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편
의외의 선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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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은혜를 갚을 테지만, 눈앞의
드레스는 핑크빛 돼지에다 레이스를 입혀 놓은 듯 망측한 물건이
었다. 개더로 잡은 주름 가득한 치마에, 그 단마다 치렁치렁 늘어진
프릴, 푹 파인 네크라인의 보디스를 와글와글 장식한 레이스. 거기다
가, 드레스의 리본은 새 빨간색이었다. 로웨나의 머리카락과는 한
박자 정도 어긋난 붉은 색으로, 입고 있다면 무언가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어 아주 어색해 보일 것이다.
정말 하나도 안 어울릴 거야!! 로웨나는 드레스를 보며 생각했다. 어
렸을 때 어머니가 빚을 내서 사온 프릴과 레이스 가득한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와 기분이 비슷했다. 로웨나는 그 옷을 입고
에닌의 생일파티에 갔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에닌 친구
들의 어머니들은 어머나, 옷이 참 예쁘구나, 하고 감탄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로웨나가 듣던 말던 ‘봤어요, 그 꼬마 원숭이가 입고 온 원
피스?’ ‘곡예단에서 사 온 걸까’ 하고 지껄여댔다. 지금도 지나치
게 화사한 드레스는 피하는데, 별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
만 그 때의 악몽 때문이기도 했다.
로웨나는 애써 기뻐하는 듯 웃어 보이며 코르비에게 물었다.
“대체.....누가 이 꽃분홍색 천을.... 골랐지요?”
“어머나, 당연히 그 아름다운 아가씨지요. 그 찬란한 미모답게, 안목
도 정말 훌륭하시다니까요! 브란 카스톨에서 가장 인기 높은 색조
랍니다. 자, 어서 입어 보세요! 분홍색이 어울리지 않는 아가씨는
없답니다.”
화사한 제복의 종업원 아가씨들이 가난한 아가씨들의 소원을 들어주
는 요정의 시녀들처럼 드레스 양 옆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자, 시작해라!”
드디어 공포의 요정 아줌마-즉, 마담 코르비-가 지팡이를 휘두르듯
그리 외쳤다.
곧 요정의 마법이 시작되었다. 우르르 몰려든 세 명의 아가씨들이 로
웨나의 블라우스를 벗기고 치마를 벗기고, 코르셋을 입히더니-그건
서비스라고 코르비가 말했다- 꽈악 조였다. 어머나, 얇은 허리지
만 더욱 꽉 꽉 조여야 더 예뻐 보이지요! 하고 코르비가 주문을
외워대자 숨이 컥 막힐 정도로 꽉 조여졌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좌
악 끼치는 크리놀린이 끼워진 패티코트도 입혀졌다. 그리고 그 위에
무도회 드레스가 껍질이라도 싸듯 입혀졌다. 그 다음, 여기저기에
서 달려든 종업원들이 머리를 빗고 말아 올리고 깃털을 꽂고 꽃을
달아주었다. 화장까지 마치는 데, 거의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어깨
에 주렁주렁 달린 코사주를 대강 정리하자 드디어 마지막까지 달라
붙어 있던 소녀 종업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썹 정리를 해 주던
아가씨가 거대한 거울을 밀고 들어왔다. 탈의실을 나가서 다른
아가씨들에게 새로운 디자인의 드레스를 광고하던 코르비가 다시 들
어오더니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너무나 어여쁘세요! 어서 거울을 보세요. 마법처럼 아가씨를 바꾸어
놨군요.”
로웨나는 아주 두려워하며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참담
한 몰골에, 이 꼴로는 어디로도 나갈 수 없다고 바락 바락 악을 쓰며
주저앉고 싶어졌다.
