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15화 (115/174)

제115편

의외의 선물#2

****************************************************************

트레비스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로웨나는 깜짝 놀랐다. 극장주 트레

비스는 반쯤 그림자에 잠긴 듯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앉아

,

트레비스가 음산하게 말했다. 대강 해석하자면, ‘난봉질 그만하고 찌

그러져 있어, 이 바람둥이야!!!’ 정도였다. 내리꽂히는 눈빛이 워낙에

살벌해, 카밀턴은 ‘주말에 시간 있으면 나하고 연극이나 보러 가지,

이번 주말에 대배우 카타르지야 마이에 여사가 나오는 ’붉은 꽃

의 여신‘이 개막 한다네.’ 하고 말하려던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같이

보러 가 주지도 않는 주제에 훼방은 놓지 말아야지, 카밀턴은

투덜대면서도 닥쳐주기는 했다.

“일단, 앉게나.”

트레비스는 그리 말하며 카밀턴이 앉아 있는 의자의 등받이를 당겼

다. 카밀턴이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군의 자리를 빼앗아

주는 것이니 차라리 황송할 지경이라, 로웨나는 급히 의자를 끌

어당겨 앉았다. 카밀턴은 삐진 고양이처럼 어슬렁어슬렁 창가로 가

서 파이프를 피우기 시작했다.

트레비스가 대뜸 말했다.

“그린 양, 카스조 씨를 알고 있나?”

전혀 예상 못 했던 말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오자, 로웨나

는 얼결에 답했다.

“네, 네.”

“그럼, 카스조 오페라단을 알고 있나?”

“네.”

로웨나는 드물게 당황했다. 트레비스가 이렇게 대뜸 공격적으로 물어

오는 경우는 아예 없다. 게다가 눈빛은 얼마나 살벌한지, 로웨나가

오싹 오싹할 정도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예? 뭐를요?”

“카스조 말이네.”

“후, 훌륭한 분이시죠. 음- 그러니까, 그분의 오페라단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개성강한 가수들이 많은 편이지만 단원들의 연기나

노래의 조화가 굉장하죠. 특히 지난번에 공연된 ‘푸른 잎 아가씨’의

경우, 곡의 해석이 아주 독특했어요. 원작은 아주 감상적이고 비극

적인 내용이었는데, 카스조의 오페라는 운명에 속절없이 휩쓸리는

사람들이기 보다는 저항하고 저항하다가 결국에는 무너지는 사람

들을 보여주어서,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보였지요. 특히나 주연을 맡

았던 테너 조나단 폴코의 폴리포스는, 여태까지의 폴리포스가 운명

에 휩쓸리는 슬프고 감상적인 낭만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왔다면 그

의 폴리포스는 섬세하지만 강인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그는 강한 테너지요. 그런 강한 테너를 목소리를 낮추거나 부드럽

게 해서 맞추는 대신,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하여 능력을 살려준 거죠.......오?”

그리고 로웨나는 트레비스의 얼굴이 살벌하게 굳어가는 것을 보고 이

거 실수했나, 싶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카스틸리아 극장과 카스조

오페라단을 비교하며 카스조가 더 낫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

바보, 눈치 봐서 말할 것이지! 로웨나는 자신이, 믿을 수 없게도,

‘바보같이’ 생각 되었다. 여기서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말하면

더 바보였으니, 로웨나는 가슴이 펄떡대도 최대한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음, 솔직하게 말해주어서 정말 고맙네. 아, 나는 이래서 그린 양이

마음에.......들어. 참 똑똑하고, .....뭐랄까, 아주 훌륭한 아가씨야!”

아무래도 비꼬는 말같이 들렸다. 로웨나는 더욱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로웨나 그린 양, 여태까지 나한테 서운한 거....없었나? 정말

정말 정말 솔직하게 말해줘. 무엇이든 말해도 돼. 예를 들면, 배역

문제 같은 거 말이야.”

이분이 지금 낮술 드셨나, 로웨나는 멍하니 트레비스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런 말을 극장주 앞에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

불평도 없어요- 하면 내숭이고, 저는 이게 마음에 안 들어요, 하고

말하면 나한테 주역을 안 주다니, 당신은 정말 엉터리야! 라는 말

이 된다. 다행히, 지켜보고 있던 카밀턴이 나섰다.

“어이, 트레비스. 아가씨 그만 괴롭히라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냐. 자네 자신이 달라지기 전 까지는. 안 그래?"

