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편
돌아온 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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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마는 걸었다.
천천히, 느릿느릿, 바닥으로 녹아들어가는 듯이, 더 이상 앞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이대로 꺼져버리고 싶다는 듯이. 그러나 발을
하나하나 딛을 때마다, 바닥에 닿는 감촉은 생생했다. 눈은 뚜렷하고,
귀는 멀쩡했으며, 감각도 놀랍도록 예민하다. 전혀 달라지지 않는
다. 여전히 살아있으며, 앞으로도 꽤 오래 살아있을 것이다. 멀쩡
한 정신으로, 어떤 악몽이 밀어닥치든 간에, 그렇게 멀쩡하게 있을 것이다.
천정 위로 우르릉- 거대한 짐승이 발을 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그 사악한 것이 부른 것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코지마 부인!”
그러나 그것은 참 밝은 목소리였다. 코지마는 눈길을 내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붉은 금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린 양........”
소녀- 로웨나는 웃으며 말했다.
“어디 가시는 건가요, 부인?”
“방으로 돌아가려고요. 피곤해요. 지금은 자고 싶군요.”
“어머나, 그렇다면 잘 되었네요. 맛있는 걸 선물 받았는데. 드실래
요?”
그러며, 로웨나는 자랑이라도 하듯 사탕이 담긴 예쁜 봉투를 내밀었
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뭐죠, 그건?”
“사탕이죠.”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답니다.”
로웨나는 실망한 듯 했다.
아직은 어린 암사자, 코지마는 그 소녀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커다
란 눈동자를 빛내며 호기심과 야망에 찬 시선으로 해뜨는 동쪽하늘을
바라보는, 아직은 어린 암사자다.
“남자친구가 준 건가요?”
“그런 거 아니에요!”
로웨나는 단호하게 외쳤다. 그러나 새침하게 입술을 내미는 폼을 보
니, 마음이 아예 없는 상대는 아닌 듯 했다. 코지마가 물었다.
“사랑, 해 본 적 있나요?”
“나이 열 일곱에 첫사랑 한번 없었을라고요. 있었죠.”
“어머나, 어떤 사람이었나요.”
“풋내기 때 고르는 상대가 늘 그렇듯, 엄청나게 시시한 애였어요. 하
지만 어리버리한 꼬맹이 눈에는 멋져 보였어요. 다른 남자애들에
비해 똑똑하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저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았고.
그래서 혼자서 좋아했어요. 뭐, 다른 여자애에게 뺏겼지만.”
“화났겠군요.”
“글쎄요, 처음에는 아주 화가 났어요. 억울하고 분했죠. 하지만... 시
간이 지나니까 괜찮아 졌어요.”
“지금은 사랑하지 않나요?”
“풋내기 사랑의 환상이 깨지고 맘 변하는 건 순식간이에요. 지금은
동네 친구 같은 감정 밖에는 없어요. 저야 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그 녀석은 거의 쉰밥 수준이거든요. 그가 잘 되기
를 바라지만, 제 남편이나 애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결
코, 제 모든 것이 되어주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에게 무언가 맡기는
것은 정말 싫다고요.”
“왜..... 변했나요.”
“저절로 변하던걸요.”
코지마는 흐릿하게 웃었다.
“저도 언젠가는 그리 되었으면 좋겠군요.”
순간, 바닥과 벽이 우르릉 흔들렸다. 로웨나가 놀라 천장을 올려다보
았다.
“왜 이러죠? 갑자기 폭풍이라도 치는 건가.”
“바다는 예측할 수 없죠. 변덕스럽고 난폭하답니다. 철없고 어린 악동
처럼. 하지만 걱정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랍니다. 같이 차라도
들겠나요? 이 맛있는 사탕과 과자와 함께 가볍게 다과라도 나누지요.”
로웨나는 불안해하며 흔들리는 천정과 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코지마가 돌아서자, 망설이면서도 그녀를 따라갔다. 진동은 점점 더
거세어졌다.
“걱정 마세요. 전혀 걱정할 것 없답니다. 봄의 미풍처럼 사라질 거에
요.”
코지마가 다시 달래듯 말했다.
“대재난이군.”
유릭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 거렸다.