분홍색 드레스는 생각보다 더 안 어울렸다. 다른 아가씨에게라면 어
떨지 모르겠으나, 로웨나처럼 눈 꼬리가 살짝 올라가 도도해 보이는
소녀에게는 남의 옷 입혀놓은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게다가 드
레스를 장식한 붉은 리본들은 머리카락과는 무안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머리에 꽂힌 꽃들은, 눈물나올 정도로 안 어울리는 데이
지 꽃이었다!!! 거기다가,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진주 귀고리에 진
주 목걸이라니! 이 꼴로 그 살벌한 사교계 여자들 앞에 나선다면
얼마나 쑥덕거리며 칼질을 해 댈지, 안 봐도 뻔하다.
로웨나는 눈으로 거울을 깨 버릴 듯 자신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비밀
선물도 비밀선물 나름이다. 입고 나갈 옷, 그것도 한 두 푼짜리도
아닌 이런 어마어마한 드레스를 선물로 줄 것이었다면, 비밀로 해서
는 안 된다. 무슨 색을 좋아하는 지, 어떤 색이 어울리는 지, 직접
이야기해 보고 논의 해 보아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그녀가 가난한
무명 오페라 가수라지만, 아무 옷이나 던져준다고 눈물 흘리며 받
는 건 아니다.
“이런, 정말 멋진데.”
“!!!!!!!”
로웨나는 그 목소리에, 놀란 눈으로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로
웨나의 어깨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로웨나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에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가 얼마나 육중한
지 온 몸으로 체감했다. 밀도가 육중한 액체 속에 푹 잠겨 움직이
는 기분이었다.
“꽥-”
“저런, 몸가짐을 조심해야지. 그리고 요조숙녀들의 신전인 이 가게 안
에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하고.”
로웨나는 비틀거리며 허리를 폈고, 도도하게 턱을 들며 그 남자를 바
라보았다.
알렉산더였다. 그것도, 연회용 고급 정장으로 잘 차려 입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로웨나는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새침하게 물었다.
“여기는 웬 일이신가요, 백작님?”
“데리러 왔지. 사실, 한참 전에 도착했는데 그린 양이 옷 갈아입는 중
이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알렉산더는 에스코트 하듯 손을 내밀었다. 마담 코르비가, 등
뒤에서 뜨거운 눈길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나, 연인이신가요,
약혼자이신가요,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일가친척이나 아는 분이신가요?
등등을 속으로 신나게 지껄이며. 로웨나는 뒤를 돌아보며 그녀
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알렉산더가 그녀의 약혼자라도 되는 듯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활짝 웃었다. 알렉산더는 그녀를
이끌고 가게를 나섰다. 그가 지나가자, 가게 안의 모든 여자들의
눈길이 일시에 로웨나와 알렉산더에게로 쏠렸다. 젊은 여자들의
눈이 번쩍이더니,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서로에게 뭐라 속닥거렸다. 대
강 들어보니, 저 얼굴 알아! 홀라그로 성의 성주야! 세상에, 그럼
옆에 있는 저 여자는 대체 누구지? 약혼녀인가? 애인일지도 모르잖아!
아냐, 분명 에닌 마델로와 연인 사이라고 들었어! 그럼 에닌
마델로 양이 버려진 건가? 그게 말이 되니!!! 저 여자애 얼굴을 봐,
얼굴을! 에닌 마델로 양과 비교가 되냐고! 가게를 나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화려하고 거대한 마차에 탈 때까지 로웨나는 시시각
각 불쾌해졌다. 저 여자들은 아마도 오늘 집에 가서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늘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무도회가 시작될 즈음에는
궁금증이 절정에 달해, 무도회에 나타난 로웨나를 향해 엄청난 시선
이 쏟아질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참으로 변변찮은 모습에, 온
갖 트집을 잡아대며 깎아내리고 헐뜯을 것이다.
“대체 그 드레스는 누가 고른 거지?”
“너무 잘 어울리지요? 오늘의 주인공은 저, 로웨나 그린 양이 될 거
랍니다. 꽃잎 같은 드레스를 입고 브란 카스톨의 정글을 누비는 꽃
분홍 돼지 공주님! 내일이면 온 카스톨에 소문이 나겠네요.”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아닌 걸.”
