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11화 (111/174)

제111편

나비의 동굴#2

*****************************************************************

귓등과 발 옆으로 쉴 새 없이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사방에서 어둑한 기운이 느껴진다. 흑마법사의 힘을 느낀 동굴 속의

수많은 마령들이, 유릭과 크리스펠로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크다. 아주.”

크리스펠로가 무엇을 말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유릭도 수많은 발생지

역을 돌아다녀 봤지만, 이 정도로 거대한 건 참 오랜만이었다. 순간

목언저리를 향해 아주 단단하고 커다란 것이 날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유릭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몸을 날렸고, 크리스펠로가 거

대한 장궁의 시위에 손을 얹었다가 뗐다. 붉은 빛이 어둠을 할퀴었

고, 거대한 것이 그것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

다. 바닥을 긁듯이 섬광이 쏘아져나가, 그것에 명중했다.

“캑-!”

짧은 비명이었다. 크리스펠로가 외쳤다.

“오페르케!”

주변이 훤해지며 바닥에 누워있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몸체

를 가지고 있었다. 시뻘건 두 눈에...... 유릭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크리스펠로가 순식간에 늑대로 변해, 이를 드러냈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두 팔과 다리를 가지고, 긴 발톱과 손톱

을 가지고, 그 등과 팔다리가 비늘로 덮여있는 인간의 모습. 그러나

그것의 팔목과 발목에는 팔찌가 쩔렁이고 있었고, 단단하고 날렵

해 보이는 허리에는 얇은 천이 둘러쳐져 있었다. 문명의 흔적이었다.

크리스펠로의 공격에 명중한 허리는 찢어져 살점이 너덜거리며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유릭은 이를 악물고, 그대로 총을 난사했다. 캉캉캉캉캉, 아예 갈가리

찢어 놓을 듯 거침없는 공격을 퍼부어 대야 했다. 푸른섬광이 이가

번뜩이듯 쉴새없이 번쩍였다.

말로 마령이라 부르는 것이지, 실제로는 ‘에너지’ 그 자체이다. 그러

나 에너지가 ‘영’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들이 가진 에너지는 육화-

즉, 육신을 짜는데 쓰이게 된다. 멈추지 않고, 성장이 아닌 ‘진화’

를 한다.

발생원인은 그 누구도 모르지만, 이 파난의 섬에서 그 현상이 아주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왜곡이 시작되면, 마령

들은 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상현상이 일어나다가, 그것들이 차

츰 육화되기 시작하면 온갖 형태로- 그 주변사람들이나 흑마법사

가 주는 영향에 따라 엄청나게 다양하게 육화된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위험한 것인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되는 것이다. 어디까지 인

간과 비슷하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인간과 아주 흡

사하게 육화되는 것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주변의 인간들을 보며

아주 근사하게 복사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들의 모습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공격받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파난섬의 원주민들이 모두 학살된 것도 그 때문. 그 중에 사람이

있는지 마령이 있는지, 당시의 제국군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강한 녀석이 있을 것 같군요.”

크리스펠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유릭은 몸을 일으키고, 크리스펠로

의 등에서 쩔렁이는 쇠사슬을 잡아채 당겼다. 크리스펠로는 유릭이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릭은 그 옆에서 같이

달리다가, 그 쇠사슬을 낚아채 당기며 그 등에 올라탔다. 크리스펠

로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유릭은 그 등에 바짝 엎드렸다.

옆으로는 계속 무언가가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주변이

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하자, 유릭은 크리스펠로의 잔등에서 뛰어내

렸다. 고속으로 달리던 등에서 뛰어내린 것이라, 간신히 구르는 것

을 면했다. 크리스펠로가 단숨에 인간으로 변해, 긴 장궁을 앞으로

뻗으며 시위를 매겼다.

빛은 이제 흰 안개처럼 동굴 안을 휘감고 있었다. 흐느적대며, 허우

적거리며, 사방을 휘저으며 감돌고 있었다. 미력한 것이 숨을 내

쉬듯이. 그러나 그 흐름은, 그 숨결은 음산하고도 소름끼쳤다. 그 안

에 얼핏 얼핏, 보다 더 구체적이고도 위험한 형상이 그림자처럼 어

리고 있었다.

크리스펠로가 활을 쏘았다. 붉은 빛이 뿌연 안개를 사르며 쏘아져나

가 벽에 부딪혔다. 불길이 벽을 휩쓸었다. 마른 풀을 불사른 듯 안

개가 사라졌다. 크리스펠로가 허리를 당기며 주변을 살피다가, 갑자

기 으르렁거리며 팔을 휘둘렀다. 그의 엄청난 힘에 검고 거대한 육

체가 내동댕이쳐졌다. 유릭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쏘았다. 비명과

함께 살점조각이 튀어 올랐다.

그 때, 등 뒤에서 엄청난, 수천, 수만의 작고 고운 날개가 사르르 떠

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크리스펠로가 크게 으르렁거렸다.

유릭은 그의 등에서 쩔렁이는 쇠사슬을 세게 붙잡아 당기며 그를 뒤

로 물러나게 했다.

“젠장.......!”

