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편
디스토피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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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꼴 우습게 만드는 군. 기껏 비싼 돈 주고 용병들을 불러 왔더
니, 불러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특무부로 지원요청이라니.”
발터 스게노차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유릭은 대꾸 없이 햄과 치즈를 먹고, 스튜도 깨끗하게 비웠다. 용병
들은 도박을 집어치우고 유릭과 그들의 고용인인 발터와 알렉산더를
보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유릭과 알렉산더를 보던 주근깨 소년은,
지금은 더욱 열렬한 눈으로 셋을 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유릭은 쭈그리고 앉아 있던 리시를 불러 접시를 건네주
었다. 꼬마가 그릇을 받고 있는데 발터가 리시에게 물었다.
“자넷은 뭐 하고 있는 거냐.”
“오늘 아프셔서 쉬면서 일하세요.”
“그래? 그럼 피곤할 테니 안 되겠군. 그냥 술과 안주거리 몇 개 좀
내 와라. 그건 너 혼자 할 수 있지?”
“네!”
리시는 그릇을 가지고 작은 다람쥐처럼 잽싸게 부엌으로 갔다. 발터
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내뿜었다. 잠시 아무 말도 없
더니, 결국 한숨을 내 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 유리 크로반 군.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수고하러 온 거니........
부탁할 게 있는데, 혼자 왔다면......... 저 친구들과 서로 잘 도우면서
했으면 좋겠어. 혈기 왕성한 사내놈들 끼리 치고 박는 건 정말
질색이거든. 꼴불견이기도 하고. 게다가 나는 하루라도 빨리 채굴이
재개되었으면 한다고.”
유릭은 살기등등하게 앉아 있는 용병패거리들을 보았다. 유릭의 소속
이 알려지자마자, 발정기 들고양이들처럼 호전적으로 변해 있었다.
별로 협조적일 것 같지는 않군요, 유릭은 속으로 울적하게 중얼
거렸다.
“저 사람들이 전문가이니, 내가 백번 설명하는 것 보다는 낫겠지. 그
리고..... 어이, 폴.”
그러자 용병들 패거리 속에서 키가 땅딸막하고 어깨가 다부져 보이는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진한 곱슬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턱의 각이
강하게 진 남방계 혼혈 같아 보이는 남자였다. 발터가 그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청년은 이곳의 광부 십장중 하나이지. 광산 안으로 들어가면 저
사람이 안내해 줄 거야.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봐.”
그 광부청년의 눈에는 경계와 싸늘한 적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무엇을 그리도 참기 어려운지, 끝에 때가 까맣게 낀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거리다가 낡은 옷자락을 잡아당기곤 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
앉은 금발 머리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알렉산더가 저 패
거리의 마법사라 가리켰던 그 남자였다. 그 때는 등을 돌리고 있어
서 몰랐으나, 이제 보니 그 남자는 한쪽 얼굴을 검은 안대로 가리
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혹시 파난 서부의 ‘초토화 4인방’ 아닌가? 우리사이에서 꽤 유명한
데.”
유릭은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이제 3인방이랍니다. 카이슐츠 소위가 처형되었으니.”
남자의 입술이 일자로 꽉 맞물렸다. 턱의 근육이 불끈 솟아올랐다.
용병들의 눈이 반짝였고, 입가에도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주근깨
소년의 얼굴이 가장 빛나고 있었다. 잠시 뒤, 남자는 느긋하게 턱
을 문지르고, 빙그레 웃었다. 이런 식의 대치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유릭은 테이블에 놓인 열쇠를 집어 들었다.
“이만 자러 갑니다.”
그리고 막 일어나려는데, 꼬마 리시가 술병과 안주를 들고 왔다.
“아줌마가 곧 나오신데요! 맛있는 거 해 주신데요!”
알렉산더가 병의 코르크를 뽑으며 말했다.
“그냥 앉아 있어, 유리. 이곳 여주인의 음식은 정말 굉장하거든.”
유릭은 여전히 안대를 한 용병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이제
팔짱까지 끼고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다. 유릭은 알
렉산더를 보았다. 알렉산더는 이제 발터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발터의 노르께한 얼굴은 오늘만큼은 희고 창백해 보였
다. 유릭은 다시 안대의 남자를 보았다. 그는 웃고, 어깨를 으쓱하
고, 턱을 문질렀다.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던 소년의 얼굴이 갑자
기 창백해졌다. 부하들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긴장하고 있
으면서도 무언가를 은근히 기대하는 듯, 숨죽이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유릭은 조용히 앉아 귀를 기울였다. 빗줄기 소리는 여전히 거세었다.
밀림속의 폭포처럼. 사막의 모래바람소리처럼. 유릭은 테이블 위에
안주 접시를 놓는 리시에게 말했다.
