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19화 (119/174)

제119편

허영의 그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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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여기는 대체 웬 일인 거니.”

“그야 초대를 받아서 온 거죠. 그건 그렇고, 그 돼지 세 마리는 대체

뭐죠?”

로웨나의 험악한 말에, 아자렛이 피식 웃었다.

“안젤리카 휴즈 양과 그녀의 친척들이야. 휴즈 양은- 윌리엄의 사촌

여동생이지. 오늘 같이 왔어.”

“웬 일로 아주머니가 아저씨 없이 왔나 했더니-”

“휴즈 양이 워낙에 간곡하게 청해서 온 거란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 로이. 그이가...... 랭카스크 공작가와 그렇게 된 건 내 탓이잖니.

그래서...... 그 이의 친척들과 조금이라도 잘 지내고 싶었던 것

뿐이야. 무슨 수모를 당하더라도 참기로 했지. 하지만- 별로 좋은 선

택은 아니었던 것 같아.”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최악이었어요.”

“네가 보기에도 그러니?”

로웨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들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해 줘도 소용없어요. 저 여자들은

말이에요, 아주머니를 자기와 비슷한 계급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아주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고요! 자기 존재의 위협이라고

생각한달까.”

“그래도...... 별 수 없잖니.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아. 특히나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것을 고

치는 건, 누구에게도 힘든 일이란다.”

“그래서 아주머니처럼 너그러이 봐주라는 말인가요.”

“그들에게 무시당하지만 않도록 해. 물론 로이는 영리하고, 또 아주

뛰어난 아이니까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테지만... 나는 배운 것도

변변찮고 재주도 없어서 이런 일을 당하는 거야. 저런 사람들은 자기

가 생각하는 기준만 가지고 사람들을 잰단다. 자기만의 기준에 못

미치면, 다른 부분이 아무리 훌륭해도 보려하지 않아. 그리고 자

기들이 다른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하게 형편없는 것도 생각하지 않지.”

로웨나는 화를 낸 것이 쑥스러워졌다. 로웨나가 아는 것을, 어른인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성주께서...... 1층의 갤러리에서 쉬라고 하셨어요.”

“그 분이 왜......?”

“이야기하자면 좀 번거로운데........ 사실, 어떤 여자들이 아주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같이 들었어요. 보나마나 험한 일을 당하고 있

겠구나 싶어서 아주머니를 찾으려고 나서려는데 백작님이 그곳에서

쉬라며 배려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분이구나. 지난번에도 도와주시더니.”

아자렛이 그리 말하며 웃는 것을 보니, 로웨나는 은근히 불안해졌다.

알렉산더라는 남자는, 로웨나가 보기에 아무 여자에게나 친절한 남

자는 결단코 아니었다. 아자렛이 말했다.

“그런데........ 아까 너, 대체 뭐라고 말한 거니?”

“‘자아, 돼지 숙녀님들. 즐겁게 지껄여 대는데 방해 드려서 미안한 데,

이 중 유일하게 사람다운 사람이시며 아름다운 아자렛 랜든 부인을

모시고 나가도 될까요?’”

아자렛이 피식 웃었다.

“‘아아, 물론 한 마디도 못 알아듣고 계신 것은 잘 압니다. 그러니 제

가 지금 당신들을 머저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리 없지요.

깃털을 꽂아 더더욱 새 같아 보이는 덜떨어진 숙녀 분들, 저는 랜

든 부인을 모시고 가렵니다. 어쩔래요? 허락해 주시겠지요.’”

아자렛은 눈물까지 훔쳤다.

“맙소사, 정말 그렇게 말한 거니.”

“다행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단 한마디도 못 알아듣더군

요. 하긴, 그 여자들은 학교 다니면서 누구네 집 레이스가 어떻고

누구네 집 드레스가 어떻고 어디어디에서 뭐가 유행하는 지만 연구

하느라 공부나 제대로 했겠어요. 흥- 그런 주제에 귀한 몸들이라고

으스대는 꼴이라니.”

“그만 해. 재미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듣겠다. 게다가 그 사람들

이 너를 나쁘게 말 할까, 걱정이구나.”

“걱정 마세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보다 예쁜 것에는 아주 신경 써도,

자기보다 똑똑한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적당히 멍청한 것을

숙녀의 본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로이-”

아자렛이 다시 주의를 주었으나, 주변에는 사람들이 그다지 없었다.

로웨나는 보세요, 누가 신경 쓴다고- 하고 말하듯 휘 둘러보았다.

