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편
허영의 그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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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이 잠에서 깬 것은 침대 옆에서 들려오는, 엄마 잃은 강아지가
낑낑대는 듯한 소리 때문이었다. 밤 새 이상한 꿈에 시달렸다. 기
억은 안 나는데, 아주 찜찜하고 언짢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창밖을
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평소보다 몇 분 일찍 일어난 것에 불과했다.
유릭은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묵직한 털 뭉치를 푸욱 밟게 되었
다. 끼---잉, 하고 아주 길게 고통을 참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유릭은 바닥에 길게 누워 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크리
스펠로를 발견했다. 그는 앞발 위에 턱을 얹은 채 눈을 꼭 감고
끙끙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었다. 유릭은 그의 거대한
몸을 힘껏 흔들었다.
“대위님, 잠깐만 변해 보십시오.”
그러자, 크리스펠로가 갑자기 인간 모습으로 펑 변했다. 얼굴이 아주
창백했고, 입술도 푸릇했다. 머리도 무거운지 이마를 짚으며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유릭은 그의 긴 검은머리 그 끄트머리가 하얗
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 심하게 아프면 늘 저런 색이 된다.
“정말 많이 아프시군요. 이젠 다시 변하셔도 됩니다.”
다시, 크리스펠로의 모습이 늑대로 변했다. 아플 때는 늑대로 있는
편이 더 편하고 빨리 낫기 때문이다. 수의사가 아닌 유릭으로서는,
늑대 모습일 때는 얼마나 아픈 지 도저히 알 수 없기에 별 수 없
이 돌아가 달라 한 것이다.
“어젯밤에 뭐 드셨습니까.”
“.....물.”
“어디에 있는 거요?”
“있는 거.”
더 물어볼 필요는 없다. 저리 말하면, 크리스펠로는 정말 ‘마셨다’는
사실만 빼고는 다 잊은 것이다. 크리스펠로가 다시 끄응- 하고 신
음을 흘렸다.
특무부의 펌프에서 쏟아지는 물을 그대로 마셨다가는, 당장에 고열에
시달리는 식중독에 걸리게 된다. 제대로 정수도 소독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2-3일 가량 물을 받아 두었다가 정수를
해서 먹는다. 그러나 최근에 정수기가 고장 났고, 잔수리를 맡아
온(특무부에는 군이 배정해 주는 전문 기술자가 없다....여러모로
열악하다.) 츠발키 상사가 유릭과 교대를 하여 익스턴 광산으로
가는 바람에 당분간 고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물을 받은
다음 끓인 후 식혀서 식수로 사용해 왔는데, 그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마도, 크리스펠로는 어젯밤 목이 말라서 부엌을 뒤지다가
‘정수기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매우 당연하게 잊고 아무 물이나
마신 듯 했다.
“프리델라 님께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크리스펠로가 그래달라고 말하듯 꼬리를 휘둘렀다.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밥.”
“아, 네.”
유릭은 아침 식사 시간 전에 만들어 줄 생각으로, 대강 옷을 껴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누군가가 벌써 일어나 찬장을 뒤지고 있었다. 유릭은 잠자
코 그 사람을 지켜보았다. 몸집이 자그만 소녀가, 찬장 앞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책을 쌓아 놓은 다음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소녀는
찬장문을 열고 그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찾던 것을 발견하게
되자 그것을 집어 내려왔다. 알록달록한 과일사탕이 가득 들어 있
는 병이었다. 소녀는 병뚜껑을 열고 그 안을 뒤져 딸기 사탕과 오
렌지 사탕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에바.”
유릭이 부르자, 사탕을 골라내던 에바는 매우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유릭은 손을 내밀었다.
“사탕은 하루에 두개 이상은 안 된다고 말했다.”
에바가 단호하게 말했다.
“먹고 싶습니다!”
“이 상한다.”
“상해도 상관없습니다.”
유릭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에바는 일주일 만에 먹을 것을 찾아낸
승냥이가 고기를 사수하듯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으나,
유릭이 발로 바닥을 탁탁 치자 별 수 없이 사탕을 내 놓았다. 유릭
이 부드럽게 살벌하다는 것을 모르는 에바가 아니었으니. 유릭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그리고 컵에 우유를 가득 따른 다음, 오
렌지 사탕 세 개를 그 안에 퐁당 퐁당 떨어뜨렸다. 에바는 말하기
난감한 것에 빠진 고깃덩이를 보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그 컵을 바라보았다.
유릭은 웃으며 컵을 내밀었다.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 한단다.”
“.....”
에바가 손에 든 우유 컵을 겁에 질린 눈으로 노려보는 동안, 유릭은
닭고기 살코기 조각들을 찾아 냄비에 넣은 다음 우유를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곧 구수한 냄새가 나며 적절하게 익었다고 판단되자,
그것을 커다란 사발에 담아 방으로 돌아왔다. 음식 냄새를 맡자 크
리스펠로가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흔들었다. 유릭은 닭고기 스프
를 그 앞에 놓은 다음, 세면도구를 챙겨 방을 나섰다.
벌써 특무부 숙소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동료들은 벌써 펌프 앞
에 줄을 서서 잠을 게워내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출근하는 프리델라의 집무실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유릭은 그 집무실 창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순서가 오자 대강 씻은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크리스펠로는 꼬리까지 흔들며 열심히 스프
를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금방 나을 듯 하다. 그리고 막 제복을
챙겨 입고 막 방문을 나서려는데, 문 앞에서 클래리스 소위와 마주
쳤다. 그녀는 멀리서 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새카만 단발
머리에, 아주 큰 키에 앞과 뒤가 별 차이가 없는 몸매를 가진 여장
교였다. 그녀가 유릭을 보자마자 말했다.
