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28화 (128/174)

제128편

타락한 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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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흰자위가 불안하게 번득였다. 로웨나는 눈을

크게 부라리며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턱을 부수어

버릴 듯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너무 아파서, 로웨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떠들어 대지 마, 창녀 년. 내 등골 뽑아다가 펑펑 써대며 사치스럽게

사는 주제에! 빌어먹을, 지금.....! 망할 계집, 대체 또 뭘 꾸미는

거야! 왜 그 가짜 귀족 놈에게 꼬리를 치는 거야! 이제는 그 놈에게

빌붙어 먹고 살게? 엉!”

로웨나는 얼굴 좀 확인하라고!! 하는 의미에서 자신을 가리켰다. 화

가 나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욕먹을 일을 해도 욕먹으면 열

받을 판에, 하지도 않은 일에 욕먹으니 더 열 받는다.

“꼼짝도 하지마! 네 년이 내 인생을 다 망친 거야! 젠장,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 이 돼지년! 그 자식이 도망쳤다고! 파난의

검은 구덩이에서 탈옥했다고! 그 자식이 뭘 할 것 같아? 모르면 등

신이지! 너와 나부터 찢어 죽일 거야! 젠장, 네년 때문이야! 네년이

날 꼬셔서 타락하게 만들었어! 네 년 때문에 은인을 배신하고, 네

년이 시키는 대로 은인의 재산을 먹어치워서, 그 돈으로 네 년

주둥이에 처 들어갈 돈을 미친 듯이 벌면서 이렇게 벌레처럼 썩어 들

어가게 된 거라고! 그런데 네 년은, 네 년은 지금 젊은 놈에게 꼬

리나 치고 있어?! 이 썩을 년! 이제 날 버릴 셈인 거냐! 원래 주인이

던 그 사람을 배신하더니, 이제 날 배신하고, 그 다음에는 그 젊은

놈에게 빌붙게! 기생충 년 같으니!”

점점 황당해지고 있었다. 로웨나가 정말 이 남자를 등쳐먹고 살고 있

었다면 덜 억울하겠다. 그러나 로웨나의 기억 상으로는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었다. 출발 하는 그날 까지 주판알 튕기며 얼마나

적자가 났나 머리 쥐어뜯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가 찾는 여자가

얼마나 받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매우 실망하기도 했다)

순간, 남자의 등 너머가 날이 밝듯 훤해졌다. 남자가 놀라서 손을 내

리며 돌아섰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차분한 여자목소리였고, 로웨나가 아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코지마였

다. 로웨나는 아픈 턱을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불빛이 훤하게 안을

비추자, 그제야 로웨나는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발터 아저씨?”

순간, 바짝 마른 남자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더니 그 얼굴이 무섭도록

창백해졌다. 그제야 자신이 사람을 잘못 잡은 거라 깨달은 것이다.

“너....!?”

로웨나는 이 발터 스게노차를 알고 있었다. 아자렛이 그 남자를 아주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남자가 아자렛의 약혼자가 남기고 간

재산을 사기 치듯 가로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는 아자렛에

게 돌아가야 했었다.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약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고, 증인도 많았으니 그 남자의 재산은 아자렛에게 갔어야 했

다. 그러나 이 발터가 그 상회의 소유권을 빼 돌렸고,  아자렛과

이미 사업을 정리했던 그녀의 아버지의 생활은 지독하게 궁핍해졌다.

발터가 더듬더듬 말했다.

“너, 너.... 그레이브 경의 딸.... 아닌가?”

“로웨나죠. 그런데 방금 전.... 대체 왜 그런 거죠?”

“맙소사,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너에게 한 말이 아니란다, 정말

너에게 한 말이 아니야! 나는 너를 좋아해! 너에게 정말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니!”

로웨나는 발터의 놀라고 당황하고, 제발 잊어 달라는 간절한 표정을

보게 되자 기분이 묘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안했다.

코지마가 랜턴을 거두며 말했다.

“클로디유를 찾는 거라면, 식당으로 가세요.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과

식사 중이니. 그리고.... 로웨나 그린 양은 내 손님입니다. 비켜 주

세요. 당장.”

발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계속 로웨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로웨나와 아자렛의 관계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도 알 것이다. 로웨나는 발터를 쏘

아보곤 그 옆을 지나쳤다. 코지마가 로웨나의 손을 잡고 그녀의 방

으로 향했다.

“발터 씨가 왜 클로디유 양을 찾는 거죠?”

“언젠가는 알게 되실 거에요.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억측

도, 추측도, 예상도. 진실은 당신의 생각보다 더욱 천박하고, 추악

하고, 어처구니없답니다. 그나저나 많이 놀랐죠?”

