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편
악마의 요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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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하게 술수를 부리는 게 취민가.”
알렉산더는 에닌이 뛰어나가면서 짓밟아 놓은 꽃대를 주워 올렸다.
그러자, 옆에서 맑은 웃음이 터졌다.
“즐거워요, 이런 건. 고고하다, 선량하다, 고상하다, 그런 칭찬이 어울
리는 사람들 속에는 참 천박한 감정들이 숨어 있죠. 잠자는, 그러나
깨어나면 그것을 묶을 끈조차 없는 그런 야수들. 하지만 저는 없
는 건 만들어 내지 않아요. 있는 걸 있어야 할 곳에 놓는 것 뿐.”
알렉산더의 눈길이, 눈앞의 아름다운 소녀를 향했다.
소녀는 비스크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얼굴은 빚어낸 듯 했고, 긴 속
눈썹 드리워진 눈동자는 이세계의 창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그런 감정들이 자기 안에 숨어 있다는 걸 몰라요. 그 목소
리에 단 한번도 귀 기울이지 않고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아 왔으니,
그것이 갑자기 나타나 날뛰면 어쩔 줄 몰라 하게 되지요... 백작님,
그건 독이 새어나오는 작은 틈 같은 거에요. 그 속에서 스며 나
오는 독이 벽을 부식시키고 무너지게 하지요.”
“네 정체는 대체 뭐지.”
“글쎄, 뭘까요?”
클로디유가 알렉산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명한 붉은 색 입술은
사악한 꽃처럼 웃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
져갔다. 그러자, 뽀얀 이가 살짝 드러나며 그 사이로 선홍색 혀가 작
고 영악한 벌레처럼 나타났다.
“저는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마음씨 좋은 마녀랍니다.”
“.....”
“못 생긴 코지마는 니콜라스의 아내가 되고 싶어 했고, 저는 그것을
이루어 주었어요.”
“그리고 너는 니콜라스의 정부가 되었고.”
클로디유가 까르르 웃었다.
“정말 예의 없는 분이군요. 하지만........ 코지마는 아내가 되게 해 달
라고 말 했지, 사랑받게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아내가 되게 해 준 거죠. 그 다음은 그녀가 알아서 할 바랍니다.”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알렉산더 백작, 당신은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었어요. 처음 봤을 때부
터 끌렸지요. 니콜라스 이후로, 당신처럼 놀라운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놀랍도록, 놀랍도록 강해요. 깊고 검은 협곡의 틈처럼.”
“너는 흑마법사인가?”
클로디유는 자신의 부채를 흔들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저는 이 세상
의 그 누구보다, 어둠의 정령들에 대해 잘 안다는 거에요. 그 속에
숨은 아이들은 제게 복종하죠. 그리고 그 아이들이, 그림자 곳곳
에 숨은 그 아이들이 제게 속삭여 주어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그리고 그녀는 부채를 펼쳤다.
순간,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정원의 풀과 정원수와 꽃들 아래에 고여
있던 어둠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했다. 증폭되고 날름거리기 시작
했다. 살아서 숨쉬고 술렁거리는 듯 변했다.
클로디유가 웃으며 알렉산더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니콜라스를 미워하지요? 파멸시키고
싶어 하죠? 그의 모든 것을 산산이 부수고 짓밟고 싶어 하죠? 놀라
지도, 당황하지도 말아요. 당신은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
니라고요. 제게는 보여요. 당신 가슴 안에 숨은 컴컴한 어둠이, 그리
고 그것을 꾹 억누르고 감추며 갈무리하고 있는 엄청난 힘이. 당신
은 아마도- 이 제국을 통틀어 최강의 마법사인 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옷자락이 알렉산더의 몸에 닿았다. 클로디유가 고개를 들어,
작게 속삭였다.
“그레이브 경을 죽인 것도 당신이죠?”
알렉산더가 웃었다.
“저는 알아요. 제가 부리는 어둠의 정령들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
을 말한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알아요. 그레이브 경은 왜 죽였나요?
알아요. 그야 말로, 니콜라스 추기경 옆에서 은밀한 일을 추진하
는 데 방해되는 사람이죠. 그는 천박한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집요
하고 철저하고 유능하기도 했으니까.”
“악마인가, 너는.”
“네, 악마에요. 하지만 달콤하고, 유능하며, 늙지 않고 영원히 아름다
운 악마랍니다. 인간이 아니기에, 부족한 것 따위는 없어요. 완벽
하죠. 그리고 저는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요.”
“니콜라스를 파멸시켜 줄 수 있다는 건가? 그의 정부이자, 그의 파트
너이면서도?”
“얼마든 지 버릴 수 있어요. 선택은 제가 하는 거지, 그 사람이 하는
건 아니거든요. 저는 제가 원하는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어요. 버
림받는 건 그가 무능해서이지, 다른 이유인 게 아니에요. 자, 좋아요.
저하고 손잡아요. 니콜라스를 파멸시키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
당신이 올라가는 거에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 여자, 아자렛이
라는 여자를 차지하고 싶은 거라면 그것도 도와 줄 수 있어요. 렌든
경을 파멸시키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도와드리지요.”
“이 모든 사실을 니콜라스 추기경에게 알린 다면?”
“알리세요. 하지만...... 결코 당신에게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에요. 그
땐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알렉산더는 클로디유를 바라보았다. 도전적인 눈동자가 그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눈동자가, 매혹적인 눈동자가. 알렉산더는 그녀의
입술에 손을 얹고, 그 턱을 쓸어내리고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끝
이 스치는 순간에 그 어깨에 얼룩 같은 것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클로디유가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어떻게 할래요?”
