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편
나비의 동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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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을 나와 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거센 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
고 오랫동안 맞고 있기도 곤란했다. 젖은 바닥위로 빗방울이 박히며
더 축축해져갔다. 깎아낸 듯 거친 암벽도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암벽 옆에 가늘게 나 있는 길로 향했다. 여기저기 헤어지
고 끊어지고, 돌무더기에 휩쓸리고 풀들이 자라 이곳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조차 신기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폴이 말했던 아이들
이 드나드는 그 길이라고 생각했으나, 알렉산더가 지나가는 길은 아
무리 봐도 그가 오늘 처음으로 발견한 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거칠었다. 등 뒤의 발소리가 달라져서 돌아보니, 어느새 크리스펠
로가 본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상해, 저 사람.”
유릭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대체 뭐가요?”
“틀려. 사람과.”
유릭은 그제야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즉각 본모습으로 돌아가던 크리
스펠로가, 지금까지 내내 늑대의 모습으로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
었다.
“차, 아주. 마음도, 심장도, 다 차다. 시체 같아.”
“설마, 곧 죽을 사람이라는 겁니까?”
“시체는 안 죽어.”
유릭은 크리스펠로를 돌아보았다. 금빛 눈이 평소처럼 멍하게 가라앉
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이 일 듯 동공이 축소되며 그 눈이
커졌다. 유릭은 돌아섰고, 돌아서 그들을 바라보는 알렉산더와
마주쳤다.
“내 욕하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속닥 속닥 하는 건지 모를 일이
군..... 음? 그 장교분은 또 누구지?”
“아닙니다. 그리고...... 이분이 방금 그 ‘군견’ 이십니다. 크리스펠로
침버 대위님이시죠.”
“아-”
알렉산더가 굉장히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였다. 아무래도 ‘군견’인 크
리스펠로의 모습이 꽤나 탐났었나 보다. 유릭은 알렉산더가 다시
돌아서 조금 멀어지자, 목소리를 낮추어 크리스펠로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추기경파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릭을 바라보는 크리스펠로의 눈이 반쯤 풀린 듯 멍했다. 그
제야 유릭은 자신이 크리스펠로가 알아듣기에 상당히 복잡한 이야
기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쁜 놈입니다.”
“아.”
“어쨌건- 제가 말씀드릴 건 하나입니다. 프리델라 님을 제한 그 누구
에게도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시체라는 거?”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펠로는 알아들은 듯 입을 다물었다.
유릭은 알렉산더의 뒷모습을 보며, 다음에 그와 만날 때는 좀 더
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분도 과거도 불분명한 사람을
추기경이 그렇게 가까이 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추기경과
그 패거리의 돈줄을 깔끔하게 관리해 주는 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참 만에, 빗줄기가 유릭의 머리와 크리스펠로를 흠뻑 적실 무렵 돌
고 돌아 간신히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마을 서편을 둘
러싸고 있는 산을 돌아서 온 것 같았다. 뒤돌아보니, 안개에 둘러싸
인 산꼭대기에서 뻗어 나온 산등성이가 마을 어귀 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유릭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금방 큰 나무 기둥과 그 기둥
에 매달린 여관의 간판을 찾았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알렉산더가 물었다.
“이제부터 뭘 할 예정인가.”
“제 할일을 할 예정이지요.”
“나도 내 할일을 해야겠군.”
“네?”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어서. 참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나를
어떻게 반길지 기대하는 중이야. 어쨌건- 다시 만나서 아주 반가
웠네.”
알렉산더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을 입구를 향했다.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어지기 시작하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걸어갔다.
이내 빗줄기에 가려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릭은 크리스펠로를 한
번 보고, 그가 노려보듯 입구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그의
쇠사슬을 당겼다.
여관 안에는, 니나가 숙취에 절어서 비실대는 용병들에게 숙취해소용
진한 칡차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유릭이 들어오자, 용병들이 다들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그러다 크리스펠로가 뒤따라 들어오자,
다들 입을 쩍 벌렸고(니나는 침이 흐를 정도였다) 그 중 조셉
콘라드는 기절할 듯 놀랐다. 크리스펠로를 알아보는 표정이었다. 그
러나 크리스펠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매우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를 지나쳤다.
유릭이 니나에게 물었다.
“리시는 어디 있지?”
“응? 걔, 이제 여기 없어.”
“어디로 간 거지?”
니나의 얼굴이 아주 복잡해졌다.
“아, 그... 그게 되게 복잡한데.......... 아줌마한테 물어보면 더 잘 말해
줄 거야. 부엌 옆방에 계셔. 가 봐.”
유릭은 크리스펠로와 함께 부엌으로 들어가 어렵잖게 곁방의 문을 찾
았다. 노크를 하고, 들어오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유릭은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크리스펠로도 그를 따라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앉아 있던 자넷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하는 거야!”
“리시는 어디 있습니까.”
“오늘 정오 즈음에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가 보낸 사람이 데리고 갔
어. 그 아이는 왜?”
자넷은 불안해하며, 거의 천정에 닿을 듯 키가 큰 크리스펠로를 바라
보았다. 크리스펠로는 천장을 살피고, 바닥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릭이 권총을 뽑았다.
“대, 대체 뭐하러.....”
“그 아이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자넷의 눈이 커졌다. 크리스펠로가 고개를 젖히며 크게 으르렁거렸
다. 온 방이 부르르 떠는 듯 했다. 액자가 들썩이고, 침대가 들썩
이며, 옷장과 화장대가 흔들렸다. 지넷이 놀라서 어깨를 감싸 안으
며 몸을 움츠렸다.
