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33화 (133/174)

제133편

도망치는 별, 쫓는 수평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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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알렉산더가 웃었다.

“저런, 네 주인이 대체 누구였는지도 잊었나? 맙소사, 그렇다면 네 형

제들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잊었으면 그들이 참 아쉬워 할

거야. 너를 굉장히 그리워하던데.”

클로디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문 앞에 검고 긴 그림자가 나타나 그 앞에 섰다. 이번에는 오

른쪽을 보았으나, 그곳에 거대한 짐승 같은 것이 웅크리고 있었다.

바닥을 보자, 그곳에 시뻘건 눈동자들이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의와 탐욕의 창, 찢어 삼키고 혀

로 입술을 핥을 듯한 그런 짐승들의 눈이다.

클로디유는 이를 악물며 몸을 움츠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알렉산더가 왼쪽, 침대가 있는 구석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곳에서 흰 그림자가 나타났다. 갓 내린 눈덩이처럼 뽀얀 색이었다.

“이 쪽으로 와라, 브랑쉐.”

그러자 그 흰 그림자가 살그머니, 수줍은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다가

왔다.

흰 소녀였다. 레이스와 프릴이 구름과 안개처럼 뒤덮인 예쁜 드레스

를 입은, 은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열 서너 살 정도의

어린 소녀였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으나,

볼은 마르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석 달은 굶주린 듯

한 모습으로, 클로디유를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디유가

이를 드러냈다.

“뭐, 뭐야 당신! 대체 뭐냐고!”

“말 할 건 다 했어.”

알렉산더는 느긋하게 여왕의 말, 그 왕관을 만졌다. 클로디유는 숨을

몰아쉬었다. 알렉산더를 바라보고 바라보아도, 그녀로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예전과 똑같은 알렉산더뿐이었고, 그녀가 아는

알렉산더 그 자체였을 뿐이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말했다.

“발터가 전해주지 않던가? 내가 탈출했다고. 그리고 이렇게 살아서,

배고픈 망령처럼 너희들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고.”

클로디유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림자들이 성큼 성큼 다가

오고 있었다. 어미 사자가 잡아온 영양을 향해 다가오는 어린 사자

들처럼, 입맛을 다시며 눈동자를 굴리며 조심스레 손을 뻗으며 다

가왔다. 클로디유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거, 거짓말이........거짓말이야! 당신이, 당신이 그 사람일 리 없어!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알렉산더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바짝 마르고 흰 소

녀 브랑쉐가 목을 감은 스카프를 내렸다. 숨어있던 붉은 나비가 날

갯짓 하듯 빛났다. 클로디유의 주변에 있던 모든 그림자들이 일제히

웃으며 몸을 펼쳤고 그들의 몸에는 가을의 단풍처럼 시뻘건 붉은

나비들이 빛났다. 클로디유의 목에 찍힌 것과 똑같은!

“....!”

“얼굴을 바꾸는 건 일도 아니야. 나이를 되짚는 것 역시 쉽지. 힘을

감추는 건 늘 해왔던 일이기에, 더더욱 쉬워.... 그러니 더 이상 부

인하려하지 마. 네 주인인 나는 바로 이 자리에, 이렇게 있다고.”

“흐윽...”

“자아, 선택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하지, 클로디유. 그리고 너 역시 나

를 배신하고 네 형제들을 팔아넘기고 얻은 자유에 대한 대가를 치

루는 거야. 억울할 거 없어. 네가 누린 만큼 댓가를 치르는 거니. 이

게 다 과정이라고.”

클로디유가 으르렁거렸다.

“내게 그런 욕망을 준 건, 인간이 아닌 나를 일깨워 노예로 부리던

당신이잖아! 자, 보라고! 이 노예들! 이들 중에 자유를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지? 모두 원해! 흑마법사에게 종속당한 마령은, 그

순간부터 자유를 꿈 꿔! 그리고 나는 그대로 한 거야! 내게 욕망을

준 당신을 배신하고, 내 숙명인 자유를 얻은 거라고! 그런데 뭐

가 잘못이라는 거야!”