수천, 수만, 아니 어쩌면 수억-

엄청난 수의 나비들이, 벽을 뒤덮고 있었다. 맥까지 섬세하게 드러난

그 검은 날개를 떨며, 마치 뱀의 비늘처럼, 북극 짐승의 거친 털처럼

벽을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유릭과 크리스펠로가 디딘

바닥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것이 ‘기어’온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얼마나 징그럽게 느껴지는

지 유릭은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토할 것 같아.”

크리스펠로가 옆에서 말했고, 유릭은 진심으로 동감했다. 당장 밖으

로 나가서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싶었다.

“모조리 태워야겠습니다.”

순간, 나비들이 밀물이 밀려들 듯 일제히 날아올랐다.

크리스펠로가 늑대로 변해 유릭의 몸을 들이받았다. 유릭은 그의 사

슬을 낚아채 매달렸다. 크리스펠로는 힘껏 달리다가 바닥을 박찼다.

나비들이 벽에서 모조리 떨쳐 일어나며 파도처럼 쏴아아 몰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릭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급히 바닥을 내려

다보니, 유릭과 크리스펠로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유릭은 미처

보지 못했으나, 크리스펠로는 이 거대한 공간의 한쪽 바닥이 뚫려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오페르케!”

크리스펠로의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빛 덩어리들이 떠오르며 크리스

펠로와 유릭과 함께 추락했다. 빛이 허공을 휘저으며, 그들이 낙하

하는 공간을 보여주었다. 끝없는 계단과 기둥들이 서 있었다. 나무처

럼 뿌리박힌 검은 조상들이 허공을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유릭은 크리스펠로의 사슬을 꽉 잡으며 하늘을 보았다. 빛이 비추는

그 허공에, 엄청난 나비 떼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크리스펠로, 속도를 늦추십시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곧 반동이 갈

겁니다!”

크리스펠로의 몸이 단번에 느려졌다. 나비 떼는 더욱 빠르게 쏟아졌

다. 유릭은 갈아붙이듯 외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히게아-!”

황금의 꽃, 그 찬란한 마법진이 펼쳐지며 나비떼와 유릭을 가로막았

다. 나비들이 마법진위로 무수히 쏟아졌다. 날개조각이 산산이 튀어

올라, 한겨울 눈발처럼 흩어졌다. 불길은 그 직후에 터졌다. 마른

수풀 위로 불을 지피듯, 불길이 회오리치며 벽과 허공을 한꺼번에

휩쓸며 솟구쳐 올랐다. 어둠이 그 불길 끝을 잡고 밀려올라갔다.

불길에 찢겨진 나비날개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크리스펠로가 말했다.

“많아. 남았다.”

“지원요청 해야 합니다. 우리 둘로는 힘들어요!”

광산을 통째로 박살내는 것이라면 둘만의 힘으로도 상관없지만, 그런

명령은 아직 상부로부터 내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광산 밖으로

마령들이 나가지는 않은 상태. 함부로 판단하여 광산을 전파할 수

는 없다.

순간, 크리스펠로가 허공에서 몸을 돌리더니 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

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계단을 몸을 날렸다. 난간 같은 것에 어

깨를 세게 부딪쳤다.

“큭-!”

크리스펠로가 단숨에 인간으로 변하여, 유릭의 팔을 잡아채 당겼다.

“대체 뭐하던 곳이기래 이런......”

“누가 여기서 자던 것을 깨웠어.”

유릭은 넘어지면서 긁힌 상처에서 스며 나온 피를 닦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각인이 있는지 없는 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쨌건 모두 원시

적으로나마 육화된 마령들이다.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아주 오랜

시간 이 안에 있다가- 이 근방에 있는 흑마법사의 힘을 느끼고 자

극받아 깨어난 것이다.

“근방에 흑마법사가 있겠지요- 당연히.”

“알아?”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저녁부터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요......... 일단, 광산을 나가 흑

마법사를 체포한 다음, 지원군이 올 때까지 이곳을 봉인하기로 하죠.”

유릭은 어둠에 잠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저 위에 많은 마령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다. 정말 큰 문제, 생존을 위

협할 정도로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어떻게 나가죠?”

다시 저 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 이 낡은 유적을 뒤져

나가는 길을 찾아낼 수도 없고. 크리스펠로는 천장을 물끄러미 보

다가, 고개를 내려 유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늑대

로 변했다.

“뭘...”

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크리스펠로는 바닥에 코를 대더니, 킁킁거

리며 길을 찾기 시작했다.

****************************************************************

작가잡설: 비상시에는 군견으로 활용되는 이누 크리스 군!

p.s 크리스펠로가 감고 다니는 사슬은............ 고삐였습니다. -_-

드디어 2004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나는 건 그다지 없군요. -_-; 정말 바쁘긴 바빴나 봅니다.

계획했던 건 그다지 많이 하지도 못했습니다. 여행일정도 그렇고.......

글도 많이 못 썼고. -ㅅ-;;; (홍염은 간신히 3권 분량입니다;;)

뭔가 굉장히 두리뭉실 보낸 기분이군요;;;;;

계획대로 되는 건 별로 없어요. 학교처럼 학기 시작, 중간 기말- 방학.

이런 식으로 정확하게 돌아가는 게 어디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 뿐. ^^

자, 이제 내일이면 2005년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