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04화 (104/174)

제104편

광산의 소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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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당장에 출발준비를 했다. 1층 식당을 지

나치다 보니, 아직도 에바가 우유든 오트밀을 노려보고 있었다.

“돌아올 때 까지는 다 먹어라.”

그렇게 말하는 유릭을, 에바는 원망어린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테이블

을 뒤집어엎거나 사발을 집어던진다거나, 하는 편식 심한 아이들이

의례히 하는 반항은 하지 않았다. 저런 상황으로 나간다면 눈빛

만으로도 우유를 다 말려버릴 거라 생각하며, 유릭은 부대를 출발하

여 익스턴으로 향하는 기차에 탔다.

몸을 싣고 지원요청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특이한 건 없었다. 광산과

마을 주변에서 계속 사고가 일어나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마침내

채굴이 중단된 상태다. 치안부대가 주둔중이긴 하나 아직도 별다른

원인은 알아내지 못했다, 계속 천년만년 중단시킬 수만은 없으니

이렇게 특무부로 지원요청을 한다.

유릭은 그래도 광산주가 굉장히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비슷

한 사건이 일어나도, 이렇게 채굴을 중단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사

고가 나든 말든 일단 목표량부터 채우는 것이 광산주들의 상식이었다.

유릭은 기차 안에서 파는 샌드위치로 대강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에, 기차가 익스턴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눈을 붙였다.

쿠르릉 천둥치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기차는 먹구름 잔뜩 낀 저녁

하늘을 꿰뚫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창밖에 ‘익스턴’이라고 적힌

화살표 모양의 팻말이 서 있었다. 유릭은 하늘을 본 후에, 아무래

도 저녁에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비용 망토를 꺼냈다.

승무원이 다음 역은 익스턴, 익스턴, 하고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

르고 지나갔다. 유릭은 망토에는 특무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일어나 기차가 멈추기도 전에 입구 쪽으로 갔다.

기차는 수송용 화물열차가 잔뜩 대기하고 있는 작은 역에 도착했다.

광산촌답게, 기차역에서 내리는 그를 반기는 것은 험준한 산과 시뻘

건 협곡들이었다. 바람마저도 차고 습했다. 참 낯선 곳이라 생각하

다가, 왜 낯선지 알게 되자 유릭은 잠시나마 안심했다. 익스턴은, 지

난 내란사건과 그 이후로 벌어진 소탕과 토벌전에서 단 한번도 이

름이 오르내리지 않은 곳이었다. 즉, 이곳에서는 단 한건의 토벌도

학살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 판단하니, 유릭은 그 광산주에게 존경

비슷한 감정마저 들었다. 광산촌의 광산주라면 촌장이나 시장이나

다름없는 위치다. 희생자가 없는 것은, 아마도 그가 노력한 덕일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임무는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유릭은 역 앞에 단 한대 있는 역마차를 잡아타고 익

스턴의 광산으로 향했다.

“아, 그분이요? 정말 좋은 분입니다. 이 지역에서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던 것은, 모두 그분이 노력하신 덕이지요. 광산 광부들과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간절히 부탁하셨지요. 어떤 분노가 여

러분의 가슴 속에 있는 지 안다, 어떤 슬픔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있는 지도 안다, 하지만 당신들 중 단 한명이라도 죽는 다면 나는

매우 슬플 것이다.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내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만큼은 편하게 살게 해 주겠다. 그러니......... 반란

에는 절대 가담하지 말아 달라. 아주 좋은 분이에요.”

익스턴 광산의 광산주에 대해 묻자, 젊은 마부는 굉장히 열광적인 말

이 나왔다. 그러며, 그 마부의  삼촌도 광산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월급은 다른 광산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편인데, 광부인 그의 삼촌

은 그 돈으로 부인과 세 명의 아이들을 단 한 끼도 굶기지 않고 먹

여 살린다 했다.

“다른 광부들 월급의 두 배를 주신다고요. 다른 곳에서는 광산기사나

십장이 되어야 그 정도를 받는데 말이지요!”

영리한 사람이네, 유릭은 그리 판단했다.