“너는 참 많은 배신을 했지. 니콜라스를 택하기 전에, 너는 분명 누군
가를 배신하고 그에게로 갔어.”
클로디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혹시 발터 스게노차? 아아, 불쌍하게 늙
어가는 노란 좀벌레! 맞아요. 저는 누군가의 노예였고, 발터는 그런
저를 사랑했지요. 하지만 내 원래 주인을 배신하고, 나에게 이용
당하는 건 그의 선택이에요. 그가 택한 거죠. 그리고..... 내 원래의
주인이 내게 배신당한 건, 자기 잘못이라고요. 가진 것이 많다면,
부리는 것이 많다면, 주의하는 법도 배워야지요.”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언젠가, 너는 나도 배신하겠지.”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바죠. 당신이 그 누구보다 강하다면, 저는 당
신을 돕고 당신에게 복종해요. 하지만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해 볼 문제죠. 자, 생각해 봐요....알렉산더. 당신
이 그 누구보다 강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고요. 내 옛 주인은 니
콜라스보다 약했기에 배신당했던 거에요. 자, 이제 그 다음. 바로 당
신의 차례인 거에요.”
알렉산더는 손을 내렸다. 클로디유는 흥미진진한 연극을 보는 듯 웃
으며 그런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알렉산더가 부드럽게 말했다.
“같이 여행을 가겠나?”
“네?”
갑작스런 알렉산더의 말에, 클로디유가 눈을 반짝이며 반문했다.
“같이 여행을 가자고. 나는 그대에 대해 몰라. 그리고 그대도 나를 오
랫동안 바라봐 왔다고 하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좀 더 자세히 알
아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 자, 어때?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 보
지 않겠어, 불화의 요정?”
“어디로 가시게요?”
“파난으로. 참 멋진 섬이지.”
클로디유는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분수가 터지는 듯
한, 여전히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좋아요! 같이 떠나지요. 하지만 여왕처럼 대해주세요. 공주처럼 모셔
줘요.”
“그리고 밤에는 가장 사랑하는 정부처럼 다루어 주지.”
“기대하도록 하지요.”
클로디유는 알렉산더의 목을 끌어안고, 그 입술에 키스했다. 잠시 뒤
그녀는 부채를 거두어 당기고는 돌아섰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연락해 주세요.”
“내일 중으로 연락이 갈 거야.”
“성급하기도 하셔라.”
“도도한 고양이는 재빠르고, 까탈스러운 새는 더더욱 재빠르지. 손에
닿을 때 낚아채야 해.”
클로디유는 깔깔 웃으며 온실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이 문을 나서
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터가 문을 닫고 그녀를 성 밖으로 안
내했다.
알렉산더는 온실의 중앙에 놓인 긴 의자에 느긋하게 앉았다. 그만이
남게 되자, 그의 옆으로 희고 작은 손이 다가왔다. 그의 머리 위로
길고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발치로, 날개를 가진 검은
그림자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멀리 날아갔던 앵무새가 다시 돌아
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머리 위의 검은 그림자가 나직이 속삭였다.
“참 가엾어라.”
“뭐가?”
“저딴 바보에게 배신당한 당신이 참 가엾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때의 당신은 엄청나게 바보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 저 바보가, 당
신의 그늘 아래에서 그런 짓을 꾸미고 있는 줄 전혀 몰랐지.”
알렉산더는 웃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희고 고운 손이 그의 팔을 끌어안아 당겼다.
“가엾어, 백작님.”
그림자들이 일제히 수군거렸다.
가엾어,
가엾어,
가엾어.
메아리치듯 술렁였다.
“행복에 겨우면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되지. 세상 모든 것이 내 편인
듯 착각하지.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모두가 나의 손을 잡아주고,
모두가 나를 위해 웃을 거라 생각하게 된다. 내 발에 어둠이 고여 있
는 줄 바보 같은 나는 몰랐던 거지.”
검은 그림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자, 이제 어쩌실 겁니까, 백작님? 우리의 주인이여, 배신을 넘어 기
적처럼 귀환하신 오래된 왕이여.”
알렉산더는 자신의 팔에 기대고 있는 흰 팔의 주인의 볼을 쓰다듬었
다.
“처리해야지.”
“어떻게?”
“저 기고만장하고 버릇없는 암캐의 재롱을 조금만 더 본 다음에, 그
다음에 처리해야지. 참 재미있지 않나? 내 손바닥, 내 새장 안에서,
그 좁디 좁은 세상에서 마치 여왕이 된 듯 오만하게 나를 바라보
고 있으니. 앞으로 어떤 재롱을 보여줄지 아주 기대되는 군. 흠- 그
래, 모두 따라와라! 보름이 뜨고, 붉은 안개가 바다에 고이면, 저
것의 피를 마시고, 저것의 살을 펄펄 끓는 솥에 넣어 삶아! 살을 뜯
어 먹고 뼈를 두들기며 놀고 즐겨라! 축제, 내 부활을 기념한 첫 번
째 축제가 열릴 것이다!”
온 온실 안으로 환호성이 터졌다.
새들이 울부짖고, 나무들이 술렁이고, 꽃들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웃
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새벽을 맞이해라! 다시는 새벽을 보지 못하게 된 자를 비웃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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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이제 2라운드~~
다음 편은 5일 뒤에.........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 중;; 이긴 합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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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2장 타락한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