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편
구원의 악마#3
***************************************************************
로웨나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수도원보다 더욱 검고 딱딱한 저택이었건만, 이곳만은 카스톨
대궁전의 외제니 황후의 응접실처럼(물론 로웨나는 사진만 봤지만)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하얀 벽에, 금분에 덮인 화려한 장식이 온 벽과 모서리를 뒤덮고 있
었다. 흰 벽마다 눈부시고 다채로운 꽃과 덩굴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 벽에 걸린 그림은 성자들이나 성모 그레타가 아닌 이교도들의
아름다운 신들이었다. 에나멜로 색을 입힌 섬세한 도자기그림을
단 장식장과 시계는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도 그 화려함에 숨 막히
고 주눅들 정도였다.
“만나서 반가와요.”
다시, 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웨나는 응접실 중앙에 놓인 테
이블을 보았다. 그 위에 카드가 몇 장 놓여 있었고, 그 카드들은
집시들이 점칠 때 쓰는 것들이었다. 모두 뒤집혀 있었다. 그리고 카
드 뭉치를 섞고 있는 소녀는- 로웨나는 탄성을 지를 뻔 했다-비
스크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보통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재
질로 만들어진 듯한, 차갑고 섬세한 요정처럼 아름다운 소녀.
나이는 열다섯 정도 되었을까, 흰 피부에 도톰한 입술, 예쁜 코를 가
지고 있었다. 검은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큰 눈동자는 투명한 청
보라색. 드레스는 윤기 도는 핑크빛 비단이었으며, 붉은 레이스가
어깨와 가슴을 장식하고 허리로 쏟아져 치마를 휘감고 있었다. 그녀의
흰 팔목에는 검은 리본이 묶여 있었고, 카드를 섞을 때마다 그
리본이 유혹하듯 팔랑거렸다.
소녀가 고개를 돌려 로웨나를 바라보았다.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이 출렁였다. 붉은 리본이, 루비를 녹인 듯 새빨간 리본이 그 검은
머리카락 양 옆을 장식하고 있었다. 로웨나는 이 소녀가 대체 누
구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예쁘게 웃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모, 손님이 오셨군요.”
이런, 로웨나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어이가 없었다. 들어오자 바로
추기경 부인에게 인사해야 했는데, 이 소녀에게 정신이 팔려서 누굴
만나러 왔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고,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새카만 드레스를 입은 창백한 여자가 창가에 서 있었다. 거친 피부
에, 볼은 광대뼈가 살짝 도드라져 지친 듯 초췌해 보인다. 눈은 연한
초록색이었으나, 빛깔이 바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머리
카락만은 훌륭하고 진한 금발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단단히 틀어
올려 검은 리본으로 잡아매고 있었기에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꼼짝도 않고 있었다. 아주 창백한 얼굴의 표
정 없는 여인이 그리 서 있으니, 검은 목상처럼 보였다. 가는 목에
걸린 투란바코스의 십자가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듯 보였다. 창
백한 입술도 입혀놓았던 색이 낡고 바랜 조각상의 그것처럼 닫혀 있었다.
무표정하고 창백하여, 추레한 낡음- 퇴락한 저택 안뜰에 버려진 조
각상같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로웨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눈길을 내
렸다. 자신의 존재감조차 믿지 못하는, 그런 맥없는 눈길이었다.
“어서와요, 로웨나 양.”
“처음 뵙겠습니다, 코지마 부인.”
“그레이브 경의 딸이라고 들었어요.”
“네.”
“이혼한 전처의 딸이라고 하더군요.”
로웨나는 그녀가 사교계의 경박한 수다쟁이들과 인연이 없는 걸 다행
으로 여겼다.
“그리고.....그레이브 경이 카밀턴 경을 암살하려 할 때 무대에 있었다
고 들었어요.”
“....네.”
“아무도 당신의 증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도 들었어요.”
“네.”
로웨나가 들었던 것은 아주 오랫동안 입 닥쳐 달라는 것 정도였다.
“묻겠어요, 그레이브 양. 달리 특별한 걸 보지는 못했나요? 꼭 말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말할 곳이 없어서 침묵해야 했던 게 있습니까?”
“아뇨.”