코지마는 방문을 열고 로웨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특실의 방은 로웨

나의 생각과는 달리 수수했다. 붉은 천으로 덮은 침대보에, 장미색

이불과 배게. 붉고 검은 실로 짜여진 카펫에, 자그마한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카드 한 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코지마는 램프의 불을 밝히고, 찬장을 열어 과자를 꺼내어 테이블 위

에 놓았다. 로웨나는 방안을 둘러보다가, 코지마가 자리를 권하자

앉았다. 그녀가 주스를 건네주어, 받아 마셨다. 코지마도 그 맞은편

에 앉아,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점치는 카드인가요?”

“아뇨. 이건...... 미래를 훔쳐보는 카드가 아니랍니다. 마음을 비추고,

마음의 방향을 비추고, 그것이 향하는 미래를 추측하게 하는 것이

지요.”

그리고 코지마는 웃으며 카드 한 장을 꺼내 뒤집었다. 새카만 하늘의

그림이었다. 카드 번호도 없었고, 이름도 없었다. 그저 검은 테두리

안에 역시나 검은 하늘과 흰 언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둠 속

에 가느다란 흰 빛이 있었다. 별이었다.

“이건 저랍니다. 검고, 희고, 외롭죠.”

그리고 그 카드를 뒤집었다가 다시 보여주었다. 그림이 바뀌어 있었

다. 칼이 가득 꽂힌 심장의 그림이었다.

“저의 심장이지요. 고통 받고 있답니다. 날마다 방금 벼린 칼날이 날

아와 제 심장에 박히고, 제 심장은 이제 흘릴 피 조차 없지요.”

코지마가 카드를 돌려 보여주었다. 또 그림이 바뀌어 있었다. 암사자

였다. 검은 족쇄에 칭칭 묶여 있는. 그 위에 장미꽃잎이 핏방울처럼

흩뿌려져 있었으며, 암사자가 등진 하늘에는 수레바퀴가 돌고

있었다.

“아직은.......... 당신의 몸과 마음은 많은 제약에 묶여 있군요. 강하기

에, 묶여 있어도 앞으로 갑니다. 강해요, 당신은. 너무나 강해요.....

모든 것이.”

뒤집었다 펼치자, 또 그림이 바뀌었다. 황금의 왕관과 장미꽃 무더기,

그리고 그 위에 올빼미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지혜롭고, 영광되고, 아름답죠...... 그 누구도 아직은 당신의 가치를

모르지만, 모르고서도 매료되지요. 당신은 모두를 당신의 군대로

만들 수 있는 여왕, 그러나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사랑받는

여왕이랍니다. 잔혹하고 오만한 여왕은 되지 말아 주세요. 외로워

진답니다.”

그녀는 카드를 밀어 넣고 새 카드를 뽑았다. 로웨나는 이제 그녀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매혹적인 마술이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것은. 새로운 카드가 뒤집히자 로웨나는 흠칫 놀랐다.

오싹한 그림이었다. 핏빛 가시덩굴 속에 묻힌 검. 그리고 그것을 지

켜보는 검은 갑옷의 기사.... 기사는 그림의 흔적도 남지 않은 깃발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는 검은 까마귀가 앉아 있었고,

까마귀의 머리에는 금관이 씌워져 있었다. 코지마의 눈 역시 커졌

다. 그녀는 그 카드를 뒤집었다가 다시 펼쳤다. 카드는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맙소사.....”

“뭐죠?”

“슬프고, 죄 많고, 검고........ 악마의 왕만큼이나 강한. 운명을 넘어서

는 운명, 운명을 휩쓰는 운명, 위대하고 사악한 자, 폭풍 앞의 폭풍,

천둥 앞의 천둥, 어둠 앞의 어둠. 위대한 왕이자 사악한 폭군. 천기

의 대립자이자, 신 그 자체.”

로웨나는 뭔지 몰라 그 시커먼 카드만을 바라보았다. 순간 카드의 그

림이 변했다. 로웨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고, 먹구름이 걷히듯

카드의 그림이 나타났다. 그것은 나비의 그림이었다.

새빨간 나비의 그림, 무늬 하나 없는 피 젖은 듯 새빨간 날개를 가진

나비!

그 순간, 배가 멈추었다. 삐익, 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로웨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죠?”

“나가 봐요.”

로웨나가 동의하기도 전에 코지마는 그 카드를 카드뭉치 속에 밀어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저 문을 열고 나섰고, 로

웨나가 그녀를 따라야 했다.

복도까지 가는 데도 금방이었고, 멈춘 배의 갑판으로 올라가는 것은

더더욱 순간이었다. 환하고 하얀 등으로 밝힌 갑판 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바람은 아주 거세었고, 흰 구름은 빠르게 하늘

을 할퀴었다. 그리고 뱃머리 근방에, 거대한 전함이 서 있었고 그

위에는 제국기가 펄럭였다. 그 깃발이 굽어보는 갑판에는 제복의

군인들이 선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로웨나를 발견한 수잔나가 달려왔다.

“로이, 너 어디 갔었던 거야!?”

묘하게도, 수잔나는 로웨나 바로 옆에 있는 코지마가 아예 없다는 듯

그녀가 누구냐 묻지 않았다.