“리시, 문 좀 열어줄래?”
“네?”
“문 열어 달라고.”
유릭이 꽉 닫힌 문을 가리키자, 리시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문을 열어
젖혔다. 밖은, 엄청난 빗줄기가 할퀴는 까만 어둠에 잠겨있었다. 빗
방울이 여관의 불빛에 비늘처럼 반짝였다. 유릭은 권총을 뽑았다.
용병들이 일제히 일어나, 자신의 총과 칼을 들었다. 그러나 유릭은
문밖으로 총구를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캉-! 후려치는 듯한 총
성이 터졌다.
“암만.”
순간, 빗줄기 속으로 빛의 마법진이 커다란 눈동자처럼 나타났다. 빗
줄기가 터지고, 그 물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 십 개의 칼
날의 번득임 같은 반짝임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어둠 속에
서 무언가 아주 덩치 큰 것이 후려 맞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저적-
뼈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발터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리시가 도망치려다가, 알렉산더의 손에 붙잡혔다.
유릭은 총구를 돌려 안대의 남자를 겨냥했다. 용병들이 일제히 그들
의 총구를 겨냥하고, 칼을 든 자도 달려와 유릭의 목에 그 칼날을
댔다. 유릭이 말했다.
“리시, 이제 문 닫아도 된다.”
리시가 알렉산더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문을 닫았다. 빗줄기 소리
가 그치고, 이제 여관 안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문 겁먹은 아이
같은 침묵뿐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릭을 지켜보던 주근깨 소
년만은 무언가 묻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남자가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자, 민간인거주지역에서 이렇게 마령을 불렀으니 나를 체포할 건
가?”
유릭은 말없이 권총을 거두어 권총집에 꽂아 넣었다. 그로서는 상대
하기도 귀찮은 도발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웃어젖혔다.
“내 이름은 조셉 콘라드. 어이, 모두 총 내려. 다른 놈은 몰라도, 특
무부는 건드리지 말라고. 우리 없는 곳으로 가서 돈도 못 받고 죽
도록 고생하는 불쌍한 놈들이니까 불쌍히 여기라, 이 말이다. 자,
어떤가. 우리와 한잔 하는 게.”
“저는 6시에서 9시 사이에 술 마시다가 들키면 바로 사살이랍니다.”
“그 죄목으로 사살되었다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야, 정말 사고를 치지 않는 한 봐주기 때문이지요. 정말 그 법규를
준수하여 일일이 죽였다가는, 아마도 당신들이 떼 돈벌거나 파난
사람들이 다 죽어나가거나 둘 중 하나랍니다. 하지만, 어쨌건 저는
피곤하군요. 사양합니다.”
용병들이 다시 왁자하게 떠들며, 도박판으로 돌아갔다. 조셉 콘라드
역시 다시 카드를 섞은 다음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
근깨 소년은 여전히 유릭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조용해지자, 발터가 유릭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술을 마실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대략 3분 전인 것 같은데 이렇게 따라주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발터라는 남자는 굉장히 정신이 나가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유릭은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해봤자 미움밖에
더 받겠는가). 발터가 단숨에 한잔을 비우고는 말했다.
“유릭 크로반 군, 나는 자네 아버지를 알고 있네.”
“.....백부님과도 아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발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노버스 씨와는 별로 사이가 좋지는 못했지.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자네 아버지를 아주 좋아했어. 야학교에서 자네 아버지에게
배웠네. 정말 좋은 분이셨지. 암, 좋은 분이고말고. 대학에서 강의까
지 하던 분이, 항구 노동자 소년들을 가르쳐 주셨는데.... ”
발터는 다시 잔을 비웠다.
“하지만 그분이 그렇게 되셔서........정말 안됐네. 마법과는 전혀 상관
없는 선량하고 성실한 분이셨는데, 대체 왜..... 아니, 관두지. 자네도
듣기 힘들 테니. 그래도.... 나는 자네 아버지에게 감사해.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시답잖은 항구 노동자중 하나로 늙고
있을 거야. 덕택에 장부 정리 같은 것도 할 줄 알게 되었고, 상회
사무실에 들어가서 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이렇게 됐지.”
그리고 그는 다시 잔을 따라 비웠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명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유릭은 어렵잖게 그가 유릭
자신, 그리고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아버지와 백부 때문에 불안
해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는 홀라그로 성
에서부터, 마그레노와 크로반- 이라는 성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과 관련된 그의 과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왜일
까. 가난해서? 비참해서?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건 부끄러움
이지 두려움은 아니다.
“도움 받을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연락하게. 뭐든 도와주겠어.”