알렉산더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물론 알아. 잘못도 아니지. 그럼, 그럼. 절대 아니야. 나는 그런 너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건 네 자유라는

것도 양해 못할 정도로 속 좁은 사람이 아니야. 네 말대로, 여기에

있는 네  모든 형제들이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자유, 자유, 자유!”

클로디유의 떨림이 멈추었다. 그림자들이 환호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하지만 클로디유, 자유는 스스로 지키는 거야. 투쟁과 투쟁을 통해.

족쇄가 있을 때, 너의 주인이 너를 위해 싸운다. 하지만 그것을 끊고

나가면 너 스스로, 너 혼자서 싸워야 해. 아무도 너를 위해 싸워주

지 않아.”

“나도 알아, 그런 건! 그래서 싸워왔어!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

다고! 수 백년 만에 간신히 얻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주변의 검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클로디유는 점점 더 불안

해졌다. 산채로 파묻히는 듯한 공포가 그녀의 목 근처까지 와 있

었다.

“클로디유, 지금 네 앞에 있는 이 모든 것이 네가 싸워야 하는 적들

이야. 내게 자비를 원하지 마, 나는 네 적이니까. 이들에게 형제애를

구하지도 마. 역시나 네 적이니까. 자, 이제 싸워. 네 소중한 자유

를 위해. 나를 배반한 용기, 왕의 등에 칼을 찌를 수 있는 용기, 왕

의 하인과 공모하여 주인을 살해하려 한 용기, 그리하여 타락한 황

금의 도시에 여왕으로 군림하고자 했던 용기를 가지고.”

클로디유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그림자들이 슬금슬금,

거대한 벌레 떼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굶주린 소녀 역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 중 그 소녀가 가장 끔찍했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절망한 자들에게 의외의 선물을 안겨주는 천사 같은 악마, 클로디유.

디스토피아의 동굴 속에 사는 빛의 나비. 허영의 그늘에 악마의 요

리를 놓아두고 배고픈 사람들을 유혹하는 사악한 요정......... 하지만

네가 이 타락한 배에 탔을 때부터 이 대가의 시간 역시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수평선은 언제나 도망치는 별들을 찾아 하늘로 던지니까.”

“저리 가라고!! 코지마, 코지마!! 도와줘, 도와 달란 말이야! 코지마

아아!!”

순간 문이 열렸다. 마령들이 인기척을 느낀 쥐처럼 일제히 뒤로 후닥

닥 물러나 숨고 도망쳤다.

흰 옷의 소녀가 알렉산더에게 달려와 그 팔에 매달렸다.

클로디유는 희망어린 눈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코지마였다. 빛깔 옅은 초록색 눈으로 클로디유를 가만히 바라보았

고, 그러다가 그 앞의 알렉산더를 보았다. 알렉산더는 정중하게 말

했다.

“어서 오시오, 코지마 부인.”

클로디유가 비틀 비틀 몸을 일으켰다. 코지마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

았다.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

“무슨 일이신지.”

알렉산더의 얼굴은 태연했다. 조금도 당황하고 있지 않았으며, 역시

나 조금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마치 차 한

잔 드시겠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클로

디유는 코지마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코지마의 손이 클로디유의

손을 후려쳤다. 클로디유가 이를 악물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러나 코지마는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당신, 니콜라스를 죽이실 겁니까?”

“글쎄요.”

“죽이지는 않아도, 파멸시키기는 할 테지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

도의 치욕을 당하게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해요. 당신의 분노도, 당신의 증오도, 그리고 당신의 복수도.”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끝까지 지켜보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훌륭하게 그를 파멸시키는 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아 주겠어요. 기다리지요. 기대하지요.

당신이 어찌하든, 어쨌건 니콜라스가 치루어야 할 대가일테니.”

