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편
디스토피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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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넷은 별일 다 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무덤덤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여행자에게 숙박료로 받은 거야. 너무 마음에 들어서 팔아치우
지 않고 그냥 내가 가졌지.”
“그게 언제입니까.”
자넷은 통통한 턱에 손가락을 가져가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글쎄, 가만있자............ 그래, 한 7년쯤 되었군. 굉장히 이상한 손님
에게서 받았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비가 굉장히 쏟아지던 날이
었어. 정말 엄청나게 쏟아졌지........”
자넷은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끌어 모으듯 말없이 서 있었다. 발터
가 반쯤 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렉산더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때는 이 광산촌도 없었지. 게다가 비까지 오니, 술 마시러 오는
손님도 없어 아주 한산했어. 그런데 저녁 즈음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거야. 문을 열어보니, 굉장한 손님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더군.
정말 굉장한 손님이었어.”
리시가 콩꼬투리가 가득 든 바구니와 빈 바구니를 들고 와서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자넷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숙이며, 의미심장
하게 말했다.
“사람이, 세상에나 나뭇가지처럼 비쩍 말라 있더군. 정말 뼈에 바로
살가죽을 발라 놓은 듯 삐쩍 마른데다가, 얼마나 굶었는지 눈도 거의
풀려서 퀭하더라고. 머리는 또 얼마나 엉망인지. 처음으로 신혼살
림 차린 까치가 지어 놓은 것 같은 새둥지였어. 손등에는 굉장한 화
상이 있었지. 누군가가 일부러 불로 지진 듯 끔찍한 화상이었다고.
거기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대고 있었고. 그런 사람이 내게
금화, 정말 오래된 금화하나를 내밀며 잠자리와 먹을 것을 부탁하더
군. 거, 참. 아무리 장사 안 되는 가게라지만 그 돈 받자니 미안
하더라고. 그래서 들여보내주고, 벽난로를 뗀 뒤에 수건과 담요도
갖다 주었어. 죽을 갖다 주니 미친 듯이 먹기 시작하더라고.”
그리고 자넷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분명 탈옥수였을 거야.”
“탈옥수요?”
자넷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 위에, 파난의 악명 높은 유배지가 있거든. 먼 옛날 아그리피나의
성채가 있던 그곳 말이야. 좀 멀긴 하지만, 그 곳에서 항구를 찾아
똑바로 내려오면 바로 여기야. 그리고 여기서 산을 타고 내려가면
바로 본국으로 가는 항구지. 유배지에서 도망쳐서, 어디로 도망칠
까 궁리하면 바로 여기를 거쳐 그곳으로 가는 경로를 생각하게
되는 거야.”
어느 틈엔가 리시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테이블 아래로 기어와 있
었다. 자넷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리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건 그렇게 먹은 다음, 잠잘 곳을 청하더군. 돈은 미리 낼 테니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마굿간이나 창고도 좋다고 하기래, 그냥 재
워주겠다고 했지.”
“탈옥수를 도와준 건가, 자넷. 신고도 안하고?”
발터가 불쑥 물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홍조가 돌고 있었으나, 그 눈
빛은 아직 취한 사람의 그것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겁에 질린
사람의 눈이다. 자넷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신고할 곳도 없었어요. 치안부대까지는 하루
를 걸어가야 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벌써 도망가고 없겠지요.”
“다른 이야기는 안 하던가요?”
유릭이 묻자, 자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야기는 없었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더군. 그곳
에, 약혼녀도 있고........ 집도 있다고. 커다란 상회를 했다던 걸. 그건
지금쯤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을 테지만, 그래도 확인이나 하러 가
고 싶다고 말했지. 만약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어찌 할거냐
물었더니, 그러면 다 찾아와야지- 하고 답하더군. 어쨌건 내 거니까,
되돌려 받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소? 하면서. 좀 웃었어. 그 사
람 꼴을 보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걸레 같은 옷에, 그
런 몰골.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물건도 쥐지 못하지. 앞으로 살
수나 있을지 걱정되더군.”
옆에서 알렉산더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이름이나 가르쳐 달라고 했지. 만약에 근사한 모습으로 돌아
오게 된다면, 내 창고에서 썩어나는 최고급, 25년 된 ‘심장을 부수는
여왕’을 사라고. 그러자, 그 사람이 좋다고 하면서, 이 목걸이를 주
며 이게 약속의 증거라고 말하면서 자기 이름을 가르쳐주더군. 맙소
사, 꼴이 그런 주제에 그렇게 왕 같은 태도라니. 웃기기도 했지만,
대단하기도 했어. 이상한 꿈을 한바탕 꾼 기분이었지.”
유릭은 고개를 내리다가 알렉산더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짙은 회색
눈이 유릭을 향하고 있다가, 마주치자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그곳에는 창백한 얼굴의 발터가 있었다. 이제 취기는 온
데간데없었다. 약간 돌던 볼의 홍조마저도 하얗게 변해있었다. 잔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는 있었지만,
계속 딱딱 소리를 내며 떨리고 있었다.
유릭이 물었다.
“이름이 뭐라던가요.”
“에드먼드. 에드먼드 란셀이라고 했어.”
발터의 손에서 잔이 떨어졌다. 이제 그의 얼굴은 산채로 죽은 시체처
럼 변해 있었다. 졸도하듯 쓰러지려는 그를, 유릭이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알렉산더가 웃으며 말했다.
“자니, 그 ‘심장을 부수는 여왕’을 가지고 오겠나. 자네가 이야기를 해
준 기념으로 내가 이곳에 모인 사람을 위해 한잔 사지.”
“어머나, 그 술은 못 파는데요. 아무리 이런 가게라도, 약속은 지켜야
지.”
그러자 알렉산더가 품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그 끈을 풀고는
안에 든 것을 꺼냈다. 200카스티야짜리 금화로, 제국 건국 200주년
기념주화였다. 실제 가격은 500카스티야가 넘는다. 자넷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나, 다섯 병 값은 되겠군요! 설마, 이걸 한 병 값으로 주겠다
는 건가요, 아니면 거슬러 달라는 건가요?”
알렉산더가 말했다.
“물론 한 병 값이지. 약속이 걸린 병인데, 싸게 마실 수야 있나.”
자넷은 그 금화를 집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을 들여다보고는 주
머니 안에 넣었다. 그녀가 지나가자 용병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니
나가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고 물으며 올라왔다가, 자넷이 그 금화
를 보여주자 비명을 질렀다.
“우와. 한달 매상을 한꺼번에 올리네요, 아주머니!”
“저기 저 귀족 분이 주신 거라고! 어서 가서 귀염떨어라.”
용병들이 다시 환호하고 야유했다. 그러나 유릭의 손에 잡힌 발터만
은 회색의 돌덩이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유릭은 스산한 추위를 느꼈다. 지독한 추위, 아주 지
독한 추위. 그리고 아찔한 운명의 미소를 본 듯 했고, 언뜻 스치는
농염한 숙명의 손길을 느낀 듯 했다.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목걸이는, 분명 에드먼드를 탈출시킬 때
그에게 건네주었던- 즉, 유릭이 어렸을 때 지하에서 찾아낸 금붙
이들 속에 섞여 있던 것이었다. 그 때 리시가 살그머니 다가와 그런
유릭의 손등에 자그마하고 찬 손을 얹었다. 물속의 보석보다 아름
다운 눈동자가 유릭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빨아들이듯, 그러나
어딘지 탐욕스러운 듯한, 그리고 취한 듯한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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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 애 어른 할 것 없이 작업 걸리는 유리군;;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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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