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편
구원의 악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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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은 급히 앞을 보았다. 마물들의 살덩어리 위로, 거대하고 화려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소환진이다. 부관은 그 순간에 그렇게 생각했다.
왜곡된 의지, 그 중에 인격을 가진 힘을 인식하여 마법진 안에 가둔
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봉인된 마령들이, 저 소환진을 통해 이
세상으로 다시 뛰쳐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핏빛 빛줄기가 마법진에 내리박혔다.
부관은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려 했다. 흑마법사에 의해
통제되는 마령들이란, 저 앞에 있는 파난 섬의 어그러진 마력의 자
기장에 의해 왜곡된 생명체들과는 질적으로 틀릴 것이다. 보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고, 느끼고 싶었다.
마법진이 거센 빛을 발했다. 병사들은 벌써 엎드려 웅크리고 있었다.
부관은 벽에 등을 바짝 붙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빛이 솟구치며 주변을 휩쓸었다. 붉은 칼처럼 난도질했다. 촉수들이
끊겨 나가며 까맣게 타올랐다. 앞의 괴물이 물에 녹듯이 빛에 녹아
사라졌다. 살점이 터졌지만, 그것들 모두 타 사라졌다.
주변은 순식간에 씻기듯 변했다. 마물들이 불타 사라지고, 아비규환
의 비명역시 멎었다. 노을빛섬광이 주변을 뒤덮고, 거센 바람은 이미
멎은 지 오래였다. 부관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말이 한 마리 있었고, 그 옆에 검은 장교복을 입은 키 큰 남자
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긴 활이 들려 있었고, 이제 막 활시위를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부관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70먹은 할머니도 비명을 지를 만한 미청년이었다.
허리까지 기른 긴 검은 머리에, 길고 검은 속눈썹에 둘러싸인 눈은
찬란한 금빛이었으며, 그 동공은 칼을 세운 듯 날카로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단단해 보이는 넓은 어깨와 허리에는 쇠사슬이 교차로
감겨 있었다.
남자는 활을 내렸다. 몸을 감은 쇠사슬이 철그렁댔다. 남자가 부관에
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지휘관은?”
아주 짧은 질문이었다. 부관이 답하기도 전에 소령이 헐레벌떡 달려
왔다.
“검은 협곡 치안부대 소속 렉스 쉐크 소령이다.”
“크리스펠로 침버, 대위.”
조사고 뭐고 모조리 생략이었다. 짧게 몇 단어만, 매우 경제적으로
말한 크리스펠로 대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크리스펠로의 뒤
에서 장교복의 소년이 나타났다. 나이는 고작 열 일고여덟 되었을까,
부관보다도 어려 보였다. 그러나 어깨와 가슴의 계급장은 분명
하사였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지휘관인 소령에게 말했다.
“유릭 크로반 하사입니다. 지금 당장 치안군을 퇴각시켜 주십시오.”
소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계급이 한참이나 바닥인 하사, 그것도 꼬맹
이나 다름없는 소년이 그렇게 말하니 매우 기분나빠하는 것이 당연
했다. 소령은 유릭에게서 눈길을 돌려, 크리스펠로 대위를 보았다.
그러나 대위는 무관심한 눈으로 소령을 보고 있다가, 그를 가리키며
유릭을 보았다. 해석을 하자면 유릭, 이 사람이 뭔가 원하는 게 있
는 것 같은데, 정도였다.
유릭이 말했다.
“어서 퇴각시키십시오. 시간 없습니다.”
“하사, 자네가 뭔데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건가.”
“그야, 제가 이 파견군의 지휘관이니까요.”
“뭐?”
유릭이 갑자기 권총을 뽑았다. 소령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캉, 하고
권총이 발사되며 푸른 섬광이 허공을 뚫었다. 그제야 부관은 방금 전
마령을 처음으로 명중시켰던 것이 그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공
이 뚫렸는데, 그 허공을 중심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번지더니 바닥
으로 툭 떨어졌다. 유릭은 총구를 내려 그것을 쏘았다. 캉, 하는 총
성과 함께 그것이 펄쩍 뛰듯이 튀어 올랐다가 축 처졌다.