클로디유가 멈칫했다. 알렉산더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코지마는

담담하게 말했다.

“실망스럽지 않게, 제대로 파멸시켜 주어요. 당신이 허우적거렸던 절

망만큼, 당신의 어깨에 얹힌 배반의 죄악만큼. 당신이 당한 치욕만큼,

당신이 느낀 분노만큼.”

“네 남편이잖아!”

클로디유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렇지.”

“사랑하잖아!”

“사랑하지. 그랬기에, 내 가슴에 박힌 칼은 그만큼이나 아파.”

“네가 못생겨서 사랑받지 못한 거야! 그 꼴로 그만큼이나 얻은 게 과

분하지!”

“그럼, 이번에는 내게 아름다움을 주겠다고 약속하려고? 그리고 구해

달라고?”

코지마가 웃었다. 싸늘한, 한겨울의 벌판에 서 있는 대리석 조각이

품은 듯한 웃음이었다.

“클로디유, 인간은 변해. 내 마음은 빛을 잃고 열기를 잃고 돌덩이가

된 지 오래지. 네가 그렇게 만들었어.”

“내 덕에 그의 아내가 되었잖아! 네 소원대로! 내 덕에!”

“알아. 그 땐 간절히 바랬지. 하지만...... 이제 아니어도 상관없어. 그

리고 상관없는 지금, 이렇게 너를 배신하겠어.”

“코지마!”

코지마는 문고리에 손을 얹으며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지금 이 배를 향해 돌진해 오는 마령은 어쩌실 건가요. 저 아이가

부른 건데. 아주 강합니다. 이 바다를 뒤집어 이 배를 산산조각 낼

거에요. 많은 사람이 죽겠지요.”

“제가 처리하죠. 당신은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잠자코 있겠습니다. 다행이군요. 잘 가, 클로디유. 다

음에 만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와 만나서 즐거운

시간이 없지는 않았어.”

“가지 마, 제발! 부탁이야!”

“싫어.”

“방금 전에는 날 구해줬잖아!”

“그들에게 죽는 것보다, 저 사람에게 죽는 편이 더 고통스러울 것 같

아서 그런 거야.”

“코지마! 가지마, 가지 말라고! 제발 부탁이야!”

코지마는 문을 닫았다. 클로디유는 으르렁거리며 문을 두드리고 당기

고 걷어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서

솟아 나왔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팔에 매달린 브랑쉐를 당겨 클로디

유 앞으로 가도록 했다.

클로디유는 도망치려 했지만, 검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몰려와 그녀의

어깨와 팔과 허리를 붙들었다. 머리카락이 움켜잡혀 당겨졌다. 고

개가 젖혀지며 앞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새하얀 브랑쉐가 웃으며 클로디유를 바라보았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굶주린 눈으로. 그 입 꼬리가 치솟으며, 허기진 송곳니가 드러났다.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은 너무나 천진하고 맑았다. 사방에서 침

삼키는 소리, 혀로 입술을 핥는 소리, 히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그 소리가 일시에 멈추더니 드레스 찢어지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살 찢어지는 소리, 뼈

부러지는 소리, 으적 으적 씹어 삼키는 소리, 히죽대는 소리, 무

언가를 빠는 소리...

알렉산더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붉은 피에 흠뻑 젖은 흰 소녀를 보았

다. 소녀는 피에 젖은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었다. 턱도 피범벅이

었다. 알렉산더는 손수건을 꺼내어 손수 소녀의 턱을 닦았다.

“이런, 이런. 옷에 흘리면 안 된단다. 숙녀가 이러면 못써.”

소녀가 해맑게 웃었다.

“이제부터 뭘 하실 건가요, 왕국 없는 임금님.”

“아아, 그 다음 일을 해야지. 나는 참 바쁜 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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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 네 놈이 제일 나빠!!!

다음편은 6일 뒤에 올라갑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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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4장 돌아온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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