로웨나는 감사의 눈길로 그런 카밀턴을 바라보았다. 카밀턴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의 그런 모습에, 로웨나는 그가 왜 그렇게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지 여자의 마음으로 이해했다. 사려 깊고 다

정하며 배려 넘치는 ‘잘생긴’ 남자를 마다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로

웨나 취향은 아니지만).

카밀턴의 말에 트레비스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풀죽은 아이처럼 말했

다.

“나가보게.”

“네?”

“나가 봐도 된다는 말이야. 로웨나 그린 양, 오늘 내가 이런 말한 건

그냥 잊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에, 그리고 그린 양. 나는 그린

양의 노래를 무척 좋아해. 그 동안 서운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자네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알겠지? 정말이야.

나는 정말 그린 양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네.”

로웨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시잖아요, 졸업 공연 때 제게 꽃을 보내주셨

던 것. 아직도 감사하고 있답니다.”

트레비스의 눈이 커졌다. 칭찬받은 아이처럼 기쁨에 반짝이는 눈을

보니, 로웨나는 예전의 그가 기억나 기분이 좋아졌다. 그 때의 그는

정말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신사였고, 지금도 그렇다(발레리나가

해도 상관없는 배경용 코러스나 시키는 건 매우 유감이지만).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로웨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사무실을 나갔다. 카밀턴이 로웨

나에게 손을 흔들며 한족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고 트레비스가 등

뒤에서 크르르릉-- 하고 지친 사자 같은 울음소리를 내더니 훌

쩍거리기 시작했다. 슬쩍 돌아보니, 카밀턴이 트레비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달래주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수잔나가 대체 무슨 일이었느냐고 물었지만, 정

말 아무 일도 없었기에 로웨나는 간단하게 상황을 평했다.

“트레비스 씨가 잠시 정신이 나가셨나봐.”

수잔나는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긴, 요즘 트레비스 씨가 이상하긴 했어. 밤낮 혼자서 중얼 중얼 거

리며, 그래, 그게 좋은 거야, 아니야, 아니야 그러면 안돼, 등등. 대체

왜 그러실까. 혹시 누군가에게 프러포즈를 할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글쎄. 정말 그런 거라면, 되도록 이 카스틸리아에 도움이 될 귀부인

이길 바래야겠다. 개인적으로는 마르첼린 여사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지만 말이야.”

로웨나가 생각하기로는, 아무래도 트레비스는 파난의 시곤으로부터

온 초청장 때문에 흥분해서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카스조에

대해 묻는 것을 보니, 아마도 물망에 올랐던 것이 카스조와 카스

틸리아 극장, 두 곳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불안해서 저렇게 평단원

을 불러 물어 보는 거겠지. 하지만 평단원 중에 하필이면 로웨나

자신을 부른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 카스조에서 나를 불러준다면. 로웨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

지만 곧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까다롭고 도도하기로 유명한 카스

조의 레오노라가 로웨나같은 아이를 눈여겨 볼 리 없다.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 로웨나는, 수잔나와 헤어져 약속이 되

어 있는 추기경의 저택으로 향하기 위해 극장 앞에서 마차를 잡기

시작했다.

지난 번 레슨이 끝나자 추기경 부인인 코지마가 오늘 오후 일찍 저택

으로 와달라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아무리 물어도 그녀는 가르쳐

주지 않았고, 단지 와 달라- 고만 말했다.

참 이상한 아르바이트야-

로웨나는 마차 한대가 쏜살같이 지나쳐가자 욕을 퍼부어 대고는 그리

생각했다.

레슨을 시작한지 삼 주일, 단 여섯 번 교습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네 번 동안, 로웨나는 단 한번도 클로디유를 가르치지 못했다. 갈

때마다, 그 클로디유는 대체 어디 갔는지 코지마만이 그녀를 맞

이했다.

검은 저택의 검은 귀부인은, 그 창백한 얼굴에 잿빛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리고 언제나 클로디유가 아닌 코지마-로

웨나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는 그녀를 가르쳐야 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했지만, 코지마는 갓 학교에 들어온 착한 학생

처럼 성실하게 피아노를 배웠다. 두 번째 레슨 시간부터 로웨나는

더욱 쉽게 가르칠 수 있었고, 지난 번 레슨 때는 오랜 친구처럼 즐겁

게 듀엣곡을 치기도 했다. 게다가 코지마는 정말 빠르게 배웠다.

벌써 작은 소곡을 아주 능숙하게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여섯 번의 레슨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 클로디유와는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로웨나는 쉽게 마차가 잡히지 않자, 초조해하며 극장 입구에 걸린 시

계를 보니 오후 두시였다. 이렇게 꾸물대다가는 오후 네 시나 다섯

시에나 도착하겠다, 로웨나는 걱정하며 초조해했다.