로웨나는 입술 끝을 치켜 올리며 웃었다.
“내기해도 좋아요. 분명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거
라고요.”
“그런 걸로 내기하는 건 귀찮은 일이야.”
“그건 그렇고,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나 이야기 해 줘요! 지금, 이
엄청난 패티코트에 코르렛에- 이것만으로도 숨 막힐 지경이라고요!”
“별 일 아니야. 나는 지난주에 파난에서 돌아왔고, 그런 내게- 추기
경으로부터 정중한 제안이 들어왔지. 클로디유 양을 위해 파티를
열어 달라고.”
“단 한사람을 위해서요?”
알렉산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추기경이 명령하는 거라면, 클로디유 양과 결혼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하는 지라- 별 수 없었지.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클로디유 양이, 그 의상실에서 그린 양을 수송해 오라는
말을 전하더군.”
“세상에나, 놀랍군요. 그 클로디유 양의 진짜 정체가 대체 뭐죠? 한
사람을 위한 파티에, 그 아가씨와 함께 놀 아가씨를 위해서는 드레
스를 새로 맞추고 보석도 주고. 거기다가, 홀라그로 성의 성주이신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님께서 그 파트너를 데리러 직접 나오시고.
너무 대단해서 입이 벌어질 지경이에요. 누가 보면, 추기경이 부인
은 코지마 여사가 아니라 클로디유 데지레 양인 줄 알겠어요.”
로웨나는 그렇게 재잘재잘 대다가 알렉산더가 아무 대꾸도 없이 창밖
만 바라보고 있자 그만두었다. 알렉산더도 즐겁게 그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파난에서의 일은 잘 해결 되었나요?”
“물론. 그리고 아가씨 안부를 묻는 사람도 만났지.”
로웨나는 고개를 팩 소리가 날 정도로 돌렸다. 그 모습에 알렉산더가
웃었다.
“유릭 크로반군에게 잘 지낸다고 말 해 줬어.”
“참 고마우셔라. 그 보답으로- 만약 원하신다면, 이 분홍 돼지 같은
모습으로 춤도 춰드릴 게요.”
“고맙군.”
“그런데 유리는.... 잘 지내고 있나요?”
“아주 바쁘더군. 내가 떠나올 때 즈음엔, 넉넉잡아 일주일은 거뜬히
고생해야 하는 임무수행 중이었지. 본인 말로는, 주말에 교대를 한
다고 하던데- 지금쯤 교대하고 본대로 복귀했겠군...... 참 재미있는
상사를 모시고 살더라고......”
알렉산더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뚜껑을 덮
은 다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로웨나는 그를 바라보자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들었던 생각이-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거지?”
알렉산더의 회색 눈이 자신을 향하자, 로웨나는 얼른 눈길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눈빛에 사로잡힌 듯,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백작님을 보면 생각나는 게 있어서요.”
“뭐지?”
“아주 어렸을 때...... 생각이 나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저한테
굉장히 예쁜 옷을 입혀서 어딘가로 데리고 가셨던 적이 있었어요.
궁전처럼 굉장한 곳이었죠. 정확히 얼마나 어떻게 굉장한지는 잘 기
억 안 나는데, 정원에 장미가 가득했던 건 기억나네요. 깨끗한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주 바쁘게 오고 가고, 맛있는 냄새도 잔
뜩 풍기고.......어머니는 누군가를 찾아 그곳으로 가신 거였어요.......”
“그래, 그곳에서 뭘 봤지?”
“어머니는 그 저택의 주인인 어느 신사분과 싸웠어요. 흰 옷을 입은
남자였는데......... 음, 머리가 갈색이고 눈은 검었던 것 같아요.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로웨나는 그렇게 더듬더듬 말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평
소라면 이렇게 머뭇머뭇 말하지 않는다. 또렷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백작의 회색 눈을 바라보는 지금,
긴장한 듯 어색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럴까, 대체 왜 이러
는 걸까- 자신에게 다그치면서도 로웨나는 더듬더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웨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날 본 것은 참 많았다. 아주 잠깐이었
으나, 그 몇 분 동안 로웨나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잊지 못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잠시나마 묻어두
고 기억하지 않은 듯 살아왔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백작의 회
색 눈을 바라보며 돌아오고 있었다.
