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편
디스토피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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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밤새도록 내렸다. 용병들은 독하기로 이름 높고 비싸기로도 더
욱 이름 높은 ‘심장을 부수는 여왕’을 병째 돌려 마시고 모조리 뻗
었다.
유릭은 별로 마시지 않았다. 얼결에 마신 한잔만으로도 총살감이었으
니, 더 이상은 손도 대지 않고 대신 리시가 가져다주는 덥힌 포도
주를 두 어 잔 마셨을 뿐이다. 밤늦게까지 있지는 않았다. 용병들이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주정부리고 노래하고 떠들어대거나 니나를
주물럭거리는 동안, 유릭은 조용히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알렉산
더가 말했다. 벌써 자러 가는 건가, 같이 자게요? 오시죠. 단, 서비
스는 없습니다. 알렉산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유릭은 리시가
주었던 열쇠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푹 잠들었다.
자고 있는 동안 여주인이 불을 피우는 기척이 느껴졌다. 여름이라도
파난의 비 오는 날 새벽은 춥다. 등이 뜨끈해지자 다시 푹 잠들었고,
군대에서의 버릇대로 시간이 되자 저절로 눈이 떠져 일어나 보니
반쯤 벗은 니나가 그의 등 뒤에 누워 자고 있었다. 블라우스는
풀어헤쳐져 허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웅크리고 있기 망정이지 조금만
몸을 돌렸어도 가슴이 훤히 보일 뻔 했다. 여자가 눈길만 줘도
가슴 뜨거워지는 열여덟이긴 했지만, 바로 옆에서 워낙에 낯 뜨거운
꼴을 많이 봐왔던 그였기에 아, 옆에 니나가 누워 있구나- 정도만
생각했다. 아마도 여관에서 이 방이 제일 따뜻해서 기어들어와 잠든
것 같았다.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벨트를 채운 다음 침대에
앉아 단추를 잠그는데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와아, 일찍 일어났네.”
술 냄새가 확 풍겨오더니 어깨위로 니나의 머리카락이 확 쏟아졌다.
유릭은 어깨를 치우며 말했다.
“그냥 자.”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제길, 그 개새끼들........돈도 몇 푼 안 주면
서. 별짓을 다 시키더라.......”
니나는 침대위에 얼굴을 묻고 머리를 긁적였다. 유릭은 시간을 확인
했다. 새벽 5시였다. 창밖을 보니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야트막한
청회색 빛이 고요히 깔리며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유릭은 세수를 하고 제복을 입었다.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니나가
그런 유릭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대뜸
물었다.
“사람 죽여본 적 있니?”
“남자하고 자 본 적 있니?”
니나의 깔깔대는 웃음을 뒤로 하고, 유릭은 문을 나서기 전에 허리를
숙여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몇 번 슬슬 훔친 다음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문 앞에, 리시가 자그마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유릭이 나오자 그 꼬맹이는 하얗게 노려보았다. 유릭은 소녀의 머
리를 두드려주었다.
“니나하고 안 놀았어.”
“거짓말.”
리시는 퉁명스레 말하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오해를 풀만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유릭은 구차하게 변명하는 대신 1층으로 내려
가는 계단으로 향하며 말했다.
“숙박료 계산한다.”
리시가 일어나 유릭을 따라왔다. 여전히 쀼루퉁하게 퉁퉁 부어 있었
다.
“오빠 나빠요. 나는 못 들어오게 하고.”
유릭은 대꾸 없이 무시했다.
1층으로 내려오니, 여기 저기 남자들이 누워 있었다. 어제는 그리도
살기등등하던 그 흑마법사도 잠에 지친 멧돼지처럼 벽난로 앞에 자
빠져 자고 있었다. 여관비를 계산하려고 지갑을 뒤지다가, 창가에 놓
인 테이블에 아직도 꼿꼿하게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다가가 보니, 놀랍게도 발터 스게노차였다. 이 사람이 제일 먼저 쓰
러질 줄 알았는데, 아직도 멀쩡하네. 유릭이 다가오자, 발터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근처에가
니 술 샘새가 아주 진하게 풍겨왔다. 그는 갑자기 히죽 웃더니, 앞
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술병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는 빌어먹을, 하고 중얼거리며 리시에게 말했다.