별빛 퍼지고 달빛 젖은 검푸른 하늘이, 수평선에서부터 밀려들어온
검은 구름에 뒤덮이고 있었다. 바다위로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바다는 거칠어지고, 그 위를 휘젓는 바람은 더욱 거세다. 배가 기우
뚱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판위로 부는 바람이 거세어지며, 사병들
이 몸을 일으키고 선원들이 급히 갑판위로 가서 갑판 위를 오가는
승객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에바!”
에바가 급히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에, 빛으로 된 판이 나타났다.
그 중앙에 핏방울이 떨어지듯 붉은 점이 선명하게 어렸다. 그러나 피
번지듯 뻗어나가, 단숨에 산산조각 났다.
“위험합니다.”
유릭이 모두에게 명령했다.
“전투준비!”
카바냐가 봉을 뽑아 뱃머리를 겨누었다. 크리스펠로의 손이 어깨로
향했다.
수평선이 검게 젖어가는 그곳에, 희고 거대한 그림자가 어리고 있었
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증식해 나가, 거대한 새의 날개처럼 펼쳐
지고 있었다.
그 위로 붉고 선명한 두개의 점이 나타났다. 눈동자다. 이글거리는,
살육자의 눈이었다. 사악한 붉은 달 같은 눈. 유릭이 에바에게 물
었다.
“파악 했나?”
“인장이 확인. 소유주가 있습니다만, 그 의지는 혼란합니다. 통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소환 즉시 죽은 듯 합니다. 전파 이
외의 방법은 없어요.”
“등급은?”
“측정불가.”
“구역 설정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바람에 휩쓸리고 있
었다. 파난의 해안 경비대 사병들조차도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유릭이 외쳤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
바람 소리에 묻혀, 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유릭은 더 크게
외쳤다.
“전원 철수--! 어서!”
그럼에도, 사병들은 주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유릭은 크리스펠로의
쇠사슬을 당겼다. 크리스펠로가 늑대로 변해 으르렁거렸다. 거대한
검은 늑대가 눈을 빛내며 울부짖자, 그 실감나게 살벌한 광경에 놀
란 사병들이 그제야 유릭과 카바냐, 에바 쪽을 보았다. 답답해진 유
릭은 허공에 총을 쏘았다. 섬광이 어둠을 할퀴었다.
“전원 철수! 어서! 지금부터, 이 배는 특무부 관할이다! 전군 지휘권
은 내게 있다! 철수 해, 당장!”
크리스펠로가 으르렁거리며 짖어댔다.
해안 경비대 장교가 달려왔다.
“하사, 대체 무슨 일이야! 왜 네가 명령하는 거야!”
유릭은 수평선을 가리켰다. 바람이 너무 거세어, 갑판이 흔들리고 몸
이 휩쓸려 날아갈 지경이라 제대로 보기도 어려웠다.
“마령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이 지역을 정화 지역으로 선포합니다!
내 권한으로! 그러니 모두 철수시키십시오! 죽기 싫으면!”
“우리의 임무는...”
“임무고 뭐고, 닥치고 들어가기나 하십시오!”
그리고 유릭은 총구를 들어 장교의 목덜미를 찍었다. 모멸감에 장교
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뭐 하는 짓인가, 하사! 네 계, 계급이..”
그러나 장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동공이 풀
리며, 이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유릭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검은 수평선 위에 무엇이 나타나고 있는
지, 그 역시 보게 된 것이다.
“뭐, 뭐야 저게.”
“마령입니다. 파난의 해군이시라면, 파난과 그 해안이 얼마나 위험한
지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 안다! 하지만 저건 너무 크잖아! 저렇게 거대한 건 본적이 없다
고!”
“저도 처음 봐요. 그러니 어서 내려가기나 하십시오.”
“해일 수준이잖아! 마령이 맞나! 제길, 저건 그냥 폭풍우잖아! 다 휩
쓸릴 거라고!”
유릭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버버벅 거리는 그의 입에 총
구를 쑤셔 넣으며 윽박질렀다.
“이제부터는 되든 안되든 저희들 일입니다. 닥치고 내려가십시오. 내
려가는 길에 부하들 모두 챙겨 가는 거 잊지 마시고.”
유릭은 총구를 뽑고 돌아섰다. 장교는 어버버버 거리다가, 카바냐가
그 엉덩이를 후려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두 배 안으로, 배
안으로!!를 위치며 달려갔다. 그러나 워낙에 잽싸게 갑판 안으로
사라져서 다른 사병들이 들었을 지는 의문이다.
