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30화 (130/174)

제130편

도망치는 별, 뒤를 쫓는 수평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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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여객선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에서,

흰 별들이 눈처럼 쏟아졌다. 갑판위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음

악회 탓이었다. 군인들도, 사병들은 남아 있었으나 장교들은 모조리

갑판 아래로 내려가 특권을 누리고 있다. 남은 사병들은 갑판에

아무렇게나 앉아 저녁으로 나누어준 샌드위치와 뜨거운 홍차와 포도

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쁜 기집애 같으니라고.”

로웨나는 투덜대며 난간에 기댔다. 이마를 기대고 그 바다를 내려다

보니, 흰 거품이 띠처럼 바다위를 흘러간다. 뱃전을 스치는 검고

거대한 물결이 왠지 두렵게 느껴졌다.

정말 화가 나는 건 그런 제안이나 듣는 자기 자신이었다. 얼마나 형

편없어 보였으면 그런 저질스런 제안을 받게 되는 걸까. 하긴, 되는

일이 없는 건 사실이다. 조역 하나 맡았다고, 이제는 뭐가 되도

될 거라고 생각했더니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고. 사방에서 돈 달라

고 칭얼대는 소리만 들려오고. 미하일은 돈을 가지고 오기는커녕 말

도 안 듣고.

세상은 해 주는 것도 없으면서 해달라는 것만 많았고, 언제나 과한

것만 요구한다.

“흐유-”

한숨과 함께, 뱃속에서 진짜 로웨나가 처한 절박한 현실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륵-

“배고프다.”

그렇다. 클로디유가 무슨 제안을 하든 말든, 그리고 브란 카스톨에서

그녀의 처지가 어떠하든 간에,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거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기에, 잠자코 있던 허기

가 밀물처럼 몰려들며 눈앞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먹을래?”

눈앞에 사탕과자와 초콜릿이 가득 든 예쁜 봉투가 나타났다. 멍하니

있는 로웨나의 턱으로 그 봉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로웨나는 얼

결에 그것을 받았고, 그것을 준 사람은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홍차냄새도 풍겨왔다. 로웨나는 달착지근한 과자보다는 그

샌드위치가 더욱 먹고 싶었다. 로웨나의 갈망어린 시선을 알아챈

그 사람은 참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어딘가로 가더니, 잠시

뒤에 샌드위치 하나를 더 가지고 왔다.

“고마워.”

“뭘.”

로웨나는 사탕을 돌려주고 샌드위치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 동안,

옆의 남자는 벌써 자신의 몫을 다 먹어치우고 홍차를 마시기 시작

했다. 로웨나는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씹어 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홍차를 마시고 있었고, 시선을 느끼자 고

개를 돌리며 빙그레 웃었다.

“반갑네, 고양이 여왕님.”

갑자기 눈물이 나왔지만, 로웨나는 꾹 참고 볼을 부풀리며 샌드위치

를 씹어 먹었다.

“그렇게 먹으면 체한다.”

또 울 것 같아서, 이제 고개를 돌리고 우적 우적 열심히 씹었다. 옆

에서 유릭이 웃었다.

“잘 지냈어?”

“그럭저럭.”

“미하일은?”

“여전하지, 뭐. 방값도 안 주고, 만날 밖으로만 쏘다니고, 돌아오면

조신하게 돌아다니라며 한심한 구박이나 하고.”

“그것뿐이야?”

“그럼 뭐가 더 필요해?”

로웨나는 샌드위치 마지막 조각까지 삼킨 다음 유릭의 홍차를 빼앗아

벌컥 벌컥 마시고 돌려주었다. 유릭은 텅 빈 잔을 뒤집어 보았다.

“둘 사이에...... 달라진 거 없어? 전혀?”

“미하일이 갑자기 철이라도 들었을까봐? 그 녀석은 여전히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어린애라고! 쳇.”

“여전히 바보구나, 그 녀석은.”

“앞으로도 바보일 걸. 그런데 넌 왜 오랜만에 보자마자 미하일에 대

한 것부터 묻는 거야?”

“그냥, 궁금했었거든. 어쨌건........ 정말 바보구나, 그 녀석.”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건 없다는 걸 모르니까. 특히나 사람은 언제

나 변한다는 걸 모르니까.”

로웨나가 유릭을 쏘아보았지만, 그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너, 그 검은 옷, 정말 안 어울린다. 하긴, 제국에서 최악으로

센스없는 제복을 입는 군대가 특무부니까.”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서. 하지만 이 제복이 안 어울리는 걸로

치자면, 저기 저 앞에 서 있는 카바냐 코로뉴 중위님만큼 안 어울

리는 사람도 없지.”

