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편
돌아온 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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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미친 듯이 흔들리다 얌전하게 가라앉았다.
1인실 객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던 발터는, 처음에는 그것
이 신의 징벌이라 단호히 믿었으나 잠잠해지자 안도했다.
언젠가는 벌이 닥칠 거라, 밤에 잠 들 때마다 자신에게 말해왔다. 두
려움에 떨며, 차라리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빌다가도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만은 아니기를 빌었다.
오늘도 많은 악몽이 그의 머릿속으로 휘몰아쳤다. 옛 은인의 모습과,
그가 배반하여 지하 감옥의 바닥중의 바닥에 처박혔던 그의 뒷모
습과, 소리쳐 원망하지도 못하며 조용히 눈물을 삼키던 은인의 약
혼녀가.
문득 풍겨오는 이상한 냄새에 그는 눈을 떴다. 눈을 뜰 때면 늘 그러
하듯, 그 때의 그 역시 ‘아아, 그래도 눈을 떴구나.’ 그리 안도했다.
그러나 그는 흐끅, 신음을 삼키며 벌떡 일어나야 했다.
사방이 피바다였다. 카펫에도, 침대보에도, 벽에도, 엄청난 피가 튀어
있었다. 그리고 그 피바다의 중앙에, 누군가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붉은 리본에 곱게 묶인 채 놓여 있었다.
클로디유의 머리카락. 검은 머리는 많고도 많았지만, 그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에 그것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클로디유의
것이야.....
그리고 칼을 찍듯이, 번개가 어둠을 가르듯이 한 이름이 뇌리에 박히
고 박힌다.
에드먼드 란셀!
“!”
발터는 두려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꿈이라고 외쳤
지만, 피비린내는 진짜였다. 눈을 감았다 뜨고 허공을 노려보아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 매달려야 한
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에게 매달린 담! 어머니부터 생각났다.
그가 그의 옛 은인을 배반하던 날,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눈물을
삼키던 어머니가. 화도 내지 못한 채, 그저 추레한 자기 탓이라
하며 숨죽여 울다가 죽었다.
머리를 쥐어뜯다가, 그저께 배에 탄 해안 경비대를 생각했다. 맙소사,
안된다. 대체 이걸 무엇으로 증명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그 해안
경비대와 함께 온 특무부를 떠 올렸다. 그 중에, 그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유릭 크로반!”
발터는 결정을 보았다. 그 녀석뿐이다. 그 녀석이라면 말할 수 있고,
말해도 되고, 도와줄 것이다. 노버스 크로반의 조카가 아닌가. 그
역시 분명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에드먼드 란셀이 복수에
나섰다면, 그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발터는 모든 것을 다 말하고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유릭이 얼마나
높은 장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깨너머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특무부에서 분명 높은 자리에 있는 듯 보였다. 뿐만 아니라 카밀턴
경과도 연관이 있지 않은가! 카밀턴 경은 니콜라스 추기경의 정적
인 레반투스 대공파다.
발터는 상황이 점점 더 희망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서 가서 도움
을 청하면, 모든 것을 다 말할 테니 나를 도와 달라 한다면, 그들은
분명 거래에 응할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분명 니콜라스를 무너
뜨릴만한 극비가 아닌가.
발터는 객실을 뛰쳐나갔다. 아직 어두운 시간인데다가 폭풍우가 멈춘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람들은 모두 방에 꼭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발터는 급하게 달렸다. 손과 옷깃에 묻은 피가 벽에 묻
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허둥지둥 복도를 달려, 어떻게
든 특무부 장교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이
어디 있는 지조차 모르면서, 그래도 필사적으로 찾으려 했다. 유릭,
유릭 크로반 군! 나 좀 도와줘! 나 알지? 발터 스게노차, 자네
숙부의 친구일세!
순간, 앞으로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성큼 나타났다. 발터는 소스라치
게 놀라며 도망치려다가, 그 그림자의 얼굴을 보게 되자 기겁했다.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키 큰 남자였다. 갸름한 얼굴에, 서글서
글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깨끗한 턱에, 머리카락도 아주 단정했다.
그리고 결혼식이나 약혼식에라도 갈 듯 희고 고운 예복을 입고
있었다.
“다, 당신!”
키 큰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오랜 만이군, 발터.”
발터는 이를 악물고 떨기 시작했다. 그였다. 약혼식장에서 끌려 나가
던 그 때 그 모습에서 단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듯 똑같은 모습의
에드먼드 란셀이었다. 옷조차도 똑같았고, 가슴의 장미꽃 역시
똑같았다. 방금 전에 돌아온 듯한 모습으로, 15년 전의 그가 발터의
눈앞에 서 있었다.
발터는 이제는 정말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악몽이야, 이건 정
말.....! 결단코 꿈이라고!
에드먼드는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 잘 지냈나? 맙소사, 15년 만에 만나는 건데, 표정이 그게
뭐야.”
