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31화 (131/174)

제131편

도망치는 별, 뒤를 쫓는 수평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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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녀는 만찬장을 나섰다. 사람들이 인사를 하는 것도 반갑

게 받고, 남자들의 감탄어린 시선과 여자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도

받았다. 가다가 멈추어 인사를 하며 손등에 키스를 바치는 남자들도

있었고, 여자들은 그것을 질투와 부러움 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소녀는 웃으며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아

름답게 자리를 지나갔다. 그러나 막 갑판으로 향하는 그녀 앞에,

창백한 얼굴의 깡마른 남자가 나타났다.

“뭘 하고 다니는 거야.”

클로디유는 주변을 살폈다. 갑판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클로디

유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꺼져.”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렇게 놀고 다닐 때가 아니야, 젠장!”

“왜? 당신보다 젊고 돈 많은 남자에게 꼬리치는 게 그렇게 보기 싫

어? 그렇다면 더 젊어지고, 더 돈을 벌어 봐. 그렇다면 버림받지

않을 테니.”

“기생충 같은 년.”

“아아, 내게 바치는 게 싫다면 떠나. 안 말려. 단, 내 덕에 얻게 된

건 다 버리고 가는 거 잊지 마. 그 재산도, 그 지위도.”

“그건 내 거라고!”

“글쎄. 과연? 따지자면, 당신 것이 아니라 에드먼드 란셀의 것이지.

네가 배신한 네 은인의 것이라고.”

발터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했다. 클로디유가 쏘아붙였다.

“칭얼대지 마. 그렇게 태어난 게 억울하다고 발버둥치던 열 여덟살

꼬맹이였던 널 구해준 건 나야. 내가 아니었으면 평생 그 사람 밑

에서 살면서 어머니 병수발이나 들고 살았겠지. 집 한채 얻으면 성공

한 것이고, 변변찮은 여자와 결혼해서 애들 먹여 살리느라 찌들어

가는 그렇고 그런 삶을 살고 있었겠지. 물론 그렇게 살 수도 있었지

만, 그걸 거부하고 에드먼드 란셀의 노예였던 날 탐냈던 건 네 선택

이었어. 나를 가지려고 그를 배반한 것 역시 네 선택이었고. 내가

하라는 대로 졸졸 따라와 그의 재산을 넘겨받아 지금 이렇게 사는

것 역시 네 선택이었고. 나는 배반하라고는 했지만, 명령한 적은 없

어. 선택은 네가 했어.”

“네가 꼬드겼잖아!”

“넘어간 건 너잖아.”

발터가 이를 갈아붙였다.

“뱀 같은 년 같으니!”

“난 악마가 맞아. 인간도 아니고. 오호라, 그렇게 경멸에 찬 눈으로

볼 건 없지. 나는 악마고, 나에게 충실해. 인간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해 안타까워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어. 인간 따위, 인간의 사랑,

인간의 애정, 인간의 따뜻함,  인간 자신들이 자기들 만의 것이라고

굉장히 추켜세우는 거짓된 환상 따위 부러워 한 적 없어. 그런 걸

로 따지면 짐승이 더 위대하지. 짐승은 조건 없이 사랑하고 조건

없이 믿으며 조건 없이 외면해. 그런 자신들이 위대하게 여겨달라

고 칭얼대지도 않고, 그런 자신들을 부러워 해 달라고 멍청한 소리도

하지 않지. 그러니 더 이상 날 탓 하지마, 발터 스게노차.”

“도망쳤어.”

“응?”

“.....그 놈, 살아 있다고! 도망쳤단 말이야! 에드먼드 란셀, 그놈이 도

망쳐서...... 우리에게 복수하려 한다고! 도망쳐야 해! 그놈은 우리를

찾아낼 거야! 이러고 다니면 잡혀!”

클로디유의 입술에 비웃음이 얹혔다. 발터가 험악한 얼굴이 되어 그

녀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비웃지 마!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 그놈이, 그놈이 우리를 가만 둘

것 같아?”

“오라지.”

“뭐?”

“오라고 해. 구경해 줄게. 그와 니콜라스가 싸우는 것을 봐야지. 미안

하지만, 내 보호자들도 그만큼이나 강해. 내가 가만히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행여나 그가 돌아올 때를 대비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인간인 너는 나를 원망하며 찌그러져 있는 동안 나는 아

니었다고, 이 멍청아!”

발터가 멍하니 있었다. 클로디유는 그의 손을 떨치고 자리를 나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그들을 바라보다가 수군대며 황급히 자

리를 떴다. 발터의 망연한 시선이 뒤에 박히자 클로디유가 돌아보았다.

발터가 분노서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클로디유는 코웃음을 치고는 갑판위로 올라섰다. 사병들이 식사를 마

치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고 있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클로디유는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볼이 벌개

진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포도주를 홀짝였다.

클로디유는 눈길을 돌려, 검은 옷의 장교들을 찾았다. 모두 세 명이

었으나, 그 중 하나는 여자이고 하나는 인간이 아니다. 찾는 것은 그

중 한명, 아직 청년의 나이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그 소년은, 클로디유가 찾는 그 소년은 뱃머

리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검고도

푸르렀다. 검은 제복은 어둠에 젖어 더욱 검었으나, 어깨에서 빛나

는 녹슨 십자가의 표시만은 달로 새긴 듯 선명했다. 클로디유가

다가오자,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묘한 얼굴- 클로디유가 생각했다.