유릭이 가리키는 곳에, 짧은 금발의 여장교가 험악하게 샌드위치를

씹어 먹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지금 온 여객선의 여자들을 광란시

키고 있는 청년 장교가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청년 장교는 안

개 젖은 호수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여자를 보고 있었고, 여자는 그

장교를 올려다보더니 먹던 샌드위치를 주었다.

“먹고 싶으면 그렇게 처연하게 바라보지 말고 그냥 가지고 가, 크리

스펠로! 그런데 이거 너무 맛없어! 웩, 웩!”

크리스펠로라 불린 청년 장교는 정말 그 샌드위치를 받아먹기 시작했

다. 금발머리 여장교-카바냐 중위-는 차가운 아이스티를 들이키며

계속 투덜댔다.

유릭이 사탕 봉지를 부스럭 부스럭 뒤지더니, 초콜릿 하나를 건네주

었다. 로웨나는 초콜릿을 받아 포장을 풀었다. 유릭은 봉투를 닫아

로웨나에게 건네주려다가, 그 봉투를 갈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수녀복의 소녀에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당장에라도 봉투째 먹고 싶

다는 듯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소녀는, 유릭의 표정에 단호하게 말했다.

“하나만 주십시오.”

“안 된다.”

“어차피 하사님이 받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만 주십시오.”

“내가 받은 건 아니지만, 이걸 받은 크리스펠로 대위님은 나한테 줬

으니 내 거다.”

아마도 승객 아가씨들이 그 눈부신 미남 장교에게 선물로 준 듯 했

다. 수녀 소녀가 일갈했다.

“너무하십니다!”

“오늘 벌써 다섯 개나 먹었다. 그 이상은 허락 못한다.”

그리고 유릭은 봉투를 아예 로웨나에게 건네주었다. 소녀는 울 듯한

눈으로 봉투를 바라보더니 결국 고개를 픽 돌리고 돌아갔다. 유릭이

소녀의 처연한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소개하지. 시스터 에바. 수석 수호 사제 글론델의 제자였다가 지

금은 나한테 배우는 중이야...  그리고 그거, 절대 주지 마.”

로웨나는 사탕 봉투가 금주머니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귀한

걸(?) 들고 있으니, 어제 그가 클로디유에게 한 눈 팔았다고 화냈던

것이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유릭이 말했다.

“나중에 공연 보러 갈께.”

“나는 아주 조금 밖에 안 나와.”

“그렇다면 내내 눈 부릅뜨고 있어야겠군. 이번에는 정말로 잘 보고

있을 테니, 잘 하라고.”

“하긴, 네가 보러 오는 날에는 꼭 사고가 터졌지. 처음에는 카밀턴 경

암살 미수사건에, 그 다음에는 쥴리안 공자의 납치 사건에, 그 다

음에는.......다음에는.......”

다시 눈물이 나왔다. 잊으려고, 잊으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도 어

쩔 수 없었다. 생각나면 울컥 눈물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릭이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바보 까마귀 임금님, 사고 날 때마다 실수했던 주제에.”

“하긴, 너하고 만난 다음부터 계속 바보짓만 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잘 할 테니까, 믿어 봐.”

눈 가를 스치는 손길을 느끼며, 로웨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어째서 믿지 못했던 걸까.

유릭이 두 손으로 로웨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교대해야 하니까, 난 이만 가 볼게.”

로웨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가벼운 바람처럼 오랜 만에 만난 소년이 자리를 떴다. 다시 만나면

정말 많은 말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떠나고 나니 한

마디도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두 손에는 작은 선물이 남겨져 있다. 비참했던 기분도, 슬펐

던 마음도, 작은 온기에 닿은 생쥐의 심장처럼 포근해졌다.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을 듯 했다. 혼자가 아니니까. 어두운 그늘 속에 숨

어 우는 어깨에 손을 얹어 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자

신의 처지가 조금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비스는 흐뭇한 기분으로 후원자중 하나이자, 이 여객선을 보호하

는 해군 지휘관인 싱그마이어 대령과 인사를 나누었다. 뒤에서 와

인을 홀짝이며 “하여간, 조금만 칭찬해 주면 좋아서 방방 뜨지.” 라

고 주절대는 친구의 팔도 지긋이 꼬집었다. “따라오지 말랬잖아!”“

나도 돈 냈어.”“쥐꼬리만큼 줘 놓고선 최고 박스석 좌석을 두개나

달라는 놈이!”“맨날 보러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와 봤자 잠만

자는 주제에!!!” 등등으로 싸운 것이 바로 어제 일이건만, 이 친구는

도무지 정신 차릴 기미가 없다. 다른 사람이 알아보면 곤란하다

는 핑계에 따라, 턱수염을 붙이고 머리도 염색하고 안경도 끼고 있

어 그 누구도 이 남자가 ‘지금은 노는 중’인 서부전선의 영웅 헨리

카밀턴 인 줄 모르고, 손님명부에도 다른 이름으로 적혀 있어 사

람들은 모두 그를 트레비스의 친구중 하나인 제임스 스튜어트로 알고 있었다.

