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편
허영의 그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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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델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녀를 마주보는 유릭은, 왠지 등골
이 오싹했다. 그래서 묻지도 않았음에도 말했다.
“사실, 제 선에서 알아보려 했었습니다. 브란 카스톨에서, 뷰겐트 중
령님의 허락 하에 치안청의 자료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저는
스크랩된 신문에서 그 시기에 주로 언급되는 명사의 이름을 찾았
습니다. 하지만......허탕이더군요.”
“그것에 관해서는, 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브랫 키저에게 보
고를 받았다. 네가 다시 찾아오면, 근처도 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조금도 알게 해서는 안 되니까.”
“......역시, 니콜라스 추기경과 관련된 일입니까?”
프리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사건은 분명 니콜라스 추기경, 멀리는 돌비체 추기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 사건으로 니콜라스 추기경은 무언가를 얻었고,
더욱 강해졌다. 어쩌면 그 사건은 니콜라스 추기경이 교단의 무력부
를 장악하게 해 준 힘과 관련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고, 그를 실각
시킬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 사건은 내가 주
의해서 조사 중인 사건 중 하나이지. 브랫 키저도 마찬가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럼, 저는....... 그 사건에 대해 일체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겁니까?”
“네 선택에 따른 거지. 만약, 네가 그래도 알고 싶어 한다면..... 너는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브랫 키저가 그
렇듯, 너도 이 사건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해. 그저 몸만 혹사시키
면 되는, 지금까지의 일과는 차원이 달라. 키저 녀석도 성격이 그
렇게 느긋하지만 않았다면 벌써 예전에 미치거나 자살했을 거야.”
“‘끝날 때’ 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시는 겁니까.”
“돌비체 수상과 니콜라스 추기경이 완전 실각할 때까지.”
“목표의 스케일이 참 크군요.”
“그러니까 죽도록 해야 하는 일이란 거다. 어쩔 텐가.”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할 일은 언젠가는 해야 하더군요. 보아하
니, 어차피 해야 할 일 같은데....... 되도록 일찍 시작하는 게 낫겠
군요.”
“유릭 크로반, 나는 그 일에 손댔다가 브란 카스톨에서 축출되어 파
난으로 왔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벌써 사형당하거나 종신형 선
고받고 감옥에 처박혔을 거야. 브랫 키저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
는 처지이고. 그러니 만만하게 보지 마.”
“그렇다면 더더욱 열심히 해야겠네요.”
“멍청한 녀석.”
“칭찬 감사합니다.”
“잘 난 척 그만해. 뺀질대다가 사고치는 건 나사 빠진 전남편 놈 하
나만으로도 족하니까. 좋아, 우선 네가 궁금해 하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지. 무엇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반역죄로 잡혀간 사람의 이름부터 가르쳐 주셔야지요.”
프리델라는 흔쾌히 답했다.
“에드먼드 란셀.”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델라의 눈길이 잠시 유릭의 정수리에
멎었으나, 그 눈길을 느꼈음에도 유릭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탁탁탁,
유릭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서 너 번 정도 쳤다.
“......그 사람과 발터 스게노차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발터 스게노차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 그것도 직접 구해주었어.
그 후, 그는 발터 스게노차의 후견인이 되었다. 일자리를 봐 주고, 그
어머니의 치료비도 대 주고.”
“그리고 발터 스게노차에게 제대로 배반당했군요.”
“그래. 뿐만 아니라, 발터 스게노차는 중요한 증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증언으로, 그 에드먼드 란셀이라는 사람의 혐의 대부분이 인
정되었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품을 찾은 것도 그의 도움. 그리고
에드먼드 란셀은 재판도 없이 검독수리 감옥의 지하, 악마의 시궁창
이라 불리는 그곳에 무려 7년 간 감금되었다. 너도 알겠지만, 그곳
으로 가는 죄수는 절대 맨몸으로 갇히지 않아.”
유릭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마가 가볍게 당겨왔다.
“그 후, 에드먼드 란셀의 재산과 상회는 주인 없는 고깃덩어리처럼
갈가리 찢겨졌다. 그 중 상회는 린다 다이슬링 부인이라는 여자의
명의로 바뀌었지. 아마도, 가명이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상회는 바로 그 발터 스게노차의 명의로 바뀌었
다. 그가 고작 스물여섯 살 때 일이었지. 그 후, 발터는 사업을 확대
했다. 특히, 이 파난의 광산 산업에 투자를 해서 엄청난 돈을 긁
어모으는 중이다. 광산 재벌 중 하나야.”
“재벌이요? 그렇게 부유해 보이지는 않던데요.”
“맞다, 그리고 그게 더욱 이상하다는 거야. 그는 세금까지 꼬박 꼬박
낸다. 신고 된 수입은 어마어마해. 그러나...... 그의 재산자체는 전혀
불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 저택도 없고, 특별히 화려한 생활을
누리는 것도 아니야. 작은 집 한 채가 고작이지. 그렇다고, 그의 은
행 잔고가 풍족한 것도 아니다. 그 엄청난 돈이 대체 어디로 가는지,
그 누구도 몰라. 뚫린 지옥구멍 속에 숨기기라도 하는 지, 단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 추적에는 물론 실패했다. 그저 추기경에게
들어가는 건 아닌가, 그렇게만 예측할 뿐이지.”