소년이 부드럽게 웃었다. 클로디유는 그 소년이 어제 자신에게 던진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의 눈빛도 기억하고 있었다. 클로디유는 그 소녀, 로웨나 그린이 싫었다.

바보 계집. 아무런 힘도 없는 주제에 고분고부하지도 않은, 그런 바

보 계집애.

“안녕하세요.”

클로디유가 인사를 건네자, 소년 역시 예의바르게 답했다.

“처음 뵙는 군요.”

“클로디유 데지레라고 합니다.”

“유릭 크로반. 특무부 소속 하사랍니다.”

목소리는 조용조용했다. 식민지에서 살았을 텐데도, 그곳 사람답지

않았다. 급하고 거친 억양 없이 교양이 배어 있는 듯 아주 부드럽다.

예쁜 여자 앞에서 내놓을 것 없는 남자가 의례히 그러하듯 뻐기는

기색도 없다. 여유가 있었다. 그저 버릇이 그런 것뿐일까, 성격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정말 귀족 소년처럼 교육받은 걸까.

“말씀 들었어요. 하사님이 로웨나 그린 양의 남자 친구 분이라고 그

러던데요.”

유릭이 웃었다. 조용한 웃음이었다. 산들바람처럼 고요하고도 잔잔한

느낌이었다.

“맙소사, 그렇게 소문이 났습니까?”

“설마요. 저는 그린 양의 친구랍니다. 본인에게 직접 들었어요.”

“아아, 그렇단 말이지요.”

역시나, 유릭은 난처하다는 듯 눈길을 피했다. 클로디유는 비웃었다.

설마, 정말 그 여자애를 좋아할 리는 없겠지. 이제는 부정하겠지,

그리고 오해하지도 말라고 하겠지, 그리고 로웨나 그린의 거짓말이라

고 하겠지, 그리고 나를 바라보아야지.

“음, 참 예쁜 분이시군요, 클로디유 양은.”

“그린 양이 질투하겠네요.”

“글쎄요, 정말 질투 나도 아무 말도 안할 거에요. 워낙에 자존심이 강

해서.......”

유릭은 고개를 젖히며, 뱃머리 쪽을 보았다. 달은 만월에 가까워 아

주 훤했으며, 별들은 달빛에 눌려 흐려 크고 밝은 별들만이 맹렬하게

빛날 뿐이었다. 유릭의 검푸른 눈은, 검푸른 바다 위에 얹힌 별들

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사 님?”

유릭이 클로디유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수평선을 가리켰다.

“저곳을 잘 바라보십시오. 보고 있으면, 아주 크고 흰 별 다섯 개가

이렇게 늘어진 것을 보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유릭은 손가락으로 선을 하나 긋고 그 뒤로 선을 긋고 직각으

로 내렸다.

“도망치는 별이라고 부른답니다. 맨 위에 있는 별은 붉고, 그 아래의

별 네게는 모두 희지요. 그 별에는 전설이 있어요.”

“전설이요?”

클로디유는 눈을 반짝이며 유릭을 보았다. 검푸른 눈이 미소를 지었

다.

“북쪽 나라에 티아르타라는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눈산 기요타에 살

던 그녀는, 불길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아

가씨였습니다. 그런데 옆 산에 사는 설인이 그녀에게 구애를 했습니다.

아가씨는 거절했고, 설인은 그녀의 산을 망가뜨리고 산 밑의 마

을을 짓밟으며,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모두를 으깨 죽이겠다고 했

지요. 그와 결혼하기 싫었던 티아르타는 눈 산을 떠나 남으로 남

으로 도망쳤습니다. 설인은 그녀를 쫓아갔고요. 자, 지금 저 하늘 위에

있는 저 커다란 별들이 설인의 별자리지요.”

클로디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릭의 손길이 어깨에 얹히는 것도

상관치 않았다. 하늘에, 아주 커다란 별 일곱 개가 늘어져 있었다.

클로디유는 그 하늘을 바라보다가, 유릭에게 웃음을 보이고는 다시

수평선을 보았다. 유릭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아가씨를 찾아야겠지요? 자, 수평선을 잘 보십시오.”

잠시 뒤, 수평선 위로 붉고 선명한 별이 떠올랐다. 그 아래로 희고

크게 빛나는 별들이 나타났다. 유릭의 말 대로, 그 별들은 도망치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클로디유가 감탄했다.

“나타났군요!”

“아름답죠.”

“정말요.”

그리고 클로디유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유릭을 보았다. 유릭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별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답니다. 그게 뭔 줄 아세요?”

“글쎄요? 하사님이 가르쳐 주세요.”

유릭이 다가왔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저 별이 나타나면......”

“네.”

차가운 총구가 클로디유의 턱에 닿았다.

“제국 본국의 특무부 관할 구역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파난 특무부

관할이 된답니다. 자, 이제 체포 할게요, 악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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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부들부들)

자룡군이.......... 구내염에 걸렸습니다. -_-

맨날 먹고 노는 놈이 무슨;;;;;;;

다음편은 제 생일날 올라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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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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