“창-”
“창?”
“아주 커다란 창이 있었어요. 커튼으로 반쯤 덮인 창이........ 피아노가
있는 방이었던 것 같네요. 그 옆에, 누군가가 서서 정원에서 어머
니와 싸우는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흰 드레스를 입은.....소녀.
멀어서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이 희고 머리카락은
아주 검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
로웨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백작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문득 고개를 돌렸지요. 그녀가 있던 방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어요. 꽤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소년이었는데.....
그 소년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창가로 가서 여기 저기 둘러본 다
음 소녀의 손을 잡아 안으로 당기더니 커튼을 닫았지요. 아주 꽉-
누구도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아, 그래요...... 봤어요. 뒷
문에 마차 한대가 있었어요. 그리고 저택을 나선 소년이 소녀의 손
을 잡고 그 마차로 달려갔죠. 소녀는 그 마차로 달려가다 말고,
돌아서서 저택을 한번 바라보았어요. 소년이 어서 오라고 다그쳤죠.
그녀는 한참이나 그 저택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돌아서서 마차로 달
려갔어요. 그 때 그 소녀가 저를 발견했죠. 잠시 멈추어 서서 고개를
돌렸으니, 알 수 있어요....... ”
“그리고, 그 정열적인 연인들은 그대로 떠났나?”
로웨나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유모의 손을 놓고 엄마에게로 도망쳤으
니까요. 그 다음은 기억 안나요.”
“놀랍군. 고작 두 살 때 일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다니.”
“인상적인 건 누구나 오래 기억해요.”
마차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저택의 빛이 비껴드는 컴컴한 정원이
나타났다. 알렉산더가 먼저 내려 로웨나에게 팔을 내밀었다. 평소
라면 흥, 하고 무시했을 테지만 오늘은 육중한 드레스 덕에 고집피
울 수 없었다. 간신히 마차에서 내리니, 그곳은 홀라그로 성의 뒤
뜰이었다. 소란스런 마차 바퀴와 말발굽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재잘
재잘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뒤뜰은 우물 안처럼 고요했다.
알렉산더가 로웨나를 잡아끌어 뒷문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성의
뒷문을 지나, 텅텅 빈 화려한 복도를 지나, 계단을 2층 정도 올라간
뒤에 알렉산더는 어느 문을 열어 젖혔다.
그곳은 서재 같은 곳이었다. 책장 가득 책이 꽂혀 있었다. 벽난로 위
에는 아름다운 조각상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예쁜 장미가 한가득
꽂혀 있었다.
“어서 와요, 그린 양. 너무 예쁜데요.”
그리고 서재의 의자에, 클로디유 데지레가 여왕처럼 앉아 그녀를 맞이하
고 있었다.
눈부시도록 하얀, 눈과 안개로 빚어낸 듯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
었다. 천은 대체 무엇으로 짰는지, 대체 어떻게 짰는지 알 수 없었으나-
마치 거미줄로 짠 듯 은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으며 그녀가 움직이자
화려한 꽃무늬가 수면이 흔들리듯 드러났다. 새카만 머리를 장식한 꽃은
눈부신 백장미.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드레스 치맛단을 감싸며
장식하는 붉은 리본은, 로웨나의 드레스에 있는 새빨간 색이 아닌- 장미
와 금을 녹여 만든 듯한 고급스런 붉은 색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
어나,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더니 로웨나의 어깨를 잡았다.
“오늘은 제 첫 무도회에요. 그런데........ 사실, 저는 아주머니와 같
이 가고 싶었는데, 그분은 이런 자리를 너무 싫어하시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집안은 시골 귀족가문이라 이곳에 아는 숙녀분이 하나
도 없어서........ 그래서 그린 양과 같이 가겠다고 했지요. 제 친구
역할을 해 주세요.”
