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편
타락한 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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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로웨나는 또 악몽을 꾸었다. 예전에 코지마에게 가정교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던 그 때와 똑같은 악몽을 거듭, 거듭 꾸었다.
그러나 그날은 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검고 검은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며 검은 깃털을 떨어
뜨릴 뿐이었다.
새벽 내내 악몽만 꾸다가 머리가 정말 무겁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니,
친구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옆에 다닥다닥 붙어서, 약병과 젖은 수건과 체온계를 나누어
들고 있었다.
“뭐 하니, 너희들?”
“너, 밤새도록 아팠어.”
“교대로 간호했고.”
“지금은 오후 5시야.”
“뭐어?!”
어제 침대에 누운 것이 오후 8시 경이었다.
“의사도 다녀갔다고.”
수잔나가 말했다.
“다섯 시 반에 약을 주라고 하더라고.”
리리아가 말했다.
“나는 이마에 수건 얹어 주는 중이었고.”
제시가 말했다.
“나는 체온을 재는 중이었지.”
다시, 수잔나가 말했다.
로웨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팠다니, 대체 무슨 일이람? 찬
바람을 쐰 적도 없고, 몸이 이상하다고 느꼈던 적도 없었다. 뭘 잘못
먹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친구들과 똑같은 것을 먹었다. 특별히
먹은 것이라고는 코지마가 준 과일주스 한 컵 정도였을 뿐이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눈을 뜬 로웨나는 전혀 몸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팠다면, 그리고 체온계를 들고 젖은 수건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 고열에 시달린 것 같은데 머리가 아프다든
가 피곤하다던가, 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저 좀 오래 잔 듯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수잔나가 약병을 들이 밀어, 별 수 없이 그
쓰디쓴 약을 엑엑 대며 삼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상했다.
수잔나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너는 오늘 푹 쉬어야겠다. 하긴, 쉬어도 별 상관없을 테지.”
“오늘 무슨 일 있는 거니?”
그러자 리리아가 귀여운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어제 배에 탄 해군을 위해서 트레비스 씨가 음악회를 준비하셨어.
우리의 아름다우신 에닌 마델로 양과 기타 등등 몇 명이 노래를 부를
테지.”
“여기 와서도 에닌이 잘난 체 하는 걸 봐야 하다니! 아아, 정말 지겹
다고.”
“그 애는 백작님이 그 예쁜 클로디유 양과 같이 다녀도 화도 안 나나
봐. 전혀 기가 안 죽어 있잖아.”
“모르는 거겠지. 아아, 눈치도 없을까.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혼자
서만 아니라고 생각하다니.”
“그 애는 원래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하잖아.”
그건 로웨나도 아는 바였다. 지난번만 해도 그렇다. 로웨나 말도 안
듣고 아자렛에게 무례하게 군 건 에닌 자신이면서, 그 모든 잘못이
애당초 로웨나에게 있었다는 듯 자기 좋을 대로 믿어 버린다. 그리
고 지금, 에닌은 아마도 클로디유를 알렉산더에게 접근하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아름다운 귀공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
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능력은 가히 초능력 수준인 에닌이다.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닌데, 뭐.’
로웨나는 에닌에 관한한 포기하기로 했다. 고쳐지는 게 있고 고쳐지
지 않는 게 있다. 천성은 절대 안 고쳐진다.
“그만 해, 모두들.”
로웨나는 그리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로웨나가 에
닌을 욕하는 것이 듣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안 친구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로웨나가 이제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어제의 유릭이 생각나고,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그녀가 아닌 클로디유
를 멍청하게 바라보던 그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클로디유의 싸
늘한 미소도 생각난다.
좀 더 예뻤으면, 좀 더 재능이 있었으면, 좀 더 집안이 좋았더라면-
자신이 할 수 없는 수많은 가정들이 또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먹은 약 기운이 퍼지며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불
을 뒤집어 쓴 채로 그대로 잠들어 버렸고, 밤죽처럼 묵직한 잠에서
깬 것은 대략 한 시간 뒤였다.