로웨나는 고개를 저었다. 로웨나가 본 것은, 아버지 그레이브 경이
카밀턴 옆에게 권총을 겨누는 것뿐이었다. 외칠 틈도 없었다. 권총은
당장에 발사되었으며, 음악이 그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아비규환. 갈가리 찢긴 듯, 그렇게 시간이 엉망진창 뒤죽박
죽 흘렀다.
“긴장하지 마세요, 이건 형식적인 만남이었을 뿐입니다. 어린 당신을
질책할 생각도, 괴롭힐 생각도 없으니까요. 그레이브 양, 그러하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예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때,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 붉은 입술로 가만히 웃더니, 코지마
를 향해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코지마는 그 빛깔 없는 눈으로 카
드를 흘끔 보더니 바로 뒤집었다. 카드의 그림은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무엇을 하는 걸까,
로웨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기분 나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코지마가 말했다.
“이 아이는 제 조카랍니다. 이름은 클로디유 데지레. 다음 주에, 이
브란 카스톨의 사교계에 데뷔할 거랍니다. 그 동안 아스카망의 영
지에서 살고 있었지요.”
목소리가 어쩜 저리 또랑또랑할까, 마치 종이 울리듯. 연극배우를 하
면 누구보다 훌륭할 듯 했다. 물론 연기력이 출중하다는 전제하에.
“오페라 가수라고 들었어요. 혹시, 음악학교 다닐 때 가정교사 해 본
적 있나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레이브 양.”
“그린입니다.”
로웨나는 힘주어 말했다.
“제 이름은 로웨나 그린입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식으로 이혼
했고, 제 친권은 어머니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성은 로웨나 그린
입니다.”
잠시, 코지마가 로웨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순간에, 그 눈 안에 생
명력 같은 것이 치솟은 듯 했다. 호기심과 반가움, 또는 아주 즐거운
사람을 본 듯한 기쁨 같은 것이었다. 호의였다. 로웨나는 이제는
그녀가 아름다운 클로디유보다 더 좋아졌다.
“좋아요, 그린 양. 피아노는 칠 줄 아나요?”
“네.”
“바이올린은?”
“그건 못합니다.”
“좋아요, 그 정도만도 충분합니다. 많은 시간을 빼앗지는 않겠어요.
그린 양, 일주일 마다 한번 씩 이 집에 들러주었으면 해요. 저와
클로디유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해 주고 제가 좋아하는 아리아를
불러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클로디유에게는....... 숙녀로서 부끄러
움이 없을 정도의 피아노와 노래를 가르쳐 주세요. 수업료는 넉넉
하게 드리겠어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로웨나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주말에 들러 주시면 좋겠어요. 돈은 시간수당으로 계산해, 그날 드리
겠어요. 시간당 30카스티야. .......괜찮을까요? 죄송해요, 가정교사를
두어본 적이 없어서. 적다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로웨나는 입을 자악 벌릴 뻔 했다. 그건 로웨나의 출연료보다 많았
다!! (로웨나의 출연료는 시간당 20카스티야였다.) 로웨나의 머릿
속에 재빨리 주판알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씩이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될 테니 60카스티야. 2주일이면 120카스티
야. 한달이면 240카스티야다!!! 거의 꿈의 숫자에 가까운 돈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불안하기도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명 오페라
가수에 불과한 로웨나에게 저렇게 큰 돈을 준다고 하는 걸까?
“저, 그 액수는 너무 많습니다.”
코지마가 웃었다.
“많은 것이 적은 것보다 낫지요. 그렇다면 금액은 그렇게 하도록 하
지요. 어떤가요. 승낙하실 건가요?”
로웨나는 멍하니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멍
청하게 서 있는 건, 로웨나에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승낙으로 받아들인 코지마가 말했다.
“집사에게 말해 놓겠어요. 나가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집사가 마차를
준비해 줄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사람을 보내 알려드리겠
습니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로웨나 그린 양.”
로웨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응접실을 나갔다. 오늘 무슨 날인가? 아침
부터 저녁까지,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난리도 아닌 하루다.
나와 보니, 알렉산더 백작은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체스판
앞에 앉아 있었다. 자기 집 서재에 있는 듯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가
먼저 물었다.
“끝났나?”
“네.”
알렉산더는 테이블 앞 의자에 걸린 망토를 집었다.
“데려다 주지. 어차피 나도 곧 갈 예정이었고.”
“몇 가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내키는 대로.”
“클로디유 데지레라는 숙녀분은 대체 누구시지요?”