“프리델라 님께서 부르신다. 조회 전에 집무실로 오라고 하시는 군.
그리고........ 면담이 끝나면, 내방으로 와 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소위님 방은 왜요?”
“카바냐 중위 때문에.”
“또, 무슨 사고라도 치셨습니까.”
“옆 부대 사령관으로부터 항의가 왔다. 그쪽 사관 둘이 또 결투를 했
다더군.”
“그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이번 달만 두 건이다. 카바냐는 늘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항의하지
만, 이 남자 저 남자 다 건드리면서도 태도를 확실하게 하지 않는 건
분명 잘못이었다. 특무부야 그런 카바냐에게 익숙하지만, 옆의
부대는 그렇지 않다. 특히나 신임 장교나 풋내 살벌한 사병들은 더
더욱 모른다. 카바냐는 자기만 가지고 뭐라 한다고 투덜대지만, 거
의 비슷한 편력의 소유자인 클래리스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으
니 변명거리도 못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리델라 님께서 벌금을 물리셨다.”
“뭐로 받아갔죠?”
“머리카락을 잘랐어. 절반 정도.”
그쪽 사령관이 프리델라에게 악을 쓰며 ‘그쪽 여장교 몸단속 좀 잘
해!!’ 라며 항의하는 것만도 몇 번째인가. 이제 프리델라도 슬슬 경
고할 때가 온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개인생활은 존중해주는 그녀
지만(관심이 없는 탓이지만), 지나치면 제제를 가할 수밖에 없다. 그
러나 머리카락을 절반 정도 자른 것이라면, 금발머리를 풍성하게
기르고 다니는 카바냐에게는 그다지 큰 벌은 아닌 듯 했다.
“프리델라 님 치고는 약한 벌인데............ 가만, 가로로요?”
“아니, 세로로.”
그리고 클래리스는 자신의 정수리에 손가락을 얹은 다음 아래로 좌악
내렸다.
“.........재앙이군요.”
앞으로 벌어질 카바냐의 히스테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언제나
카바냐나 크리스펠로, 또는 에바와 조를 짜 왔던 유릭으로서는 앞
날이 암담해지는 사태였다. 프리델라와의 면담이 끝나면 가위들고
카바냐와 클래리스의 방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최대한 잘 잘라 드
려야 한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카바냐는 분명 그 가위로 유릭
의 머리를 삭발해 버릴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프리델라의 집무실에 도착하니, 그녀는 창가에 서서 연병장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서류 두 어 장이 들려 있었다. 인사고
뭐고 필요 없었다. 유릭이 들어오자마자 프리델라는 들고 있던 서류
를 내동댕이치듯 책상 위에 놓았다. 그 위에 적힌 글씨는 유릭에게
는 아주 익숙한 필체였다. 유릭 자신이 쓴 것이니.
“그게 뭐지?”
“그러니까, 지난 번에 익스턴 광산에서 돌아왔을 때 작성한 보고서와,
그 때 같이 제출한 자료요청서입니다.”
“무슨 사건에 대한?”
“항구 도시 마그레노에서 있었던 사건. 한 젊은 상인이 있었습니다.
부, 젊음, 사랑,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가진 젊은이가요. 그런데 그는
약혼식 날 아침에 철십자 기사단에 의해 체포, 구금되었지요. 생사
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그의 재산은 압수되기도 전에 타인의 손
에 넘어갔으며,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지금 브란 카스톨에서
굉장한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프리델라는 서류 중에서 푸른 테두리가 쳐진 요청서를 탁탁 치며 물
었다.
“그럼, 그 오래된 사건에 대한 자료를 대체 왜 요청한 거지?”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알아 볼 것?”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저는 카밀턴 경의 일로 제도에 다녀왔습니다. 그것 자체는
평범한 임무는 아니어도, 있을 수는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는 제도에서 아주 이상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프리델라가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이상한 일?”
“네, 아주 이상한 일이었지요. 저는 홀라그로 성의 주인이자, 란슬로
백작이라 불리는 알렉산더의 초대로 그 성에 가게 되었습니다. 무
도회가 열렸던 날이었는데, 그날 저는 성의 살롱에서 한 무리의 상류
층 손님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자리에 그 사
건과 연루된 사람이 자그마치 네 사람이나 있더군요.”
“말해 봐.”
“예전에 마그레노의 시장이었다는 살비에 마델로, 그는 그 사건으로
엄청난 부를 얻었습니다. 그 다음 카밀턴 경의 숙적이기도 한 윌리엄
랜든 경. 그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신부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
결혼과 관련이 있는 지 없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사건을 연
상시킬만한 말이 나오자 굉장히 불편해 하더군요. 다음, 발터 스게노
차. 그는 제 숙부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번 익스턴 광산에 들렀
을 때, 그는 제 숙부님에 대해 물어보며 굉장히 예민하게 굴더
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번에 사망한 그레이브 경. 그의 경
력을 보니, 그 사건 이후 엄청나게 빠른 출세가도를 달려왔더군요.
상관없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자료를 요청하는 거지?”
“저 역시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제 숙부님이
신 노버스 크로반 께서는 분명 그들과 관련이 있고, 그건 저와도
연관이 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제가 제 숙부님 대신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프리델라는 유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릭 역시, 눈길을 피하지 않
았다.
“꼭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가까운 시일 내에, 그
사건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고...... 그것은 분명 저와 무
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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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유리야..... 방해하면 안되;;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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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