방은 캄캄할 뿐 아무도 없었다. 배도 고프고 몸도 찌뿌둥해서, 로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객실을 나섰다. 그냥 굶은
채로 푹 자고도 싶었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도저히 눈이 감기지
않으니 별 수 없었다.
“배고픈 건 정말 싫어.”
다른 건 다 참아도 그것만은 못 참는다.
객실이 늘어선 복도를 지나가는데 배는 아주 조용했다. 사람하나 보
이지 않는다. 모두가 배를 버리고 간 것만 같았다. 괜히 쑥스러워
져서 슬금슬금 주변을 살피며 가는데, 만찬장 근방에 오게 되자 사
람들이 아주 많이 눈에 뜨였다. 배 안에 있는 승객들이란 승객들은
모두 이곳으로 온 듯 했다. 그리고 음악소리가 들렸다.
로웨나는 홀린 듯이 그곳으로 갔다. 만찬장 앞에 마련된 홀에 에닌이
서 있었다. 그녀가 붉게 상기된 볼로 인사를 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흰 제복을 입은 해군 장교들도 눈에 뜨였다. 그제야
수잔나가 오늘 음악회가 있을 거라 말한 것이 생각난다.
우울해졌다.
어제 클로디유의 미소가 생각나고, 에닌의 심한 말도 생각났다. 그러
나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다는 것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항의
하고 화내고도 싶은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무
의미하게 느껴졌다. 손닿을 수 없는 곳에 놓인 것이건만, 손닿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고, 주변의 모든 것이 그녀를 방해하는 듯 느껴
진다.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이 에닌에게, 지금 저 무대 위에서 빛
나는 에닌에게 있었다. 화가 나는데, 그 질투가 싫었다. 그 초라한
질투가, 그런 마음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다. 자신이
형편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어쩔 수 없는 건 아니죠, 그린 양.”
흠칫 놀랐다.
바로 옆에, 클로디유가 소리 없는 요정처럼 와 있었다. 붉은 리본으
로 치장한 드레스를 입고. 물결치는 새카만 머리카락도 피처럼 붉은
리본으로 장식하고,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 짓는 클로디유
가 있었다.
로웨나는 혐오감이 일었다. 자기도 모르게, 예전에 코지마가 건네준
십자가가 들어있는 주머니에 손을 얹었다. 클로디유가 말했다.
“저는 많은 힘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그린 양을 도와줄 수
있어요. 아름답고, 영리하고, 재능 있는 당신인데..... 못 도와줄 일도
아니지요.”
“무슨 말씀이죠?”
클로디유가 다가왔다.
“에닌 마델로가 가진 것 보다 훨씬 더 굉장한 후원자가 되어 줄 수
있어요. 무대에 서서, 언론과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유명하게 만들어
주어서, 그린 양이 카스톨의 여왕이 되게 해 줄 수 있단 말이에요.”
클로디유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떤 가요?”
“.......그, 글쎄요.”
“보세요, 당신보다 재능이 많지도 영리하지도 않은 에닌 마델로가 후
원의 힘으로 저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당신은 그보다 더 훌륭
한데.......억울하지 않으세요? 아니라면 그린 양이 너무 착한 거고,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 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그린 양을 알아 볼 수 있어요. 그린 양의 가치를, 그린 양의 능력을,
그리고 그린 양의 미래를.”
로웨나는 십자가를 더 꽉 움켜쥐었다. 클로디유가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 차가운 장미가 핀 듯한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였다.
“부유해 지고 싶잖아요. 사랑받고 싶잖아요. 인정받고 싶잖아요. 그건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되는 거랍니다.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제
힘으로, 제 능력으로.”
“제게 뭘 원하는 거죠?”
“그저 그린 양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고 살면 되는 거에요. 어때요?
이대로 패배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 드디어 기회가 온 거
랍니다.”