트레비스는 어차피 그가 타면 전 여객선에 비상이 걸리므로(달리 위

험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배에 탄 여자들과 그 남편이나

연인되는 남자들 때문에) 반대하지는 않았고, 그의 변장솜씨가 굉장

히 탁월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므로(움직일 때마다 주변을 초토화 시

키는 것만은 감출 수 없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졸졸 따라다

니면서 늘 하던 짓을 하는 것만은 참아줄 수 없었다.

싱그마이어 대령은 은빛 수염에 덮인 턱을 들며 트레비스에게 말했

다.

“정말 기대가 많습니다. 파난의 평화를 위해, 파난의 영광을 위해, 이

공연이 성공하기를 빕니다.”

“저 역시 그러기를 빕니다.”

그리고 둘 다 핏빛 신선한 와인이 든 잔을 들었다. 주변에 있는 후원

자들과 귀빈들도 역시나 잔을 들었고, 카밀턴은 잔을 찾다가 떨어

뜨렸다. 다행히 카펫위인 데다가 거의 마셔버린 빈 잔이라 얼룩이

지지는 않았다. 카밀턴은 쭈그려 앉아 잔을 찾기 시작했고, 트레비

스는 그 잔을 찾아 머리를 후려쳐 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후원자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젠장, 어디 간 거야.....”

카밀턴이 그리 투덜대며 부산스럽게 기어 다니자, 트레비스는 발뒤꿈

치로 그를 툭 치며 속삭였다.

“그냥 포기 하고 하나 더 달라고 해....!”

“나는 포기를 모르고 전진하는 군인일세.”

“그냥 포기 해 줘, 제발.”

그러면서도, 트레비스는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싱그마이어 대령과 그

외 번쩍거리는 인사들의 이야기를 듣는 척 했다. 광산거부, 무역재벌,

고위 장교, 식민지 관료 등으로 이루어진 그들 이야기의 주제는 대

강 파난의 혁명당 ‘하얀 까마귀’ 들로 요약되었다. 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관심도 없고 꽤나 칙칙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라 생각해서

신경 쓰기도 싫은 트레비스는 애써 지루함을 참아야 했다. 그가 하

고 싶은 이야기는 오로지 누구누구의 음악이 어떠하고 누구누구의

노래가 어떠한 지 정도였지만, 그들이 관심을 두는건 팜플렛에 누

구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고 누구의 이름이 가장 크게 써 지며,

누구의 이름에 금박이 들어가느냐는 것 정도였다.

“그나저나, 발터 스게노차 씨는 안 오시나. 분명 브란 카스톨에서 이

배에 탄다고 들었는데.”

광산거부인, 키가 작고 동글동글한 몸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그 남

자는 발터 스게노차도 후원자중 하나라는 말에, 돈을 더 내며 자기

이름을 그 위에 써 달라고 했었다. 트레비스는 대체 뭘 발견했는

지 꿈쩍도 하지 않는 카밀턴을 발뒤꿈치로 쿡쿡 치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승객 명단에는 계시더군요. 곧 뵐 수 있을

겁니다.”

트레비스는 빙그레 웃고, 제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졸부도 졸부 나름이지, 같은 졸부에게도 경쟁심을 느끼는

인간은 정말 질색이다.

에닌의 노래가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만찬장을 휩쓸었다. 에닌

은 여기 저기 인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이어서, 프란츠 시게모가

올라왔다. 역시나, 남자가 올라가자 여태까지 무대를 바라보던 ‘남자’

후원자들과 장교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트레비스는 한심함을 느끼며, 이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 카밀턴을 퍽

퍽 쳤다.

“어서 안 일어나고 뭐해!”

“쉿, 트레비스. 저기, 저 아가씨는 뭔가.”

고개를 슬쩍 내려보니, 카밀턴이 식탁 밑에 숨어서 누군가를 가리키

고 있었다. 트레비스는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보았고, 그곳에 어느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를 발견했다. 검은 머리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러나 추억속의 안드로마케만이 유일한 미녀인

트레비스는 그저 예쁘다, 정도밖에는 느낄 수 없었다.