“한 병 더.”
“아줌마가, 사장님한테 요만큼도 더 주지 말라고 하셨어요.”
리시는 냉큼 유릭의 뒤로 숨었다. 발터가 큭큭 웃으며 담배를 물었
다.
“그래, 그래- 하여간, 여자들이란. 세상 모든 남자들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 정말 바라는 건 지갑 뿐이지.”
그러나 유릭이 보기에, 발터 스게노차는 같은 남자가 봐도 걱정스러
운 상태였다. 그냥 툭 건드려도 고꾸라질 모습이었다.
“어이, 유릭 크로반. 자네... 몇 살이지?”
“열 여덟입니다.”
“흠, 그래. 좋은 나이군......열 여덟, 열여덟이면 풋사랑 한번쯤은 해
봤겠군......끅-”
그러나 유릭을 지켜보는 리시의 눈이 워낙에 살벌해서, 행여나 있다
고 말하면 난리날 것 같았다.
“아직 없습니다.”
발터는 빈 잔을 흔들었다.
“나는 있지! 괴-엥 장한 사랑이었어. 불꽃같았지. 내 심장을 불살랐
어, 나를 불태웠어, 나를 끔찍한 괴로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어!
나는 더러워졌고, 추악해졌지! 하지만.........멈출 수 없었지, 결코 멈
출 수....”
발터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유릭은 좀 놀랐다. 다음에 이 발터를
다시 만나면 꽤나 민망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처럼 꺼이꺼이
울던 그는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제길- 그 여자 때문이었지. 그 여자! 나는 그 탕녀 덕에 돼지 같은
놈이 되었다고, 더러운 돼지 같은 놈이!! 그 계집이 꼬여내지만 않
았다면, 나는....이렇게 괴롭지도 않았을 텐데...........끅- 이렇게 더럽
지 않았을 텐............끅! 무서워, 나는. 언젠가 비참해질 거야!
언젠가...........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테지. 지옥이 나를 기다려!
그 악마의 계집이 날 꼬여낸 순간, 나는 지옥으로 끌려간 거야! 불
덩어리 지옥으로! 아, 하나님. 나는 어쩌면 좋아.........나는 어쩌면 좋
아!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그건!”
그는 머리를 쥐어뜯더니, 결국 어깨를 움츠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 아니었어........그냥, 그저........”
“.......저기요?”
유릭은 저기, 제가 좀 바쁘거든요, 하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발
터는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아름다웠다고, 그녀는. 천사처럼, 요정처럼- 그렇게 예쁜 여자는 처
음이었다고. 아니, 세상에 존재조차 할 수 없을 거야, 그렇게 예쁜
건........ 검은 머리카락- 흰 얼굴- 붉은 입술- 제길, 정말 촌스럽군.
하지만........”
이제 흐느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사랑했지.....무엇으로든 얻고 싶었어. 가지고 싶었어........ 내 여자가
되었으면 했어. 하지만.....그 때의 난......정말 버러지 같은 놈이었지.
돈도 없고, 어머니는 앓아눕고........... 하지만 가질 수 만 있다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내 무슨 짓인 듯 못할까. 무릎을 꿇
고, 머리를 이렇게 조아리며 그녀에게 고백했지. 사랑합니다, 사랑합
니다, 제발 사랑합니다- 저를 받아주세요,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
만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버릴 거요, 무엇이든 배반할 거요, 평
생 당신을 경배할 거요. 나의 여왕- 나의 사랑. 그래서 그녀를 위해,
그녀가 원하는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해 배신했지, 그녀를 위해........”
유릭은 대략적인 감조차 잡지 못해, 그가 횡설수설 주정하는 대로 보
고만 있었다. 대강 요약을 하자면, 어떤 여자에게 홀딱 반했고, 그
여자가 무엇을 하라 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그게 아주 비열
한 짓이었다. 못된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 나쁜 짓 한 거지 내가 원
래 나쁜 놈인 건 아니라고 우기는 남자들의 아주 전형적인 푸념 같
이 들렸다. 이런 남자들은 참 한심하다. 자기가 좋아서 해 놓고선,
나중에는 그토록 사랑했다는 여자 핑계라니.