그런 그녀 앞에 흰 마차 한대가 멈추었다. 아무리 봐도 개인마차 같

아서, 로웨나는 누군가가 극장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하며 뒤로 물

러났다. 마차 문이 열리더니, 으리 번쩍 화려하게 차려입은 통통한

부인이 나타났다. 뒤로 트게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마차에

서 내리자 거대한 칠면조 한마리가 내려앉은 듯 했다. 그녀는 깃털

가득한 모자를 쓴 머리를 휘두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로웨나를

발견하게 되자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로웨나는 거대한 칠면조가 돌

진해 오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혹시, 로웨나 그린 양이신가요?”

“맞는데요.”

부인은 핸드백을 뒤져 그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로웨나에게 내

밀었다. 그리고 그린 듯이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부브리아노 의상실의 대표, 마담 코로비랍니다. 저희 의상실에 대해

서는 잘 알고 계시지요?”

로웨나는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금박은박 입혀 번쩍거리는 명함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의상실이 황족 귀족의 부유층 귀부인들이

드나드는 최고급 의상실 중 하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닌

도 그 집에서 드레스를 맞추곤 했고, 마델로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

다. 즉, 로웨나는 근처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물론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가씨또래의 숙녀 분에게는, 저

희 의상실은 꿈의 궁전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니까요. 오호호호호호!

우리 의상실에 첫 주문을 맡기시는 순간, 바로 이 브란 카스톨

사교계에의 주역을 따는 것이나 다름없답니다!”

그리고 마담 코로비는 로웨나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자, 갑시다! 오늘 7시 무도회에 맞추려면, 지금 당장 가야 하니까

요!”

“무도회에? 아니, 잠깐!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 무도회 갈 일 없어

요.”

마담 코르비가 두 손을 맞잡더니 빠르게 비볐다.

“저희는 오늘 오후에 카스틸리아 극장 앞에서 아가씨를 모시고 드레

스를 입혀드리라는 주문을 받았답니다.”

“드레스를요? 가만, 방금 전에 오늘 7시 무도회랬잖아요! 지금 치수

를 재서 드레스를 만든 다음 무도회에 내 보낸다는 말이에요! 세

상에, 거기 의상실에는 요정할멈이라도 있는 건가요?”

다시 마담 코르비가 까르르 웃었다.

“어머나, 맙소사. 아가씨의 후견인이라는 분께서 아가씨를 깜-짝 놀

라게 해 주려고 했나 보군요! 정말 숨넘어갈 정도로 아리따운 숙녀

분과, 그 숙녀분의 이모님이라는 고상하신 귀부인께서 저희 의상실

을 방문하여 아가씨 사이즈에 맞춘 드레스 한 벌을 주문했답니다!

오늘까지, 가봉 없이 완성해 달라고 했지요!”

로웨나는 입을 딱 벌렸다. 말 한마디만 듣고도 상황파악을 단번에 끝

내는 초능력 비슷한 눈치를 가진 로웨나였다. 코로비인지 코로가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자기 혼자서 주절거리는 몇 마디로, 코지마 부인

과 클로디유가 이 의상실을 방문하여, 자신들의 옷을 맞추며 로웨

나의 드레스까지 맞추었다는 것을 예상하는 건 아침해의 방향을 가

리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담 코로비가 로웨나

의 팔을 휙 낚아채 마차에 집어넣고 마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로웨나는 마차 벽에 박은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을 삼키느라 잠시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마차는 돌진하듯 길을 가로질러, 의상실들

이 늘어진 로시르망 가로 단박에 접어들었다.

마차 창밖을 바라보며 로웨나는 조마조마했다. 귀부인들이 하녀들이

나 시녀들을 대동하며 오가고 있었고, 그 중에 무도회 장에서 로웨

나를 여가선용 삼아 으적 으적 씹어대던 고상하신 여인들도 몇 명

있었다.

로웨나는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대며 고개를 당겼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오늘 7시 무도회는 또 뭐고! 클로디유가 왜 나한테 드레스를

선물해 주는 거지? 고작 한번 만나본 사이인데? 로웨나는 이 마담

코로비라면 당연히 그 무도회에 대해 알 거라 생각하며, 단숨에 물었다.

“오늘 어디서 무도회가 있는 거죠?”

“홀라그로 성에서 있지요. 그곳의 멋진 백작님께서 파난에서 돌아오신

기념으로 멋진 무도회를 여셨답니다.”

*******************************************************************

작가잡설: 시간 지나면 뭐든 둥글 둥글해 지나 봅니다. 흠-

다음편은 3일 뒤에!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