총칼과 협박보다는 돈이, 그리고 그 돈으로 편하게 살게 된 가족들의

눈동자가 더 강한 무기라는 것을 이 경영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것이다. ‘강압은 아랫것들을 단합시킬 뿐이다. 돈을 주어라. 물론

차등을 두어서. 그러면 그들은 알아서 흩어질 것이다.’ 누가 했던

말이더라, 유릭은 기억나지 않자 다시 임무로 돌아가기로 했다.

“최근 그곳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마부가 당장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도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사장님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세요. 그

런데 그놈의 치안 부대 녀석들은- 휴. 하긴, 치안부대에서는 손해

보고 있었지요. 다른 광산이나 공장에서처럼, 보호세 명목으로 돈을

받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반란군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번에 사

고가 터지니 너 한번 골탕 먹어 봐라, 하는 듯 치안군을 보내지도

않고, 보낸다 하더라도 멍청한 신병 두어명과 어리버리한 사관 한

놈만 보내서 슥 훑어보고 이상 없음, 하고 내빼더란 말이에요.

이런 젠장맞을 자식들.”

광산이나 공장에 반란군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사장까지 반란가담자

로 엮어가던 말던 그 지역 치안부대 지휘관 마음이었다. 파난에는

경찰이 없으며, 따로 만들어진 치안군이 치안을 담당한다. 재판은

단 한번, 변호사는 둘 수 없으며, 재판관역시 법전한번 훑어본 게

전부인 치안군 장교다. 합법적인 판결이 날 거라, 그 누구도 기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장주나 광산주들이 그곳 치안부대장에게 잘

보아 달라 하며 돈을 찔러주는데, 그것을 보호세라고 한다.

유릭은 프리델라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평소

대로라면, 사람들을 상대할 일이 많을 것임에 분명한 체스턴으로는

유릭을 보내고, 한산한 광산촌으로는 크리스펠로를 보냈을 것이다.

프리델라 정도면 지원요청서만 읽어봐도 상황이 어떤지 파악한다.

그러니 지금 이 익스턴의 상황을 파악하고 유릭을 보낸 것이다.

어느덧 마차는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 회색 흙길로 들어섰다. 한창 여

름물이 오른 싱싱한 풀이 길게 자라고 있었다. 마부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익스턴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지원요청을 받아서요.”

“젊어 보이는데, 광산 기사입니까? 광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놀

랍군요. 사장님이 웬일로 외지인을...”

“지원‘군’ 입니다.”

마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유릭을 보았다. 유릭은 말없이 망토를 열

어젖히고, 특무부의 표시와 하사의 계급장을 보여주었다. 마부가

시퍼렇게 질리며 달달 떨기 시작했다.

“서부사령부소속 특무부에서, 이곳 익스턴 치안부대의 지원요청을 받

아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기, 여기 지리는 제가 잘 모르니까 치안부대 앞까지 태워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던 유릭은 그만두기로 했다. 마

부의 손에서 고삐가 툭 떨어졌고, 말은 제멋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는 이리저리 빙글 빙글 돌기 시작했으며, 그럼에도 길은 도끼

로 파낸 듯 험준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도착하기도 전에

마차사고로 실려 나갈 것 같았다.

“여기서 내리지요.”

유릭은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잠시 뒤, 마부가 “으악! 으악,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간신히 말고삐를 잡고 미친 듯한 속도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러다 사고라도 안 나면 다행이겠다, 그

리 생각하며 유릭은 터벅 터벅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좀 걸어가니

‘익스턴 광산’ 이라고 적힌 팻말이 있었고, 그 아래에 적힌 거리를

보니 그리 멀지도 않았다. 유릭은 회중시계를 꺼내어, 지금이 오후

여섯시 반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

무래도 치안부대에 도착하면 아홉시나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을 확인하니 갑자기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뜨끈한 스

프와 샌드위치가 간절해졌다. 가다가 여관이라도 있으면 저녁을 해

결할 수 잇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막 모퉁이를 도는데 그곳에 작

은 회색 천 뭉치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유릭은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천 뭉치가 나비 날개처럼 활짝 펴지더

니 그곳에서 불쑥 튀어나온 비쩍 마른 팔이 유릭의 망토를 움켜잡

았다.