“나야 모르지. 그런데, 또 난봉질 시작하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쪽으로 데리고 올 수 있나?”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작업 정도는 자네가 알아서 하라고!”

“어허.”

트레비스는 커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외면했다. 그러나 트레비스

가 직접 가서 데리고 올 필요도 없었다. 트레비스를 발견하자, 그

아름다운 소녀는 예쁜 홍학처럼 우아하게 다가왔다. 남자 가수가

올라와 무대에 대해 일체 관심을 두지 않던 후원자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소녀는 허리를 숙이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 안에 있는 남자 중 가장 멋지게 생긴 싱그마이어 대령이 나서,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하며 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싱그마이어 대령이라고 합니다.”

“이 배를 수호하시는 용감한 갈매기시군요. 클로디유 데지레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소녀가 새빨간 입술로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싱그마이어 대령의

입이 찢어졌다. 그 다음 순서는 어쩔 수 없이 트레비스라, 그도 그녀의 손

등에 키스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등 뒤에 있던 남자가 물었다.

“혹시, 추기경 예하의 부인 되시는 코지마 님의 조카분이 아니신가요.”

“맞습니다.”

트레비스의 발밑에서 카밀턴이 딸꾹질을 했다. 트레비스 역시, ‘추기경’ 이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엄청나게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파난으로 여행 가시는 건가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약혼 기념 여행이라는

말도 있던데요.”

“어머나, 그런 일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소녀가 눈웃음쳤다. 트레비스는 그런 소녀의 표정이 왠지 한심해서

으휴, 하고 고개를 돌렸다. 쪼끄만 기집애가 교태라니. 그리고 바지를

꽉 쥐고 있는 카밀턴의 손을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클로디유가 트레비스를 보더니 말했다.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트레비스 카트슨 씨.

정말 굉장한 안목을 가지신 훌륭한 분이라고요.”

“아하하, 그 정도 극장을 운영하려면 안목은 필수지요.”

카밀턴이 밑에서 으휴,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주책, 팔불출, 잘난 체,

어쩌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카스틸리아에 관한 말은 참 많이 들었어요. 에닌 마델로 양...... 이제는

친한 친구가 되었답니다.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에요.”

“그 미모와 덕성보다 위대한 건, 그 재능이지요.”

“재능이 그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하지요.”

“가수의 본분은 재능과 노력입니다! 예쁜 건 좀 더 꾸미면 되요. 아시다시피,

무대위의 분장은 사람을 놀랄만큼 바꾼답니다.”

“그렇죠. 그레이브 경의 따님 역시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에닌이 아름답다고 그녀의 재능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요. 그 아가씨 역시 이

오페라단에 있다고 들었어요, 이번 무대에 선다면서요?”

트레비스는 철렁했다. 얼굴의 핏기가 싹 가시며, 어떻게든 이 클로디유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역시나, 싱그마이어 대령의 얼굴색이 바뀌며

트레비스를 바라보았다.

클로디유가 말했다.

“그다지 비중 있는 역은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던데, 그레이브 경

같은 높은 귀족의 따님이, 평민 출신인 에닌 마델로 양의 실력을 그리도

인정하니 어찌나 훌륭한지.”

싱그마이어를 비롯한 후원자들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 트레비스의

등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는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트레비스 씨, 공연은

정말 성공할 거에요.”

“감사합니다, 데지레 양.”

클로디유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게 웃은 뒤, 돌아서 그 자리를 떠났다.

트레비스는 지옥 입구에 들어선 듯한 기분으로,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는

후원자들을 돌아보았다.

싱그마이어 대령이 단박에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요. 혹시, 지난번에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그레이브

경의 딸이란 말이오?”

“아, 저기.... 그게 말입니다....”

“지금 제 정신이오! 그레이브 경의 딸이라니! 그는 서부 전선의 영웅인

헨리 카밀턴 경을 암살하려 한 자요! 그런 파렴치한 자의 딸을, 카밀턴

경도 후원하는 이 공연에 세우다니! 제 정신이오!”

“저기...”

“이건 경우 없는 일이란 말이오! 도대체 그런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다니.”

“그리 큰 배역은 아닙니다.”

“아니, 배역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오! 후원자중 하나로서

요구하오. 당장 빼시오.”

트레비스는 애달픈 눈초리로 다른 후원자들을 보았으나, 방금 전 발터의

안부를 물었던 광산 거부 가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트레비스 씨.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리 큰 배역이 아니라면 빼도 상관없는 문제 아니오.”

