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편
의외의 선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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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웨나는 에닌이 건네준 악보를 훑어보았다. 처음 보는 곡이긴 했지
만 악보 위에 멋들어지게 서명한 사람은 1년 전 ‘백합 골짜기의 연
인들’ 라는 들척지근한 오페레타를 만들어 좀 히트한 신인 작곡가,
버트만이었다.
“이게 뭐니, 에니?”
“얼마 전에 우리 집에서 음악회가 있었잖니. 그 때 그분이 오셔서 이
번 겨울에 발표할 오페라의 아리아중 하나라며 보여 주셨어.”
로웨나는 당장에 입술을 비죽거렸다. 자신은 발목잡고 매달려도 조연
하나 나올까 말까, 인데. 이 에닌은 오페라가 완성되기도 전에 주
역으로 정해지니 질투가 안 나면 사람도 아니다. 로웨나는 심통가
득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분이..... 다음 주 목요일에 저녁식사라도 같이 한 뒤에 자신을 위
해 불러주면 좋겠다고..... ”
데이트 신청이군, 로웨나는 아무래도 그날 약속이 없으면 에닌과 함
께 고급 레스토랑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
가야 한다. 에닌이 혼자 가겠다고 하더라도, 마델로 부인이 로웨나
를 붙여 보낼 것임에 분명하다. 에닌에게 접근하는 음악가, 작곡가,
오페라 가수는 넘쳐난다. 그리고 에닌 앞으로 배달되는 꽃과 초콜
릿, 향수, 보석, 그리고 같이 곁들여 오는 카드에 적힌 이름들을 확
인하여, 마델로 부인에게 보고하는 건 로웨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한테 연습 도와달라는 거야?”
“응. 사실, 나는 네가 도와줄 때가 가장 좋아. 너와 연습하고 나면 내
노래가 훨씬 더 좋아지는 것 같아.”
“네 선생인 엠마누엘 누트 여사가 듣는 다면 기절하거나 널 파문시키
거나, 둘 중 하나겠다. 누트 여사에게도 보여 봤어?”
에닌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따님이 지난주에 출산을 하는 바람에 고향으로 가셨어. 그
곳에서 한 달간 계실 예정이야.”
“그렇다면... 당분간은 내가 도와주지, 뭐. 하지만 예전처럼 매일 매일
봐 줄 수는 없어. 나도 아르바이트 하는게 있어서.”
“아르바이트? 혹시..... 지난번에 말하던, 굉장히 신분 높은 아가씨의
음악 가정교사 말이야?”
로웨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악보를 보며 이리저리 건반을 눌러보았
다. 참 감상적인 곡이었다. 로웨나 취향은 아니었고, 사실 그 작곡
가가 썩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작년에 ‘백합
골짜기의 연인들’이 히트한 것은, 버트만의 고음만 빽빽 내 지르는
아리아가 훌륭해서라기보다는 발레안무가인 볼보가 워낙에 훌륭했
던 덕이었다. 관객의 절반 이상이 발레를 보러온 한량클럽 신사였으니,
할말 다한 셈이다. 브란 카스톨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는 모조리
보러 가는 로웨나는 그 공연도 보러 갔고, 그의 감상적인 아리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같은 소절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고,
그걸 무마하려고 쓸데없는 집어넣은 장식음이 너무 많았다. 그리
복잡한 음악이 아니라 처음 들을 때는 화사하고 근사해 보이지만,
자주 들으면 금방 질린다. 장식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쓸데없는 법이니.
신곡을 끝까지 쳐 본 로웨나는, 감상적인 곡이긴 하지만 저녁 만찬
끝낸 뒤 배 두드리는 사람들을 위해 부르기에는 적당한 곡이라고
판단했다. 두 번 정도 쳐 보니 단순한 곡인만큼 금방 감이 왔다. 부
를 수 있을 듯 했다.
“내가 불러 줄 테니, 잘 듣고 따라해 봐.”
로웨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각해요, 그리워해요.
눈과 손길과 입술을. 꺼내어 거울을 본답니다.
당신의 눈이 담았던 나의 눈을, 당신의 입술을 기억하는 나의 입술을
바라봅니다.
사랑하니 아름다웠던 나를 바라보죠.
그러나 제 방 커튼을 흔드는 먼 바람은 소식을 가지고 온답니다.
당신이 떠났다고, 심장은 얼음이 되고 손길은 채찍이 되었다고.
그래서 나는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늙고 어리석은 여자일 뿐
이라고.
오세요, 두 팔을 벌려 이 늙고 병든 몸을 안아 주세요.
이 밤이 끝나기 전에, 아스라이 남은 나의 가냘픈 밤이 끝나기 전에,
젊고 아름다운 아침 해가 나를 쫓아내기 전에, 자- 와 주세요. 그러
면 저, 밤은 갈 거랍니다.
머물지 않아요, 늙은 밤은 시간이 되면 갈 뿐-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물레 자으며 부르는 노래 같군- 로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와 엄청나게 어울리지 않는
다는 생각도 했다. 하긴, 내가 성가를 부르면 하나님께 버럭 버럭
성질내며 항의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저 아르사메 여사가 그랬지.
노래가 끝나자, 에닌은 두 손을 꼭 잡으며 활짝 웃었다.
“좋은 노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불러 볼래?”
로웨나는 느긋하게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전주가 끝나자, 에닌은
그 곱고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푸른 새의 지저귐
같은 그 목소리로 부르니, 로웨나 자신이 부를 때와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다. 목소리 탓인지, 로웨나가 부를 때면 ‘이 죽일 놈아, 당장
안 오면 죽어!’ 라고 윽박지르는 듯 들리는 데 반해 에닌이 부르
면 버림받고 늙어가는 여자의 애처로운 흐느낌처럼 들린다.