로웨나는 고개를 돌려, 노래를 시작하는 에닌을 보았다.
아름다웠다, 에닌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듯, 누구나에게 사랑받는 천
사였다. 그리고 지금도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것조차 사랑하면 얼마든지 그리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누구
나 용서하고 사랑한다. 자기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그런 에
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세계를 모든 이들이 보호해 주니까.
로웨나는 클로디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도 그리 되기를 원해요.”
“당연하겠지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기를, 그리고 보다 더 훌륭해 질
수 있기를. 기회가 오기를.”
“당연하죠.”
“그리고 저를 인정하는 사람이 그 기회를 주기를 바래요.”
“제가 있답니다.”
“당신은 아니에요.”
클로디유의 눈이 커졌다.
“클로디유 데지레, 당신은 제게 어울리는 드레스조차 고르지 못했잖
아요. 그런데 나에 대해 대체 뭘 안다는 거죠?”
“네?”
로웨나는 놀란 클로디유의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이 치졸하고 못된
계집애. 그 벌침 같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왔다.
“당신은 제 노래를 들어본 적도, 저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어요. 그
런 당신이 대체 어떻게 제 가치를 안다는 거죠? 제 무엇을 믿고 기
회를 준다는 거죠? 당신은 저의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인정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 당신의 제안은, 제게 있어 모욕
이나 다름없어요. 나를 가지고 놀려 하지 말아요. 내 운명은 내 거에요!”
클로디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
길을 주체하지 못해 이리 저리 돌아보기 시작하더니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로웨나 그린 양, 이걸 거절하면 분명 후회하게 될 거에요!”
“누군가가 기회를 준다면, 그것은 저를 인정하기에 주는 기회여야 해
요. 그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고, 그것만이 진짜 제 것인 거에요. 저는
그것만 믿어요.”
“당신, 거절하면 비참해 질 거에요.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랍
니다. 당신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요. 제가 그리
만들 수 있어요!”
“대체 제게 뭘 원하는 거죠?”
“말 했잖아요. 저는 그저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라고요.”
“어머나, 참으로 우습군요. 안 받으면 재미없다고 협박하는 사람이,
달착지근하게 웃으며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 살살 달래는
군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 건 지 모르겠지만, 있다면 당신 힘으로
해요. 나까지 끌어 들이지 말고. 알겠어요?”
로웨나는 치마를 잡아채고는, 너무나 분에 못 이겨 식당을 나섰다.
그러다가 회색 망토를 두른 남자와 마주쳤다.
“여어, 그린 양 아닌가.”
알렉산더 백작이었다. 로웨나가 아무 말도 없자, 그는 모자에 손을
얹고는 빙긋 웃었다. 로웨나는 그에게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알렉산더는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 아직도 못 박힌
듯 서 있는 클로디유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달래듯 잡아끌었다. 클
로디유가 사나운 신음을 흘리고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로웨나는 아자렛에 대한 일에 이어, 또 한번 알렉산더에게 감사했다.
아자렛의 일에 대한 감사인 지, 아니면 그저 아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는 로웨나를 위해 소소한 배려
를 해 준 것이다.
로웨나는 입술을 꾹 물고는 갑판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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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자룡군을 데리러 가서, 드디어 바샤 군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나!
자룡군이 잘 그을린 구리빛 피부에 탄탄판 어깨와 다리를 가진, 사파이어
빛 푸른 눈을 빛내는 미청년이라면!
바샤 군은 우유빛 부드럽고 늘씬한 몸에, 연푸른색 눈과 미소짓는 입술
을 가진 매혹적인 미소년이었습니다!!!
아아, 간만에 몸 야들야들한 샴냥이를 보니 황홀해요........
다음 편은 5일 뒤...........일지 6일 뒤 일지;;; 노력...중입니다;;
느리다고 밤낮 구박받고...어흐흑.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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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3장 도망치는 별, 뒤를 쫓는 수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