“저, 저기 대신 할 사람이 없습니다.”

“대체 무슨 역이기래?”

싱그마이어 대령이 물었다. 트레비스는 말문이 막혔다. 코러스 중 하나인데

어쩌겠는가. 말 했다가는 당장에 빼라는 말밖에 더 듣겠는가.

“빼시오. 그리고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빼야 하는 것 아니오. 다른 누구도 아닌 살인범의 딸을 어찌.”

“그것도 대귀족이자 영웅인 카밀턴 경을 죽이려 했던 자의 딸이란 말이오.”

“본인은 상관없는데.”

싱그마이어가 짜증난 다는 듯 말했다.

“본인이 있어야 상관있다 없다, 물어 볼 문제 아닌......카밀턴 경?”

트레비스가 놀라 돌아보았다. 테이블보 아래에서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이상한 신사 제임스 스튜어트 씨는 완벽하게 헨리 카밀턴으로 돌아와 있

었다. 수염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머리도 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경도 늘 쓰고 다니던 외알 안경이었다. 카밀턴은 흐트러진 금발머리를

잘 넘기고는, 경악하여 입을 자악 작작 벌리는 후원자들에게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아, 접니다. 다 아는 얼굴들이군요. 싱그마이어 대령, 파난에서의

근무는 어떤가요. 내 전처인 프리델라와는 사이가 아주 안 좋다고 들었는데.”

“그, 그게.”

“이런, 라즐로 씨 아니신가요. 오페라 극장에서 저보다 조금 더 오래

주무시던 분이라 기억하고 있답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광산거부가 숨을 들이켰다.

“대, 대체 언제부터 계셨던 겁니까.”

“처음부터 있었던 걸요. 그건 그렇고, 방금 전부터 제 이름이 참 자주

나오던데......... 정말 감동했습니다. 다들 제 마음을 헤아려 주려고

그리도 애써 주시니.”

다들 헛기침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레이브 경의 법적인 딸은, 글로리아 그레이브 양 하나

뿐입니다. 로웨나 그린이라는 아가씨는 이혼한 전처의 딸이고, 아주 오

래전에 의절한 사이지요. 하지만......... 그런 건 둘째치고라도, 제가

그 아가씨에게 아주 큰 신세를 진 적이 있습니다. 저 때문에 그 아가씨

가 불이익을 받는 다면....... 무엇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트레비스 씨

를 협박해서라도, 그녀를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대귀족, 팔시

티 공작가의 아들로서의 의무지요.”

“그, 그래도...”

싱그마이어 대령이 미련은 못 버리고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저는 제 명예를 걸고, 로웨나

그린 양이 무대에 서도록 할 것입니다.”

후원자들이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카밀턴 경이 굳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트레비스가 키스라도 할 듯 열렬한 눈으로 카밀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밀턴은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가,

테이블로 가서 냅킨을 가져다가 만년필을 꺼내어 무언가를 휙휙 갈겨썼다.

“뭐 하는 건가, 자네?”

“웨이터 좀 불러 주게. 이번에는 포크 가져다 달라는 말 아니니 걱정

말고 오라고 해.”

트레비스는 웨이터를 불러 주었고, 카밀턴은 냅킨을 접어 약간의 팁과

함께 그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당장 갑판으로 가서, 특무부..... 아, 알고 있겠지? 검은 제복

이네. 그 중에 유릭 크로반 하사를 찾아가 이걸 건네주도록. 답장도 받아 와.”

소년 웨이터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그것을 받아 들고 만찬장을 나섰다.

트레비스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크로반 하사는 대체 왜?”

“꽃향기.”

“응?”

“그 아가씨........... 꽃향기가 너무 진하다고.”

“향수? 그렇게 진한 것 같지 않던데?”

“바보. 그런 종류의 꽃향기가 아니란 말이네. 그리고 향수라면 자네가 더 진해.”

카밀턴으로부터 ‘바보’라는 말을 듣는 어마어마한 모욕을 당한

트레비스는 혼 빠진 얼굴이 되었다.

잠시 뒤, 그 웨이터가 답장을 가지고 왔다. 웨이터가 건네준 것은 샌드위치를

싸는 얇은 종이에 적힌 것이었다. 트레비스가 지켜보는 동안 카밀턴이 그것을 펼쳤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카밀턴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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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하루...........늦었습니다. -_-;;;

그래도....양은 좀 두둑하지 않습니까;;;

오타 수정했습니다;; 늦게 수정해서 죄송해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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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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