“암만.”
소년의 기도하는 듯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 위로 푸른 마법진
이 확 번졌다. 그리고 윙, 하고 믹서 돌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그
그림자를 산산조각 냈다.
“일단, 치안군 전체를 이 곳을 집중시켜 주십시오. 단 한사람도 이 근
방의 광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다시 유릭이 팔을 휘두르더니 이번에는 하늘을 향해 총을 쏘
았다. 캉, 꽥! 바닥에 방금 전과 똑같은 그림자가 소령의 발 옆에
철퍽 떨어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명령을 내리십시오.”
소령은 여전히 유릭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막 병동으로 쓰는 시
청을 돌아보았는데, 그 문 앞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소녀가 서 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열 너덧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로, 종이처럼 창백한 얼굴에 새카만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젖살이 그대로 남아 볼이 둥글고
귀여운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정화 사제단의 사
제복이었다.
얼굴이 마주치자 소녀가 가슴 위의 투란바코스의 십자가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서부 사령부 소속 수호사제, 시스터 에바. 지금 도시는, 상부의 명에
따라 병동과 광장을 제하고는 전파될 것입니다.”
목소리는 앳되었으나, 그것이 더 소름끼칠 정도로 감정 없는 목소리
였다. 대리석 같은, 차디차고 단단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소령은 화가 치밀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직 도시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 빌어먹을, 전파라니! 미쳤
냐!”
시스터 에바의 목에 걸린 투란바코스가 떠올랐다. 환희와 같은 푸른
빛이 퍼졌다.
“현 도시 안의 생존자는 15명.”
소녀의 검은 눈이, 그늘에 웅크린 짐승 눈처럼 쉴 새 없이 반짝였다.
그녀의 투란바코스가 그리는 푸르스름한 빛의 원 위로, 도시의 모
습이 떠오르고 그 위로 십 수개의 점들이 빛났다. 거의 대부분이 붉
은 색이었으며, 단 세 개만이 흰색이었다.
“열두 명은 정화불가. 지침에 따라 토벌. 세 명은 아직 생존. 1시 방
향, 모두 모여 있습니다.”
순간, 푸른 원의 색이 어두워지며 차츰 붉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야겠군.”
유릭이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염 상태로 봐서 최소 15분, 최대 20분. 에바, 그곳까지의 거리는?”
에바가 답했다.
“하사님은 그 안에 불가능합니다. 카바냐 중위님도요. 그 시각, 이 거
리. 크리스펠로 대위님이라면 가능하겠지요.”
“그렇다면 10분.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유릭이 크리스펠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크리스펠로가 도시 쪽으로 달
려가기 시작했다.
죽으려고 환장했다, 부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10분 안에? 말도 안돼!
그러나 그 말은 입술을 떼기도 전에 쏙 들어갔다. 크리스펠로의
몸이, 노을빛 번지는 도시의 도로 위에서 갑자기 변했다.
“어라?”
옆의 소령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쩍 벌리며 비명 비슷한 신음소리를
냈다.
이곳을 떠난 것은 크리스펠로였으나, 지금 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은
키 큰 흑발의 남자가 아니었다. 시커먼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였다.
그의 가슴을 교차로 묶고 있던 쇠사슬이, 이제 늑대의 등과 가슴
을 십자로 감싸고 있었다.
“펜리키언...!”
부관이 기겁하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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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아마도 누구누구와 동족.... 이겠지요. -_-
어쨌건, 크리스의 정체는 흑늑대입니다, 흑늑대~
와아, 벌써 100회가 되었네요;; 맨날 길게 쓰다 보니 이제는 100회가
되어도 되는 갑다, 그런갑다~ 랍니다;
그래도 축하해 주십시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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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