“대체 어떤 여자였던 겁니까?”
“노예였지........ 아름답고 슬픈, 그러나 사악한 노예. 그녀는 대저택에
갇혀, ‘그 남자’의 지배를 받는 노예였어. 나비의 낙인을 받은 노예!
내게 그녀가 말했어! 나는 그 남자의 노예, 나를 사랑한다면 그를
죽여주세요! 이 지상에서 없애주세요! 그리고 제게 자유를 주세요!
나는 그렇게 했어! 그리고 자유만 주어진다면, 그녀가 해방된다
면 내 아내가 되어 줄 거라 생각했지! 하, 그래! 하지만 난 배반당했지....
.... 그녀는 말 그대로 자기의 자유를 찾아 가 버렸어! 그리고 나는
.... 그저 추악한 놈이 되어 여기 있지! 배신자, 살인자, 도둑놈!
아무 것도 못 얻었어! 장미 가득한 저택, 그 저택에서 살던 사람을...
내 은인을 지옥에 처박은 대가는 그 어디에도 없어! 하나도 없
다고! 나는 일벌처럼 일해서 여왕벌을 모시는 하인이 되었을 뿐이라고!”
발터는 계속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유릭은 이거, 정말 난감한
것을 듣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리시가 갑자기 겁먹은 듯 주춤 물러
나더니 유릭의 등에 바짝 붙었다. 유릭이 내려다보자, 리시가 손가락
을 들어 계단을 가리켰다.
그곳에 알렉산더가 서 있었다. 흐느끼는 발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
내린 아침처럼, 매섭고 차가운 눈이었다. 혹독하고도 자비심 없으며
엄격한 지옥의 심판자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
“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건- 용
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 동정 받아야 할 일일까?”
“배반당한 당사자에게 말입니까?”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릭은 웃으며 답했다.
“아뇨.”
“어째서?”
“대가가 없이 주어지는 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배반은, 자
신이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대가를 다른 사람이 치르도록 하는 것.
용서받을 수도, 동정 받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갖고 싶
었다면....... 뭐, 그것에 대한 대가도 치러야겠지요. 배반의 댓가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알렉산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한 웃음이었다. 옷자락을 쥔 리시
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언제나 경이롭군. 늘 나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
저 말,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유릭이 아련한 기억을 더듬고 있
는데 여관 문이 벌컥 열렸다. 리시가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할 틈도
없이 땅딸막한 남자가 헐레벌떡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릭
이 보니, 어제 용병들과 함께 있던 광부 폴이었다. 그는 일단 발터
를 찾았으나, 그가 곤드레만드레 취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이
를 악물고 용병들을 살폈다. 그러나 모두 화살맞은 멧돼지들처럼
잠들어 있자, 빌어먹을- 하고 이를 갈아붙였다.
“무슨 일인가?”
알렉산더가 물었다. 그러자 폴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광산기사 조샤가 오늘 새벽에 광산을 살피러 갔다가 마령에게 당했
습니다! 광산 앞에 있어요! 의사 선생에게 알리긴 했는데.....빌어
먹을, 다들 자빠져 자고.....!”
알렉산더가 유릭의 어깨를 탁 쳤다.
“아직 멀쩡한 사람이 있잖아. 같이 가면 되겠군.”
폴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나도 같이 가기로 하지. 보다시피, 발터 씨도 다른 용병들도....... 저
렇게 취해서야, 오늘 안으로 일어나긴 힘들 것 같잖은가. 일단 나와
하사라도 가는 것이, 안 가는 것 보단 나을 거야.”
폴은 이를 뿍- 소리가 날 정도로 갈아붙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문을
나섰다.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특무부 군인이 아니라 루
스카브가 있어도 같이 가야 하는 것이 지금의 그였다.
“따라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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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즐거운 성탄 되셨나요~
저는 이것 저것 버닝 버닝 하느라 잘 보냈어요. 자, 이제 다음주도 연
휴.................이건만, 황금같은 휴일중 하나가 일요일이라니!!!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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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