벽과 바닥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지랑이처
럼 어른거리다가, 이내 그 색이 진해지며 무수한 숫자의 날개들이
되었다. 나비의 날개들이었다. 수억, 수천의 날개들이 모든 벽과 바닥
과 가구, 침대를 뒤덮고 꿈틀대듯 흔들리고 있었다. 시퍼렇게 질린
자넷이 입 위에 손을 얹었다.
유릭은 검은 나비 떼의 움직임을 살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보였다.
유릭은 두 팔을 양 옆으로 뻗고, 눈을 감았다. 크리스펠로가 자넷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내가 선다. 깨.”
크리스펠로의 말이 끝나는 즉시, 유릭이 말했다.
“크리게아!”
순간, 벽과 천정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나비들이 일제히 솟구쳤으나,
마법진에 들러붙는 순간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불 지른 듯 얼어붙어,
벽과 바닥, 천장에 뒤엉키듯 들러붙었다.
“암만-!”
마법진의 색이 푸릇하게 바뀌더니, 마법진 아래의 얼음조각들이 산산
이 깨어졌다. 눈처럼 흩어지고,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며, 구름처럼
뭉쳤다가 파도처럼 쏟아졌다.
“히게아!”
마법진의 색이, 이번에는 금빛으로 바뀌었다. 시뻘건 불길이 혀를 휘
두르듯 휩쓸었다. 얼음조각들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바닥과
천장에 진 물얼룩이 말라 사라졌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던 자넷
이 털썩 주저앉았다.
“무, 무슨....! 무슨........”
유릭이 말했다.
“그 꼬마가 이 여관으로 저를 끌고 올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
고 어제 제 방에 금제를 걸어 두었습니다. 그 아이는 제 방 안에
들어오지 못하더군요. 맞습니다. 그 아이는 그냥 아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젠장, 설마 그 어린 아이가 광산에서 나타난 유령들
을 불러 낸 거란 말이야! 말도 안돼, 그 아이는 아직 꼬마라고!”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이일 때 더 위험합니다. 대가
로 뭘 치러야하는지 모르니까.”
“정말 그렇다 치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체포되겠지요. 사형 당할지, 아니면 재교육을 통해 특무부가 될지,
아니면 철십자 기사단으로 들어가게 될지- 그건 모두 상부가 정할
바입니다.”
자넷은 이를 악물었다. 유릭이 권총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곧 조사가 시작될 테니, 당신은 아무래도 이 마을을 떠나시는 게 좋
을 것 같군요. 그 누구도, 그 흑마법사를 이 마을로 끌어들여 사람
들을 죽게 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죄를 묻는데 필요한 건 죄인만이 아닙니다. 어차피 군중이 필요로
하는 건, 분노를 풀며 돌을 던질 상대 단 하나뿐. 이 파난에서 죄
인은 사람들이 만드는 거지, 죄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넷은 이마에 손을 짚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압니다. 그러나 그건, 지금 상황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마을을 벗어난 알렉산더는, 한참을 걸어 한적한 길에 도착했다. 사방
에 예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푸른꽃, 붉은 꽃, 흰꽃. 덩굴에
매달린 것도 있고, 풀끝에 매달린 것도 있으며, 꽃대에 한가득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빗줄기에 젖은 벌판 옆에, 검은 마
차가 한대 서 있었다.
그 옆에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한 손 가득 꽃을 들고 서 있었
다. 알렉산더와 마주치자, 그는 촉촉하게 젖은 모자를 벗고 한껏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꼴이 아주 근사하군.”
신사는 씨익 웃더니 모자를 다시 쓰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변호사 코스튬이랍니다. 척 봐도, 거짓말로 돈 뜯는 사람으로서 흠잡
을 데 없지 않습니까.”
“브란 카스톨에서는 그 꼴로 다니지 마. 내가 보기 싫군.”
“물론입죠.”
신사는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알렉산더를 위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백작은 들어가지 않은 채로, 문 밖에 서서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남자가 꽃다발을 내밀었으나 알렉산더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마차 구석에, 회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앞치마를 꼭 쥔 채 웅크리
고 있었다. 희고 창백한 얼굴은 잔뜩 겁먹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말없이 팔을 뻗어, 소녀의 가슴에 늘어진 펜던트를 잡아 뜯었다. 순
간 숨통이 트인 듯 소녀가 고함을 질렀다.
“보, 보내줘요!”
“어디로?”
“아.....주머니한테.....돌아갈래요!”
“미안하지만, 네가 저 마을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벌써 다 들통 났단
다. 돌아갔다간, 당장에 체포될 걸. 그러면...... 나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에게 끌려갈 거야. 더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거다. 그 누구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리시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 창백한 볼
을 적셨다.
“너는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네 형제들과, 네
자매들과, 너의 주인인 내 품으로. 내 옆으로 오면, 너는 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의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된단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리시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리시의 눈이 커졌
다. 그녀의 마른 목덜미에 얼룩이 어리기 시작하더니, 곧 검은 나
비로 변했다. 리시의 눈이 더욱 커졌다.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다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 오너라. 몰락했던 옛 주인이 권능을 되찾아 증오를 위해 돌아왔
으니- 너희들도 이제 모두 제 자리로 돌아와야지.”
리시의 눈이 감기며, 그 작은 몸이 마차 의자위로 무너졌다. 뒤에서
남자가 물었다.
“이제는 어쩌실 겁니까.”
“이제 달려야지, 나를 배신한 노예들의 목을 효수하기 위해. 그리고
내게서 훔친 황금으로 방탕한 영화를 누리는 그 가증스런 계집을
지옥에 처박아 주어야지.”
빗줄기가 세차게 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빙그레 웃고는 마
차의 마부석으로 향했다.
“그럼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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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신문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신문이냐고요? 좀 매니악한
신문인데....... 신문 이름은 '약사공론' 입니다. -_-;;;
다음 편은 5일 뒤에!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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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29장 의외의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