유릭은 에바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바람이 거세니, 안에서 수호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일단 시도한다.”
“알겠습니다!”
에바는 브릿지로 향하는 계단으로 뛰어 올랐다.
“카바냐 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배를 중심으로 전파! 크리스펠로님,
대위님은 저와 함께 오십시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비였다. 후두둑, 후두둑, 작은 자갈
처럼 와르르 쏟아졌다. 바람은 더욱 거세어지며, 빗줄기는 채찍처럼
유릭의 몸을 때렸다.
“제길!”
배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저 몸 뒤틀 듯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만, 바람이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어 잘못 하다가는 뒤집힐 것
같았다. 유릭은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려 했다. 뱃머리가 향하는
수평선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힘의 정체를 마주 보아야 했다. 그
러나 허리를 피려는 순간에 발이 미끄러졌다. 빗줄기에 미끄러워진
갑판은 유릭을 험악하게 밀어붙였다.
“유리!”
크리스펠로가 외쳤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기도 전에 유릭은 휩쓸려
내동댕이쳐졌다. 거센 바람에 배가 기울었다. 갑판이 눈앞으로 확
치솟아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잡아야 했지만, 휩쓸리는 통
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크리스펠로가 늑대로 변
해 나는 듯 달려왔다. 유릭은 밧줄을 잡았지만, 그나마도 빗물에 손
바닥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놓쳤다. 그대로 난간에 부딪히고 나가떨
어졌다. 거대한 바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다가 아찔하게 나타났다.
순간, 유릭의 팔목을 누군가가 움켜잡았다. 비에 흠뻑 젖은 팔목이었
으나, 그 손은 어마어마하게 강한 힘으로 유릭을 낚아 채 갑판 안
으로 당겼다. 갑판이 다시 기우뚱 흔들렸지만, 유릭은 간신히 갑판위
의 밧줄 하나를 잡고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유릭을 구한 자는 난간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는 유릭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엄청난 빗줄기가 쏟아지는 중에 유릭은 상대방을 확
인할 수 있었다.
“백작?”
알렉산더였다. 그가 웃으며 인사했다.
“여어, 하사.”
알렉산더의 웃음은 가식적인 부드러운 웃음도, 그렇다고 진심으로 우
러나오는 따스한 미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묘한 비웃음이었다. 깨진
차가운 바위틈에 고인 더욱 더 찬 얼음 물 같은, 그런 서늘한 웃
음이었다.
“어떻게...”
빗줄기 쏟아지는 속에서도, 물에 흐려진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러
면서도 유릭은 마치 세상에 단 둘이 남은 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운명이, 장미의 가시덩굴 같은 고통스럽고도 단단한 운명이 그를 옭
아매고 있는 듯한 오싹한 공포가 느껴진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릭은 낙관적이지도 않지만 비관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일 리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숙명을 믿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만큼은 작은 참새 같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검은 어둠에 꼭꼭 싸여있는 듯한, 그런 압박이 느껴진다.
“구경 나왔지. 정말 멋지군. 굉장한 강림이야.”
알렉산더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빗줄기 한가득 내리꽂히는
수면에 거대한 물보라가 일고 있었다. 여객선을 향해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흐린 눈에도 그것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악신의 강림,
그것으로밖에는 유릭으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유릭이 알
렉산더의 팔을 잡은 채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응?”
“민간인 철수를 명령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배가 기우뚱 흔들렸다. 팔목을 잡은 알렉산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때, 갑판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 거대한 그림자는 빗줄기를
뚫고, 바닥에 고인 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와 알렉산더에게 달려들
었다. 으르렁, 크릉-! 바람소리보다 더욱 우악스런 울부짖음었다. 거대
한 송곳니가 허공에서 딱 부딪혔다. 알렉산더는 유릭의 손을 당겨 갑판
안쪽으로 내동댕이쳤다. 검은 그림자가 난간을 짓밟고 몸을 퉁겨내더니,
유릭 쪽으로 달려가 그 옆에 섰다.
시커멓고 거대한 늑대였다. 어깨를 눕히고 이를 드러내며, 눈에 불꽃을
튀기며 알렉산더를 노려보았다. 빗줄기 쏟아지는 속에서도 바위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알렉산더는 늑대의 이에 찢긴 팔목의 상처를 보았다.