사교계에 처음으로 나오는 소녀들은 ‘친구’ 한명을 데리고 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친구’들은 또래의 숙녀들이나 신사들에게 사교계에
데뷔하는 소녀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통은 이미 사교계에 발을
넣은 미혼여자들이 해 주는데, 아는 사람이 많거나 신분 높은 숙녀들이
이런 저런 선물을 받고 그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처음이 무엇보다 중
요하기 때문이다.
로웨나가 물었다.
“그럼, 이 드레스는...... 클로디유 양이 주문하신 건가요?”
“물론이에요. 제 선물이니,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마세요.”
로웨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얹힌 목걸이를 보았다. 흰 드레스와 아주
어울리게 번쩍이는 다이아몬드였다. 귀불에도, 별을 단 듯 어여쁜 다이아
몬드 귀걸이가 달랑이고 있었다.
로웨나는 화가 났다. 조금만 조사한다면, 로웨나가 이 브란 카스톨의 사
교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로
웨나는 정식으로 데뷔할 만큼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저 공연 기념
파티가 열릴 때 잠깐 얼굴 들이밀고 인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추
기경 부인의 조카 정도 되는 신분 높은 아가씨의 소개를 맡긴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로웨나는 그녀의 속셈이 무엇인 지 알만 했다. 보통 가난한 집 아가씨
라면, 이런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들을 선물로 받는 것만도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처지가 될지 생각도 안하고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로웨나는 지나치게 자존심 강하고 머리도 좋았다.
세상에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게 없다는 걸 알만한 나이도 되었고, 이 정도
선물이 주어진다면 재앙에 가까운 대가를 가져간다는 것을 알 만큼 철도
들었다.
로웨나는 아름다운 클로디유를 활짝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거절합니다.”
“네?”
“죄송합니다만, 저처럼 미천하고 무지한 사람이 천사처럼 아름답고 꽃
보다 귀한 아가씨의 친구로 이 무도회에 참석한다면, 오히려 누가 될 거
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제 어머니의 행실 때문에
저는 이 사교계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거든요. 아가씨의
이름을 더럽히고 말 거에요.”
“저는 상관없어요. 그린 양은 누구보다 영리하고, 지적이고, 아름다운
분이니까요.”
“아가씨가 그리 생각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답
니다. 아가씨의 진솔하고 맑은 영혼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름 높은
추기경 예하를 생각해 주셔야지요. 저는 그분을 아주 존경하고, 저 때문
에 그분이나 그 가족의 명예에 흠집이 나는 건 원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았는걸요.”
“그렇다면-” 로웨나는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알렉산더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그녀의 말을 기
다렸다. 로웨나가 물었다.
“백작님, 에닌도 초대되었나요?”
“당연하게도.”
“그렇다면 잘 되었군요. 이 브란 카스톨의 꽃 중 하나인 에닌 마델로라면
데지레 양의 친구로 손색이 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에닌 마델로
양은 제 친구이기도 해요.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저 자신
보다 아끼는 친구랍니다. 그러니 제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그 아이와 함께 가 주세요.”
“그린 양, 저는 그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고 그 사람도 저를 모를 거랍니다.”
“음, 그렇기도 하군요. 저는 오늘 아가씨를 두 번째로 보는 거지만,
에닌은 첫 번째로 뵙는 걸 테니... 제가 데지레 양을 두 배로 잘 아는 건가요?”
클로디유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로웨나는 그녀가 여태까지 받은
급료를 계산해 보고 다음 주에 그만두게 된다 할지라도 그다지 손해 보는 일
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에닌과 함께 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그린양, 저는......”
“......아, 머리가.”
그리고 로웨나는 해쓱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보
는 오터가 방으로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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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한다.........
다음 편은 5일 뒤에! .........스퍼트를 내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만;;
비축분이 도무지 안 쌓여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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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0장 허영의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