“자고 가세요.”

계집아이 목소리였다. 그것도 열 두엇 정도밖에 안 된 듯한.

“곧 비가 와요. 수프랑, 고기랑, 감자랑, 술도 있어요. 저희 집에서 자

고 가요.”

고개를 내리니, 허름한 회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유릭의 망토를 붙

들고 있었다. 자루 같은 치마를 입은, 비쩍 마르고 지저분한 여자

아이였다. 머리는 옅은 금발이었고, 주먹만한 얼굴은 지저분하고

창백했다. 그러나 크고 푸른 눈동자는 비스크 인형의 유리 눈동자처

럼 아름다웠다. 유릭은 그 작은 얼굴에 잔뜩 묻은 먼지가 왠지 안

쓰러워 손으로 직접 닦아냈다. 왠지 에바의 옛날 모습이 생각났기 때

문이다. 소녀의 눈이 커졌다.

“집이 어디지?”

“여관이에요. 예쁜 니나 언니가 있고, 아저씨들이 그 언니를 아주 좋

아해요. 아주머니도 좋아요.”

“미안하지만, 나는 잘 곳이 정해져 있어. 말은 고맙지만, 사양해야겠

구나.”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비가 뚜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녀

가 하늘을 가리켰다.

“봐요, 비가 오지. 그러니 우리 집에서 자야해요.”

“이름이?”

“리시. 자넷 아줌마는 그렇게 불러요. 하지만 사실은 더 길어요. 제가

다 기억하지 못해서, 그냥 리시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래서 아줌

마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지요.”

뭐라고 하는 건지, 유릭은 도무지 요점을 잡지 못해 통 헷갈렸다. 그

런데 소녀의 이마와 머리카락 위로도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물이 소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며, 지저분한 땟국이

좁은 개울물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유릭은 망토를 들어 소녀의 머

리를 덮었다.

“일단 너희 집까지 데려다 주지. 거기까지는 같이 가자.”

“여기서 안 멀어요. 가요.”

그러며 리시는 유릭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앞으로 밀었다. 유릭은

망토의 후드를 집어 머리에 쓴 다음, 소녀의 어깨를 안아 당겼다.

손에 잡히는 소녀의 어깨는 나뭇가지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오빠는 옷이 이상하네요. 단단하고 깜장 옷. 그런데 이거 뭐죠?”

소녀의 손이 유릭의 권총을 더듬었다. 유릭은 소녀의 손을 잡았다.

“건드리지 마.”

“와아, 오빠 손은 따뜻하네요. 만지면 기분 좋아지는 손이에요.”

리시는 더 이상 권총을 건드리지 않고 유릭의 손을 잡았다. 마르고

찬 손이었다.

“오빠는 집에 가면 니나 언니랑 놀지 말아요. 마을 오빠 아저씨들은

니나 언니하고 만나면, 니나 언니 하고만 친해져요. 오빠는 나하고만

친해지면 좋겠어요. 오빠는 니나 언니랑 놀지 말아요.”

아무래도 그 니나 언닌지 뭔지 하는 여자는 여관에 머무는 창녀이거

나 종업원일 것이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무래도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리시랑 약속해요. 거기 가면 나하고 놀아주기로.”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하고 약속이 되어 있단다. 너하고 못 놀

아.”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유릭은 후드를 위로 살짝 걷으며

앞을 보았다. 거세어지는 빗줄기 속에, 흐릿하게 마을의 불빛이 보

였다. 그리고 근처에도 불빛이 있었다. 소녀가 외쳤다.

“우리 집이 저기 있어요! 우리 집이 저기 있어요! 어서 가요!”

유릭이 채 살피기도 전에, 소녀는 유릭의 허리를 밀어젖혔다. 힘으로

버티면 못 버틸 수도 없었지만, 작고 마른 소녀는 상대로 힘쓰는 건

치사하게 생각되어 소녀가 이끄는 대로 가기로 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저녁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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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열심히 만화책 판 하루~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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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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