그러나 더 움직이기도 전에, 허리에 차가운 봉이 쿡 쑤시고 들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짧은 금발머리의 여자였다. 그녀는 입술을 꾹 물고,
한 손으로는 난간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봉을 쥐고 그의 허리를 노리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유릭이 크리스펠로의 쇠사슬을
낚아채 꽉 잡고는 권총의 총구를 들어 알렉산더를 겨누었다.
“이만 들어가십시오.”
“너희들만의 힘으로 저걸 처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돕고 싶다면.......... 저희들 뒤에서 하시던가. 그러나 공식적
으로는 거절합니다.”
유릭은 총구를 내리고 뱃머리 쪽으로 향했다. 배를 향해 똑바로 내리꽂
히는 빗줄기에 휩쓸려 갈 것 같았다.
“암만.”
바람이 일며 물보라가 일어났다. 빗줄기가 회오리쳤고, 여기저기 후려쳐
댔다. 그러나 바닥의 물보라가 유릭의 발에 감기며, 유릭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받치기 시작했다.
“크리게아, 암만!”
빗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으며, 바람에 휩쓸려 갈라졌다. 갑판위로 자갈처
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펠로!”
동시에, 뒤에서 크리스펠로의 외침이 터졌다.
“탄달로스!”
유릭의 머리 위로 붉은 불꽃이 솟구쳤다. 검은 하늘이 찢겨져나갔다.
휘날리던 얼음조각들이 삽시간에 불살라 사라졌다. 빗줄기가 멈추었다. 허공은
잠시 멈춘 듯 고요해졌으며, 더 이상 유릭을 방해하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 유릭은 걷히는 시야 속에 배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괴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거대한 물보라가 일고 있었다. 거대한 새, 거대한
용, 아주 육중한 몸을 가진 강대한 짐승 같은 거대한 물보라가 일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유릭은 이를 악물었다. 저것이 다가오면
모두 산산조각날 것이다. 짓밟히고 으깨어져 파편이 될 것이다. 잠시 걷
었던 빗줄기가 다시 갑판위로 후두둑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어쩌지?”
뒤에서 크리스펠로가 묻자, 유릭은 총구를 들었다.
“합니다.”
크리스펠로는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럴 때 크리스펠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절대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며 잔소리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배는 지켜야 합니다. 반드시!”
순간, 유릭의 양 어깨에 두 손이 얹혔다. 오싹한 손이었다.
“무리하지 마, 하사. 지금 네 힘으로 저걸 상대할 수는 없어. 맨 몸으로
덤벼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쇠사슬 꽉 감긴 몸으로 뭘 상대하겠다는 건가.”
“!”
급히 돌아보려는 순간에, 그 두 손이 어깨를 떠났다.
“지금의 너는 안돼.”
“무슨........!”
그리고 유릭의 앞으로 알렉산더가 나섰다. 바람은 미친 듯이 거세어지고,
빗줄기는 바닥을 휩쓸었다. 알렉산더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자, 보라고.”
물보라가 더욱 거세게 바다를 긁었다. 희뿌연 연막이 펼쳐졌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은 집어 삼킨 듯이 시커멓다. 그리고 거대한 해일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덩치 큰 여객선은, 우둔한 소처럼 흔들리며 그 파도
에 휩쓸려 뒤집힐 것 같았다. 바람은 거세게 갑판을 휩쓸었다. 알렉산
더의 젖은 머리카락마저 휘감아 오르게 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외쳤다.
“내가 돌아왔다! 산채로 묻혔던 오래된 왕이 돌아왔다. 너희들의 오래된
왕, 너희들의 아버지이자 왕이었던 내가 돌아왔다!”
그러나 해일은 배를 향해 똑바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거인이 펼쳤던 손바닥을 오므리듯, 거대한 해일이 산처럼 솟구쳐
하늘을 덮고 배 위로 쏟아졌다. 후두두둑- 빗방울보다 더욱 진하고 차가운
바닷물이 갑판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배가 기울기 시작했다. 당장에
산산이 부수어 으깨어질 듯 했다. 나뭇잎처럼, 개미 한 마리처럼, 그렇게
무력한 한 조각이었다. 온 바다가 들끓어 솟구치고 있는 중에, 인간은
작고도 작았다. 미력하고도 미력했다.
