스러기만큼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고 아자렛처럼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레이브 부인처

럼 소문 만들기라는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다. 사교계로

눈에 뜨이게 나돌아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새장안의 새처럼

얌전히 지내왔던 여자인데, 그런 그녀가 자신을 부른다고 하니 굉

장히 놀라웠다.

“가봐야 알겠네요, 정말로.”

“어서 가자.”

로웨나는 허름한 옷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다른 곳도 아닌

추기경의 부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크게 신경 쓸 건 없다고 판단

했다. 오터를 따라 로웨나는 마차에 탔다. 마차는 까맣고 작은 것으로,

길을 돌아다니면 누구나 삯마차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추기경

집에 드나들기 딱 좋은 마차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로웨나는 마차

에 앉았다.

마차는 금방 슬랍 가를 빠져나갔다. 제법 빠르고 좋은 말들이 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 어떤 것도 추기경 부인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당연한 이유 때문에 쓸데없게 느껴졌다. 로

웨나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어느 시골 수녀원 출신이며 그

다지 미인도 아니고 성격도 조용하다는 것뿐이다. 대명문가 출신이

라는 설도 있고, 어느 성자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미모로

추기경을 홀렸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을 보니, 그녀는 정말

다른 귀부인들의 경쟁심을 조금도 자극하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하

고 못생긴 여자인 듯 생각되었다.

마차는 주택가를 빠져나가 한적한 교외로 접어들었다. 로웨나는 슬슬

졸리기 시작하여, 결국 마차 에 쭈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오터가 그녀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자 퍼뜩 깼다.

“음, 어. 다 왔나요?”

로웨나는 눈을 비비며 그렇게 물었다. 오터는 생각과는 달리 꽤 부드

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을 활짝 열었다.

“내려라.”

오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릴 정도로 조신한 귀족영애는 아닌지

라, 로웨나는 직접 마차의 문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제가 추기경 예하의 저택에 온 게 맞나요?”

“맞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방문을 허락받은 암흑의 대저택에 오게 된 건 정

말 영광인데, 이건 추기경 나리의 저택이라기보다는........”

“보다는?”

“수도원이나 국경의 요새같군요. 박쥐 몇 마리만 날아다니면, 완벽한

마왕성.”

불경죄로 체포될만한 발언이었으나, 오터는 눈썹을 밀어 올리며 동의

를 표했다. 로웨나는 히죽 웃고는 치마를 당기고 저택 안으로 향

했다.

저택은 로웨나의 표현이 맞을 정도로, 크기는 했으나 지독할 정도로

딱딱한 곳이었다. 좌우 대칭으로 탑이 두개 솟아 있었고, 저택은

정확하게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어 그 단단하고도 잔혹한 벽이 바닥

에 똑바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검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녹색

담쟁이들이 벽을 반쯤 덮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장미덩굴이 자라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검은 창틀은 모두 닫혀 있었으며, 흰 커

튼 역시 거의 대부분 내려져 있었다. 현관 옆에는 창과 방패를 든

투신의 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들이 굽어보는 현관의 계단은

검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가까이 가니, 물결같은 흰 무늬가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낮에 보면 독개구리 피부 같아 보이겠다, 그

리 생각하며 로웨나는 계단을 밟았다. 오터가 앞장서, 현관 초인종을

눌렀다. 로웨나는 저택의 정원을 보았으나, 정원에는 직사각형의 연

못이 하나 있을 뿐 화단 하나 없었다. 문이 열리고, 로웨나가 돌아

보니 그 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집사가 서 있었다. 나이는 마흔 정

도 될까, 벌써 희끗해지는 검은 머리를 완벽하게 뒤로 밀어 붙여

놓아 개미 머리처럼 반들반들했다. 높은 코에는 안경이 얹혀 있었으며,

그 너머의 작은 눈은 갈색이었다. 그는 로웨나와 오터를 보자,

안내하는 대신 비켜섰다. 로웨나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한 다음 저택 안

으로 들어섰다.

저택 안의 벽은 모두 검은 색으로 되어 있었다. 기둥들 뒤에는 성자

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 안의 성자들이 딱딱한 얼굴로 물끄러미

복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벌할 정도로 차갑고 검은 복도를 걸어, 진한 갈색으로 된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하게 되자 오터가 노크를 했다. 로웨나는 문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니콘 두 마리가 앞발을 높이 들고 서 있

었으며, 그 실루엣은 금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센스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통 검고 딱딱한 가운데, 이 두 마리의 유니콘은

금욕의 땅에 내린 금빛 빗줄기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로웨나는 더욱 놀라야 했다.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이었다.

“와아, 여기는 참 이상한 곳이군요.”

알렉산더가 웃으며 되물었다.

“뭐가?”

“집사가 아닌 다른 저택의 하인이 손님을 안내하고, 저택의 손님이

손님을 맞이하는 이상한 곳이군요.”

“언제나 말투는 귀엽군. 들어 와. 부인께서 기다리신다.”

로웨나는 더 묻지 않고, 백작에게서 눈길을 뗐다. 그 문이 통하는 곳

은 응접실의 문이었다. 문 앞에는 테이블과 벽난로가 마련되어 있

었고, 테이블에는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체스는 모두 양 끝에 일렬로,

전쟁 직전의 군대처럼 똑바로 놓여 있었다. 같이 둘 사람도 없

는데 왜 저런 걸 놓아 둔 걸까, 로웨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응

접실의 문 앞으로 갔다.

“그린 양, 주의 해 줄게 있는데.”

돌아보니, 백작은 양 끝에 놓인 체스말 중 기사의 말에 손을 얹고 있

었다. 흰 장갑을 낀 손이, 온통 검은 저택 안에서 지나치게 하얗게

보였다. 마치 뼈로 된 듯 보였다.

백작은 기사의 말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로웨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

개를 들어 백작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회색의 차가운 눈은 내

리깔고 체스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은 묶지 않고 늘어

뜨려, 어깨와 등으로 물거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싫은 사람, 로웨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싫은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마다 정

말 싫어진다. 저 사람의 흰 손에 여러 개의 끈이 매어져 있고, 그

것들이 하나하나 로웨나의 몸을 붙들어 조정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싫다.

“예의를 지키도록.”

그리고 백작의 엄청나게 싱거운 말에, 로웨나는 기가 막혀서 웃었다.

“상관 말아요. 저도 예법 정도는 잘 아니까.”

“어떤 상황을 보더라도 예의를 지키도록, 하라는 말이다.”

“당연하잖아요!”

로웨나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백작이 소리 없이 다가와 문을 두드

렸다.

“부인, 로웨나 츠에슬린 그레이브 양이 도착했습니다.”

안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잠시 뒤, 정말 예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해요.”

로웨나보다 두어 살 어린 소녀 목소리였다. 백작이 문을 열어주었다.

로웨나는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갔고, 백작역시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

작가잡설: 엄청나게 늦게 올리는 군요;;;

엄청나게 단순한 게임을 하다가 이리 되었...........

다음 편은 내일 모레입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