언제나 이런 에닌이 부러웠다. 모든 사람이 보살피며 그녀의 재능과
능력을 일깨워주고, 자신도 열심히 노력하는 에닌이. 곱고 예쁜 천사
같은 에닌이, 다른 존재가 될 필요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
도 없이 마냥 행복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에닌이. 그리고 그 누구보
다 음악을 사랑하는 에닌이, 그 순수한 열정이 부럽다.
“자, 이제 제대로 해 보자. ‘심장은 얼음이 되고’, 이 부분은 좀 강하
게 해. 그 다음은 힘 빼고. 젊고 아름다운 아침- 여기서는 기교부릴
필요 없어. 배에 힘주고 주욱 밀고 나가는 게 좋겠다. 이 음, 이 음, 이 음,
다 빼버리는 게 좋겠다. 너무 쓸데없는 장식음이 많으니까, 이 부분.....
솔직히 좀 깬다.”
로웨나는 펜꽂이에 꽂혀있던 연필로 그 부분을 박박 그어 지웠다.
“음, 가만- 여기는 여기 이 음은 너무 느닷없이 나와. 이렇게 올리고
-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이렇게 ‘오세요, 두 팔을 벌려- ’”
“그렇게 마음대로 바꾸면 선생님이 화낼 텐데.”
“어차피 발표한 것도 아니잖아. 선생 마음이 아니라 네가 부르는 게
중요하고, 듣는 사람들이 더 중요한 거라고. 좋아, 그렇다면 내가
다시 불러볼 테니까 뭐가 나은 지는 네가 들어보고 판단해 봐. 원곡
이 더 좋게 들린다면 네 의견에 따를게.”
그리고 막 다시 건반을 짚으며 연습을 시작하려는데, 연습실 문이 노
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둘 다 놀라서 돌아보니, 문 앞에 오페라
평단원 중 하나인 수잔나가 서 있었다. 수잔나는 입술을 내밀며 에닌
을 쏘아보더니, 고개를 휙 돌리고 로웨나에게 말했다.
“로웨나, 트래비스 씨가 부르셔.”
“무슨 일인데?”
“글세- 나도 모르겠다. 엄청나게 살벌한 얼굴로 그리 말하시던
데...........너 혹시 잘못한 거라도 있니?”
로웨나는 어마어마하게 찜찜해졌다. 혹시 클럽에서 몇 번 노래를 불
렀던 게 들켰나. 그곳 손님들이 로웨나의 노래를 좋아하고, 가게
사람들도 좋아해서 가끔 흥이 나면 부르곤 했다. 그러나 트레비스
씨 같은 사람들은 그런 클럽이나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혐오하다 못해 지독히도 경멸한다. 질 낮고 수준 낮고 천박한 인간
들이나 그곳에서 부른다고 생각한다. 돈을 받고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런 무대에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지도 모른다.
로웨나는 자신보다 더 불안해하는 에닌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수잔나
와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그런데 수잔나가 문을 닫자마자 쏘아붙
이듯 말했다.
“로웨나 그린! 너는 참 속도 좋다. 저 애는 자기 선생님도 있는데 왜
널 부려먹는 거니? 네가 무슨 저애 조수라도 되는 거니, 하녀라도
되는 거니! 너무 하잖아.”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는 너무 속 좋아서 탈이라니까. 걔는 네가
안 봐줘도 돌봐주는 사람이 깔리고 깔렸다고! 너까지 봐 줄 필요는
없다고! 너, 이번에 아르바이트도 늘려야 할 정도로 힘들잖아. 그런
데 세상에나, 그렇게 바쁘고 힘든 애를 불러다가 노래나 봐 달라고
하다니. 쟤는 정말 너무 철이 없다니까.”
로웨나는 에닌을 위한 변명도, 그렇다고 수잔나의 말에 동조도 하지
않기로 했다. 에닌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 지, 로웨나가 누구보다
잘 안다. 에닌이 가진 부와 미모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린다. 다 부모덕일 거야, 예쁘니까 못해도 봐 주는 거
지- 그러나 재능이 없거나,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는 다면 무대에
서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머리가 좋아서 조숙하다 못해 시건방지기까지 했던 로
웨나와는 달리, 에닌은 ‘노래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거야.’ 라고
매우 진부하지만 열정적인 말을 하며 노는 시간 줄이고 자는 시간
줄여가며 연습에 열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노력을, 그녀의 타고난 행운
덕에 더 빨리 인정받게 된 것이다.
나도 에닌처럼 무대에 설 기회만 주어지면 금방 인정받게 될 거라고,
라며 필사적으로 생각하여 무대에 서기 위해 노력했지만, 로웨나는
요즘 자신이 통 없었다. 벌써 두 번이나 무대에 섰지만, 주변에서
로웨나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예 없다. 음악회 같은 곳에 나
와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오페라단에서 전속계약이 끝나면 우
리와 계약하자고 달려오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로웨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재능이 없나봐, 나. 노력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주 평범한 애였나 봐. 아니,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걸까.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다, 역시나 나는 재능이 없나보다.
그렇게 결론 내리니, 로웨나는 지난 번 무대 때문에 카밀턴 경이나
유릭을 곤란하게 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 때는 당연한 거라고 생
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 미안했다. 카밀턴 경에게야 조카
의 일로 갚았다지만, 유릭에게는 조금도 갚지 못했다. 핀잔이나 놓고,
퉁명스럽게 굴고. 유릭이 잘못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히려
그런 대우를 받고서도 그렇게 잘해줬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로웨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트레비스의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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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좀 늦었습니다;;;
어제는 커그 모임 있었고, 오늘은.....병원 다녀오고;;;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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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