“그래서 그렇게 괴로워 한 걸까요?”
“무슨 말이지?”
“익스턴 광산에서 만난 그날, 그는 제 아버지와 숙부 이야기를 꺼낸
후 굉장히 괴로워하더군요. 아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살비에 마델로나 그레이브 경보다는 훨씬 더 후회하고
있었어요. 그 정도 부를 얻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던가 잊든가 할 겁니다. 지금 가진 것이 워낙에 엄청나니
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에게 상당히 괴로운 상황임에 틀림없습
니다. 인간이란, 원래 만족스럽지 못하면 후회하는 법 아닙니까. 특
히나 그런 일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그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용서받아 그 벌을 멈추게 하고 싶어 하지
요. 제 예상인데... 그는 그 일로 약점이 잡히거나 속았던가, 둘 중
하나일 겁니다.”
“그래서, 네 의견은?”
“잘 꼬시면 우리 쪽으로 넘어올 것 같다는 말이죠. 지금 그는 자기
혼자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쩌면, 자기는 잘못도 없는데
나쁜 놈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
르지요. 다른 사람들이 얻은 것에 비해 그가 얻은 건 참 보잘것없
잖습니까. 그렇다면 선택은 두 가지죠. 자기의 이익을 좀 더 챙기는
데 주력하던가, 아니면 다시‘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또 배신을 하던가.”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방법이 있기는 한데....... 일단, 그 사람과 이야기 해 봐야 아는 겁
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의심받지 않고 그 사람에게 깔끔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거죠. 다른 사람은 불가능할 테지만, 저라면
가능합니다. 제 숙부님이 그 일에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프리델라는 잠시 턱을 쓸었다.
“믿어야 하나.”
“글쎄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대령님께 저
는 부하중 하나일 뿐이지만 제게 있어 대령님은 단 하나뿐인 최고
상관이십니다. 군인인 이상, 저는 제 모든 것을 대령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속이든, 진실하든, 그 모든 것은 대령님을 위해 선택하는
일일 겁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유릭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녀는 돌아서더니 책상 위에 놓인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붉은 파일 하나를 찾아 유릭에게 집어
던졌다.
“이게 뭡니까.”
“발터 스게노차는 도비니엘 대극장으로 초청된 카스틸리아 오페라단
이 공연할, 어쩌고 오페라의 후원자 중 하나다. 당연한 일이지만,
파난의 명사들이 그 공연을 보러갈 것이다. 다투스 공은 물론이요,
그 어머니인 다투스 공비은 당연히 관람하러 온다. 그 때문에 파난
총사령부는 동부와 서부 특무부에 지원군을 요청했지. 그리고 각
사령부에서 몇 명씩 차출되어 공연 중의 극장을 지키게 될 것이다.
물론 서부군은 서부 해안 수비대와 함께 카스틸리아 오페라단이
파난의 연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들을 호위 감시하게 된다.”
“카스틸리아 오페라단이라면 트래비스 씨의 오페라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프리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한 예우군요. 고작 오페라단을 군이 호위하다니.”
“그냥 초청공연이 아니다, 이것은. 아직, 제국이 굳건히 파난을 지배
하고 있고, 파난은 제국의 일부라는 것을 문화적으로 증명하는 쇼야.
혁명잔당이 장난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알만 합니다.”
유릭은 파일을 열었다.
오페라 극장 팜플렛이 맨 앞에 끼워져 있었다. 유릭은 공연되는 오페
라의 제목을 확인한 후에, 주연과 후원자들의 이름을 확인해갔다.
살비에 마델로는 물론이요, 윌리엄 랜든 경의 이름도 있었다. 물론,
바로 위에 헨리 카밀턴 경의 이름도 있었다.
“너를 그 호위에 포함시키겠다. 발터 스게노차와 접촉할 기회는 그것
으로 충분할 거다..... 뭘 보는 거지, 유리?”
유릭은 파일을 코앞으로 가져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프리델라
가 책상을 툭툭 쳤지만, 유릭은 그것을 바라보느라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상류층 고객들을 위해 제작된 그 팜플렛에는 오페라의
등장인물과 그 역을 맡은 가수들의 이름이 엑스트라까지 상세히 적
혀 있었다. 그리고 거의 맨 밑줄에 있는 ‘사제 아가씨1’ 이라는 단
역의 이름 옆에, 유릭이 아주 잘 아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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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유리군은 여전히 외로와도 슬퍼도 울지 않으며 언니들(;;)들
을 모시며 조련사도 하고 보모도 하고 있습니다.....
유리구두는 어디에~
다음 편은 5일 뒤에~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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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1장 악마의 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