아자렛은 웃기만 했고, 로웨나가 할 일은 그녀를 이끌고 1층의 갤

러리로 향하는 것이었다. 1층 구조는 대강 알고 있기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무도회장과 한참 떨어진 곳으로, 성의 동남쪽에 면해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해 살짝 문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름

이라, 창문은 열려 있었으나 커튼은 내려와 있었다. 아자렛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로웨나는 그 안을 살펴보다가, 테이블 위에 아

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말했다.

“제가 마실 것 좀 가지고 올게요. 먼저 쉬세요.”

로웨나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로 갤러리를 나섰다. 지나가는 길에

몇 번 아는 사람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렵잖게 무도회의 바에서 샴페인 한 병과 잔 두개를 얻어서 돌아

와 보니, 아자렛은 갤러리의 전시물을 정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감탄에 어린 눈빛이었다. 로웨나가 그 전시물을

보니, 대략 팔콘 이전의 왕국시대에 만들어진 조각상들이었다. 신

비로운 우윳빛 여신상이었다. 이교의 여신이 허리를 젖혀 창을 들고

무언가를 맞추려는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자렛

은 창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로웨나는 궁금했다. 대체 뭘 하려

는 걸까- 궁금증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 고개를 젓고, 그러다 흐릿하게 웃었다.

로웨나는 가끔 그녀의 쓸쓸한 표정을 보고는 했다. 슬픔과 그리움,

죄책감과 안타까움- 그 쓸쓸한 겨울아침 같은 우수가 그녀의 눈가를

떠났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놀

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로웨나 역시 자기도 모르게 문 뒤로 숨고

말았다.

커튼으로 가려진 테라스에, 누군가가 서 있었고............. 알렉산더였

다.

“죄, 죄송합니다. 그곳에 계신 줄 몰랐어요......”

아자렛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곧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알렉산더는 테라스를 나서 갤러리 안으로 들어왔다. 로웨나는 어찌해

야 할까, 잠시 생각해야 했다. 이곳으로 가라 했던 것은 분명 알렉

산더였다. 어쩌면, 로웨나와 함께 있을 아자렛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아자렛이 혼자 남아 있기를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른

다. 전자라면 이해가 되지만, 후자라면....그리고 그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아자렛이 난처해진다. 젊은 독신 백작

과 미모 하나만으로 공작가 자제의 아내가 된 여자라니- 엉뚱한

스캔들이 일어날 게 뻔하다. 로웨나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둘 만

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한순간- 그 한순간에 로웨나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아자렛은 알렉산더를 바라보고 있었고, 알렉산더 역시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그 눈길 안에 로웨나의 직감

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저릿함이 있었다. 구름 너머의 달빛 같은,

그런 서리도록 신비롭고 아스라한 떨림이 있었다. 그러나- 로웨나

로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전혀-

아자렛이 먼저 눈길을 내렸다. 백작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

으나,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자렛이 말했다.

“로웨나가 곧 올 겁니다. 그 아이와는 아는.....사이시죠?”

“그렇기도 하지요.”

백작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긋나 삐걱대는 듯,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마델로 양과...... 교제중이라고 들었어요.... 로웨나는 그 아가씨의 친

구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군요.”

“마델로 양은 그저 아는 집안의 아가씨일 뿐입니다. 아무 사이도 아

닙니다.”

“그래도 마델로 양만한 숙녀분은 없어요.”

“결혼은 안합니다.”

“가족은 꼭 필요한 거에요. 아직 젊으시니, 언젠가는 좋은 아가씨와

만나서 가족을 가지시게 될 거에요.”

“가족은 필요 없습니다. 가족처럼 제 일을 도와주는 사람은 많고,

또...... 재산을 물려줄 사람은 벌써 정해져 있어요.”

“어느 분인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제게 새 생명을 주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준 사람이지요.”

“은인인가요?”

“그런 말로도 부족하지요. 그는 제게 모든 것을 준 거나 다름없는 사

람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제가 가진 모든 것이 그의 것입니다. 그

리고...... 약속한 것이기도 하지요. ....그는 제게 자유를 주고, 저는

그에게 제가 앞으로 가질 모든 것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디까지 가

질 것인지를 정하는 건 그의 몫일 뿐- 그러니 아내라도 있다면 정

말 골치겠지요.”

아자렛은 어색하게 웃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길을 피하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알렉산더의 눈길이 그녀를 똑바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로웨나는 이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내버려 둔다면 곤란했다.

누군가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저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정말 끝장이다.

“어머나, 로웨나 그린 양 아닌가요.”

로웨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바로 앞에, 클로디유 데지레가 서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에닌 마델

로가 있었으며, 다른 상류층 아가씨들도 몇 명 서 있었다. 에닌이

로웨나를 보고 놀랐다. 클로디유가 활짝 웃었다.