“말 안하던가. 부인의 조카라고.”
“물론 거짓말이겠지요. 아씨와 하녀 같은 분위기던데요. 차라리 부인
을 협박하는 사기꾼 아가씨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대체 뭐에요?”
로웨나는 마치 명령하듯 추기경 부인에게 카드를 집어던지던 클로디
유를 생각했다. 그것이 대체 어떤 명령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코지
마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 로웨나에게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 말한
것이다.
“멋진 표현이군. 그 누구도 저 클로디유에게 그런 표현을 쓰지 못할
테니, 더없이 듣기 좋아. 유감스럽게도, 나도 며칠 전에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고, 그린 양이 느낀 것과 똑같은 것을 느꼈지. 그래서 아
까 주의하라고 한 거야. 누구라도, 무의식 적으로라도 클로디유를
아씨로 대하고 코지마 부인을 하녀로 대할 것 같아서.”
“저는 그런 멍청이는 아니에요. 하지만 처음에는 좀 실수를 했어요.”
“다행이군.”
그러나 만약 사교계 모임에 코지마와 클로디유가 같이 나간다면, 모
든 사람이 그렇게 대할 것이다. 코지마의 기분이 어떨지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왠지 자신과 에닌의 관계가 생각난다. 어렸
을 때부터 둘은 붙어 다녔고, 그랬기에 로웨나를 향해 쏟아지는
비웃음과 경멸의 눈초리는 혼자 있을 때보다 더욱 심했다. 저 못생
긴 아이가 어떻게 저 예쁜 아이와 붙어 다니는 걸까? 자기 얼굴은
생각하지도 않는 거 아니야? 맙소사, 내가 저 애 엄마라면 집안에
서 내 보내지도 않을 텐데.
“일단 바래다주지.”
로웨나는 작게 고맙다고 답하고는 그를 따랐다. 밖에서 오터가 기다
리고 있다가, 로웨나와 알렉산더가 같이 나오는 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앞장섰다.
마차는 아직도 현관 앞에 있었고, 로웨나는 그의 마차에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밤은 더욱 깊은 듯 했다. 로웨나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마
차가 멈추자마자 직접 문을 열고 내렸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다음에 보지.”
“데이트 신청이라면 미리 거절해 드리지요.”
“그건 아니니 기대하지마. 그리고- 뭐, 당분간은 만날 일도 없겠군.”
“어디로 떠나시나요?”
“지난번에 투자한 광산에서 사고가 일어났다고 하더군. 그곳 광산경
영주인 발터 스게노차가 대리인을 보내 달라고 해. 치안부대에서
손을 써 주지 않으니, 아무래도 용병들을 고용해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 내가 가기로 했지.”
다른 사람 시켜도 될 텐데 왜 직접 가는 걸까, 로웨나는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발터 스게노차 씨라면, 제 아버지놈 고향 친구분이시네요.”
“이제는 존칭 좀 붙여 주라고. 더 괴롭힐 일도 없으니. 맞아, 마그레
노에 있을 때부터 그린 양 아버지와 꽤 친하게 지냈었지.”
“안부나 전해 주세요. 그리고 백작님도 잘 다녀오세요.”
“영광이군. 그린 양이 내게 작별인사도 다 하고.”
“그것 참 감사하군요.”
로웨나는 직접 마차 문을 닫고 돌아섰다. 초라한 빈민가의 아파트는
떠났을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사는 꼭대기 층을 보니,
로웨나의 집은 아직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오늘도 미하일은 들
어오지 않은 것이다.
로웨나는 현관으로 들어서 우편함을 살폈다. 그런데, 평소라면거의
비어있는(청구서를 제하고) 우편함에 편지가 한통 있었다. 로웨나는
급히 그것을 뽑았다. 재생지로 된, 아주 값싼 봉투였다. 그리고 우
표 위에는 파난의 우편도장이 찍혀 있었다. 로웨나는 발신인을 보았다.
-파난 특무부 서부군 소속 하사 유릭 크로반.
로웨나는 급히 봉투 끝을 뜯어, 편지를 꺼냈다. ‘검열 완료’ 라고 적
힌 도장이 편지지 정중앙에 찍혀 있었다. 로웨나에게- 그 첫줄을
읽게 되자, 로웨나는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
작가잡설: 결론은 로웨나 대 알렉의 구도라는 것;;;
다시 로웨나 승!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