알렉산더는 그 바다의 벽, 육중한 바다의 산을 바라보았다. 그 중앙에,
두 개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알렉산더를 노려보며, 사납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웃었다. 바다 속에서 육중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성난 거인이
으르렁거리듯.
“네가 기억하는 나보다, 지금의 내가 약하다는 건 인정하지. 배반,
치욕, 유폐. 내 생에 비하면 길지도 않은 시간. 하지만 그건 내게 금을
남겼다. 얼룩을 남겼지. 결코 잊혀지지 않는, 치욕스러운 두려움을 남겼어-!”
알렉산더는 손을 들었다. 그 끝에, 시뻘건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자, 배반한 거짓 여왕을 따랐던 내 옛 노예여! 울부짖어라,
으르렁거려라, 포효해라! 달려와, 휩쓸어라! 부수고, 짓밟고, 할퀴고,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 산을 뽑고, 별을 깨고, 달과 해를 삼키고, 바다를
뒤집어라-! 그렇게 네 마음껏 해라!”
해일이 쏟아졌다. 알렉산더가 손을 뻗었고, 빛은 햇살보다 찬란하게 번쩍였다.
“.....그래도 내가 승리할 테니!”
해일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비처럼 산산 조각이 나, 갑판 양 옆으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검푸른
바다가 쏟아지는 중에, 알렉산더의 손끝에 붉은 나비가 어렸다. 그것은
애처롭게 파닥거리며 그의 손아귀 안에서 몸부림쳤다. 알렉산더는
그것을 움켜잡았다. 불길을 내리친 듯 산산이 부서졌다. 조각조각, 죽어가는
늦봄의 살점 같은 꽃잎처럼. 배를 중심으로 바다가 휩쓸려 나갔다.
쓸어 내듯이, 밀어 젖히듯이.
하늘의 구름이 씻겨 내려가고, 거칠게 으르렁대던 바다의 수면이 억눌리듯
잔잔해져갔다. 별이 스며 나오고, 달이 빛을 토해냈다. 회오리치듯이,
들끓던 모든 것이 휩쓸려 씻은 듯 사라지고 있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짐승이 쓰러지며 피를 토해내듯이
거친 바다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
유릭은 그 광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마침내 바다가 완전히 가라앉으며, 배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흠뻑 젖어있던 갑판이 닦아내듯 마르기 시작했다. 냉혹한 바람이
가라앉자 한 여름 밤의 열기가 휩쓸려 들어왔다. 배위에 물이 증발하며
자욱한 안개가 어리기 시작했다.
뱃머리에 있던 알렉산더가 등을 돌렸다.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게 되자
유릭은 묘한, 아주 묘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주 예전에 어린 시절에 느꼈던 어떤 감정이, 억누르고 억누르던 그 감정이
치솟아 오르려 했다. 알렉산더가 다가왔다. 크리스펠로가 다시 적대감을
드러냈으나, 카바냐가 그 가슴을 팔꿈치로 툭 치자 이를 감추었다.
“뭘 한 겁니까.”
“너를 도와줬지.”
“흑마법사입니까?”
“나는 마령을 다스린 적은 없어. 내게 복종하거나 파괴당하거나. 그건
녀석들 알아서 할 바지. 나는 자유주의자고, 그래서 상대방의 선택을 존중하지.
방금 그 녀석은 절대 못하겠다고 버텼고, 나는 파괴해 준 것 뿐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흑마법사가 아니다. 적어도 너희들 기준으로는.”
그리고 유릭의 어깨를 툭 치고는 지나갔다.
“어쩔 거야?”
카바냐가 물었다.
“흑마법을 쓴 건 아닙니다. 체포할 수 없습니다.”
“쳇. 재수 없는 남자네, 정말.”
카바냐가 알렉산더의 뒷모습을 쏘아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신세진 건 사실이잖아요.....”
“우린 도와 달라고 한 적 없다고!”
“저희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프리델라 님께 이르는 것 밖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릭은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그의 앞에
섰던 수많은 애송이들과 똑같은 심장이, 그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등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존재감이, 그 힘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 전에 차게 식은 그
의 피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
“먼저 싱그마이어 대령에게 보고해야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그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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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아아,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대체 뭐하다가 시간이 이리 된 거람?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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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