“숙녀 분들과 함께 갤러리를 보러 왔답니다. 다들, 이곳의 갤러리가

굉장하다고 해서요.”

클로디유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조금만 거리가 멀어진다면,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손을 들어 로웨나가 열어둔

문의 반대편을 젖혔다. 로웨나는 제발 보지 못하는 동안 둘 사이

에 아무 일도 없었기를 바랐다. 이건 천박한 악몽이다.

“어머나........”

클로디유가 묘하게 웃었다. 그 서늘한 눈빛을 로웨나는 놓치지 않았

다. 아아, 맞다. 저 눈빛..... 분명, 아주 예전 추기경의 성에서 코지마

부인에게 카드를 던져줄 때의 눈빛과 똑같았다. 덫에 채인 생쥐를

보는 장난꾸러기 아가씨 같은 눈빛.

갤러리 안에는, 알렉산더와 아자렛이 있었다. 아자렛은 당황하고 놀

라고 있었고, 알렉산더는 여전히 서늘한 눈빛으로 활짝 열린 문밖의

클로디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디유 옆에 있는 에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닌이 처음 지어보

이는 표정이었다. 당혹감과... 어쩌면 분노와 놀라움 같은, 그런 복

잡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어려 있었다. 같은 모습을 본 아가씨들

의 눈에는 분노와 경멸이 담겨 있었다.

클로디유의 연출은 완벽했다. 지독할 정도로.

로웨나는 클로디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백작과 아자렛을 바라

보던 클로디유가 고개를 돌렸고, 그 잔혹하도록 아름다운 눈과 마

주치자 로웨나는 오싹했다. 순간, 꼼짝할 수 없었다. 그 때 뒤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에, 2층에서 클로디유와 아자렛

에 대해 이야기하던 귀부인들이었다. 지체한다면, 저 두 사람 역시

갤러리의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아자렛과 알렉산더, 두 사람 사이

에 아무 일도 없다 하더라도, 있게 만드는 것이 소문의 힘이다.

로웨나는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이 순간을 그대로 넘겨버린다면,

저 가볍고 방정맞은 주둥이들이 퍼뜨릴 스캔들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로웨나가 쳐들어오자, 아자렛이 당황했다.

“로이- 난...”

로웨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잔을 주었다. 그리고 백작에게도 잔을 준

다음, 샴페인을 따랐다.

“자, 마실 것 대령했습니다- 아자렛 아주머니, 백작님. 오래 기다리

셨죠? 하지만 바를 찾는 데 좀 오래 걸려서요.”

그리고 로웨나는 문 밖의 아가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하고 계세요? 갤러리를 보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서 들어와

서 구경하세요. 저희들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벌써 다 봤거든요. 곧

나갈 생각이었어요.”

아가씨들의 눈빛이 묘해졌다. 실망하고 있는 듯 보였다. 며칠간 신나

게 떠들어 댈 굉장한 스캔들 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로

웨나가 잠시 자리를 떴기 때문에 벌어진 오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

자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에닌이 누구보다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클로디유의 눈빛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

으나, 그 눈 안에 담긴 분노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이, 못된 계집애!

로웨나는 그리 생각하며,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단 한순간도 눈길

을 떼지 않고, 검과 검을 맞대듯 바라보았다. 클로디유가 먼저 눈

길을 돌렸다. 그리고 갑자기, 무엇에 놀란 듯 흠칫 뒤로 물러났다.

로웨나는 뒤돌아보았고, 그녀가 본 것은 알렉산더였다.

매서운 눈빛이었다. 옷자락을 밟은 무엄한 광대를 보는 왕같은, 차고

잔혹한 눈빛이었다.

클로디유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등

을 돌리고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아가씨들이 당황했으나,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급히 달려갔다. 등 뒤에서 아자렛이 말했다.

“로이, 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피곤하구나.”

“저도 갈게요. 같이 가요.”

로웨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은 아주 찼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말했다.

“로웨나 양, 오터에게 같이 데려다 주라 할 테니 부인과 같이 가도록.”

당부 같기도 부탁 같기도 한 말에 로웨나는 적잖이 놀랐다. 방금

클로디유를 매섭게 쫓아버린 남자가, 매만지듯 부드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갤러리를 나섰다. 문을 나설 때 에닌이 그를

바라보았으나, 알렉산더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당황한 에닌이

아랫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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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훼방은 대죄다, 클로디유!

자, 이 상황에서.... 굉장한 당첨 복권을 쥐고 있을 유리군은~

3일 뒤에 뭐하고 있는지 확인해 드리지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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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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