어쩐지 되는 대로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다시 거푸 술을 들이
켰다. 무언가가 생각나려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려는 듯한 몸짓
같아 보였다, 그것은. 그의 집 문을 쾅쾅 두드리는, 옛 죄의 댓가
를 받아가려는 유령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웅크려 떠는 자의 몸부
림 말이다.
유릭은 자기도 모르게 알렉산더를 보았고, 알렉산더는 말없이 발터를
보고 있었다. 그의 잔은 여전히 가득 찬 그대로였다. 취기가 도는 지
발터의 누르께한 얼굴에 약간 핏기가 돌았다. 그런 얼굴을 보게
되자, 유릭은 그제야 이 발터 스게노차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젊
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밀턴 경과 동갑이거나 그보다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더 젊은 듯 했다. 아니, 어쩌면 옆의 알렉산
더와 동갑일지도 모르겠다.
발터가 물었다.
“자네 노버스 씨와는 자주 연락하나?”
“달에 한번 정도는 합니다.”
“그래? 호, 혹시........자네, 나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나. 브란 카스톨
에서.........나하고 만났다고 말이야.”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발터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마를 문질렀다. 그
의 한숨은 아주 길었다.
“그래, 그런가.........그럼 됐어. 됐어, 정말 됐으니.......”
그 때 옆에서 노닥거리던 리시가 부엌 쪽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어디
선가 아주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더니, 잠시 뒤 포동포동한 몸집의
여자가 소스를 얹은 햄과 삶은 돼지고기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가
이 여관의 여주인인 자넷이라는 여자인 듯 했다. 아팠다는 말대로,
살 오른 얼굴이기는 했지만 어딘지 푸석했고, 말아 올린 갈색 머
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리시는 볶은 국수가 담긴 접시를 들고 오더
니, 유릭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조르르 달려와 그 접시를 놓았다.
포동포동한 여자도 그 옆에 접시를 놓았다.
“드세요. 원, 발터 씨도. 아픈 사람 쉴 틈을 주셔야지.”
“자니, 무리하지 않아도 됐다고.”
발터가 반쯤 풀린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자넷이 깔깔 웃었다.
“미안하지만 발터 씨를 푸대접하면, 이 익스턴에서 맞아 죽는다고요.
아파 쓰러지더라도 접대는 잘 해드려야지. 그리고 리시, 너는 손님
그만 괴롭히고 까놓으라던 완두콩이나 까 놔라.”
“다 깠어요!”
“오호라, 너는 껍질에 손도 대지 않고 완두콩알을 빼는 기술이라도
있는 거니? 아니면 이미 깐 콩깍지에 다시 콩을 채워 놓을 수 있는
마법이라도 알고 있는 거니. 그런 마법을 안다면 당장에 가르쳐
주려무나. 먹을 콩이 두 배로 늘어날 테니. 자, 이 게으름뱅이 꼬맹이.
내일 두 배로 일하기 싫으면 당장 까놔.”
“그럼 여기서 해도 되요?”
“물론. 그건 봐 주마. 손님들, 잘 보라고요! 이 꼬맹이가 빈둥대면 한
대씩 쥐어 박아 주라고!”
자넷은 그리 말하면서도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 리시의 볼을 꼬집었
다. 리시가 깔깔 웃더니 부엌으로 갔다. 자넷은 그 푸짐한 허리에
손을 얹고는 유릭과 알렉산더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 일인가. 시커먼 광부 녀석들 대신 희고 멀끔한 총
각이 다 들어오고. 내 피가 다 끓어오르네.”
“어이, 자니! 수작 걸지 마. 저리 뵈도, 군의 신명을 받아 이 마을에
강림하신 특무군이라고!”
조셉이 외치자, 자넷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처럼 두려워하는 기색은 별로 없었다. 그저 조금 웃더니,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지친 자식을 보
는 나이 많은 어머니같은 눈으로 유릭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릭으로서는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감싸주는 듯 부드러운
눈빛은, 조금의 두려움도 경계심도 없이 그저 두 팔 벌려 받아주기만
할 것 같은 온화한 눈빛을 바라보는 건.
“그렇다면 술은 안 되겠군. 포도주를 덥혀 갖다 줄 테니, 그거라도 마
시라고.”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유릭은 그녀의 두툼한 목에 걸린 금목걸이에
눈이 멎었다.
아주 정교한 메달이었다. 둥근 테두리에, 그 안에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길고 얇은 날개를 늘어뜨린 요정. 그 뒤에 산과 달이
새겨져 있었고, 붉은 루비알들이 그 요정을 둘러싸고 있었다.
유릭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숨소리가 빨라지는 게 느
껴졌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막 테이블을 떠나려는 자
넷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자넷 씨, 그 물건.......그 목걸이, 어디서 난 겁니까?”
“총각이 아는 물건인가?”
“아뇨. 좀..... 특이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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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늦었습니다. -ㅅ-;;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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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