“저 군인들은 대체 뭐니?”

“여기서부터 시곤 까지 우리를 호위할 해군이야! 봐, 조셉이 그러는

데 저기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이 파난의 특무부래! 알지, 너도?

정말, 진짜 흑마법사들이야!”

로웨나는 수잔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흰 제복의 해군 장교는,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고급 장교였다. 군

계급장을 모르는 로웨나가 보기에도, 그의 어깨와 팔에 훌륭하게

빛나는 계급장은 꽤 높아 보였다.

그 옆에 새까만 제복의 장교들과 희고 검은 수녀복을 입은 어린 소녀

가 서 있었다. 검은 제복의, 제국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은밀한 군

인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긴 망토에 후드를 쓰고 있었다. 금욕

과 금혼을 기본으로 하는 마뇰로의 사제들처럼 보였다. 망토에는

특무부의 상징인 녹슨 십자가의 표식이 붙어 있었다. 뒤로 한발 물

러나 있는 사람은 아주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보였다. 중앙에 서서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역시나 키는 큰 편이고 늘씬한

체구였다. 또 여기 저기 두리번 거리고 있는 사람은 잘록한 허리라

든가, 부드러운 어깨선으로 보아 분명 여자였다. 로웨나는 그들을

살펴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클로디유가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클로디유가 로웨나와 코지마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쏠렸고, 해안 수비대 장교들조차 고개를 돌렸다. 코지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클로디유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나, 이모님. 웬 일로 여기 나와 계시는 거죠? 그런데 이 분은 그

린 양 아닌가요. 저....”

로웨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클로디유의 웃음이 멈추었다.

뿌득- 이 악무는 소리마저 들렸다.

선장이 이마에 손을 얹으며 경례를 했다. 사병들이 일시에 경례를 했

고, 바로 그 순간 다른 군인들보다 머리하나가 훌쩍 큰 장신의 특

무부 장교가 고개를 돌렸다. 턱을 들자 그 얼굴이 드러났다. 갑판위

의 여자들이 일시에 숨을 멈추었다(올해 80먹은 트라이엄 부인을

포함하여). 남자 얼굴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로웨나 마저도 잠시

멍해졌다.

눈부시게 잘생긴, 남신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착 가라앉

은 금빛 눈동자는 어딘지 애조 띤 듯 보여(뭔가 엄청나게 비극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는 듯) 모성 풍부한 여자들의 가슴이 울렁거리게

할 만 했다. 수잔나가 숨가빠하는 소리를 냈다(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 뭐, 뭐야 저 남자는!!).

남자는 여자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훑어보더니, 선장과 이야기 하고

있던 또 다른 특무부 장교-아마도 상관처럼 보이는-에게 다가가

뭐라 속삭였다. 그 장교가 멈칫했다. 턱을 문지르더니, 고개를 끄덕이

고 뭐라 속삭였다. 키 큰 남자가 뭐라 답했다. 여장교가 그들의 말

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 승객들 쪽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젓고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다는 표시 같았다. 그

러자 지휘관인 듯 보이는 그 장교가 수녀 소녀의 어깨를 끌어 당겨

뭐라 말한 다음 자신이 직접 승객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라?”

로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수잔나 역시 마찬가지. 그녀가 입을 짝 벌

리더니, 로웨나의 팔을 꼬집고 뭐라 어버버버 말하다 못하다가 했다.

“저, 저, 저.... 맞지??!! 맞지???!!!!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로웨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장교는 분명 유릭이었다.

고작 두 어 달 전에 헤어진 모습에서 전혀 달라진 바 없지만, 처음으

로 특무부 제복을 입은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유릭의

눈길이 어딘가에 멎어 있었고, 그가 멍하니 바라보는 건 로웨나가 아

닌 옆에 있는 클로디유였다. 분명 로웨나를 보았고, 잠깐이나마 눈

이 마주쳤음에도, 그는 로웨나가 아닌 그 소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빛이 서서히 바뀌었다. 처음에는 놀란 듯하다가, 경탄

이 섞인 듯한 눈으로 변하더니, 미묘하게 웃었다. 로웨나는 갑자기 화

가 났다. 아주 보잘 것 없어진 기분이었다.

“나, 먼저 자러 갈게.”

수잔나가 더 물어보려는 눈치를 보냈음에도, 로웨나는 돌아섰다. 돌

아서다가 클로디유와 눈이 마주쳤다.

매혹적인 미소녀, 그 싸늘한 뱀가죽같은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살며시 웃었다. 순간 로웨나는 자신이 너무나 바보같이 느껴졌다.

초라한 바보, 보잘 것 없는 바보. 먼 옛날의 허수아비 인형 같은

자신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돌아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객실 침대에 돌아올 때까지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클로디유의 싸늘한 웃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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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연휴가.................. 끝났습니다...........

......................어흐흐흑!!!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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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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