“에, 에드먼드 나리?”
에드먼드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나야. 나는 하나도 안 변했지?”
“저, 저기....”
“저런, 옷이 참 더럽군. 피투성이네. 어디서 뭘 하다 온 거지? 살인이
라도 하고 온 모습이야.”
발터는 해쓱해졌다.
“자, 잘못했습니다.”
“응? 뭐가.”
“잘못 했어요! 아니, 저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 계집, 그 계집이
저를 꼬드겼어요. 당신을 배반하라고, 그러면 제 것이 되겠다고! 다,
당신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고발하자고, 고발만
하면........그러면........저는 그저 그 계집의 꼬임에 넘어간 것 밖에
는 죄가 없습니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서 튀어나온 가장 두려운 망령은
천사보다 선량해 보였다.
“그래, 클로디유가 자네를 꼬드겼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죄가 없어요.”
“아아, 그래, 그래. 이해하다마다. 꼬드겼겠지, 집요하게 유혹했겠지.
그리고 나를 배반하고, 고발하여 지하 감옥에 가두고, 내 약혼녀에게
가야 할 재산을 가로챘지.”
“모두 그 계집이 한 거라고요! 저, 저는 그저....그저........ 아, 아닙니
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다 그 계집이 한 겁니다! 그 계집이!”
“하지만 클로디유를 원한 건 너잖아.”
“제가 속았던 겁니다!”
“저런, 발터. 그러면 실망이지. 열 여덟 살 소년에게, 아름다운 소녀
가 어떤 의미인 지 나도 참 잘 알아. 더군다나 나쁜 사람의 노예가
된 소녀라면, 구원을 핑계로 차지하고 싶었겠지. 누구나 그래. 아
름다운 것, 값진 것이 눈앞에 있으면, 비열한 짓이라도 해서라도 가
지고 싶어지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데, 내가 왜 그것을
이해 못하겠나.”
“에드먼드 님!”
그 부드러운 말에 발터는 꿈에서라도 구원을 받고 용서를 받게 된 데
감사했다.
“하지만 발터, 네 욕망에 따르기로 선택한 건 너야.”
“....네?”
“사랑은 불가항력이었지만, 나를 배반하고 내 재산을 가로채고 내 약
혼녀를 고난에 빠뜨린 건 네 선택이었단 말이지. 욕망을 느낀 것은
불가항력이지만, 그것에 따르기로 택한 건 너란 말이야.”
“.....그 계집이 속인 겁니다. 저, 저는 아무 잘못도...!”
“발터, 나는 그 일 때문에 화가 아주 많이 났고, 자네는 그 빚을 갚아
야 해. 알겠어?”
“아무 잘못도 없다니까요! 그 계집이, 그 계집이.......”
발터는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돼. 자네는 어른이야. 어른인 이상, 그 어떤 일에도 대가
가 따른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세상에 공짜는 없어. 대가를
일찍 치르나 늦게 치르나, 둘 중 하나일 뿐.”
“잘못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어요! 그 계집은 딴 남
자놈과 놀아났고, 내가 벌어 오는 재산은 그 계집과 그 놈이 차지
했다고요! 저는 그저 이용만 당했던 겁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가엾은 저를 벌하지는 말아 주세요! 저는 착하게 살았단 말입니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을 돕고, 힘없는 사람을 보살폈습니다!”
“알아. 하지만 관심없어.”
“나, 나리!”
“나는 지금, 나에 대한 보답만 받아 가면 돼. 나를 배반하고 나서 네
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착하게 살던 가난하게
살던 자비롭게 살던 천박하게 살던 조금도 관심 없다고. 네가 나를
배반하여, 나는 그 지하 감옥에서 치욕을 당했어. 중요한 건 오로
지 그것뿐이고,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 역시 그것뿐이야. 나머지는....
... 미안하지만, 조금도, 아주 조금도 관심이 없어.”
“.....그런.....! 선행을 했는데, 그런데 왜!”
“그건 하나님이 할 일이지, 내 할일은 아니야. 하지만 착하게 사느라
수고했어.”
발터가 발악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제길, 마델로는! 노버스 크로반은!! 니콜라스
는!! 윌리엄 렌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네가 상관 할 바 아냐. 자네는 그냥 자네가 치러야 할 것만 생각
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값을 받을 테니까.”
그리고 에드먼드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발터는 발악하듯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으려 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제발! 제발 용서를............!”
에드먼드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발터는 그 팔에 매달리며 애걸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넌 살인자야.”
에드먼드가 웃으며 말했다. 발터는 발악하듯 고개를 저었다.
“난 살인자가 아니야! 아니라고!”
“누굴 죽인 건가!”
“아무도 안 죽였다고! 젠장, 용서해 달란 말이다! 용서해 줘! 난 아무
도 안 죽였어!”
“마데라스 소위, 지금 당장 배 안에 실종자가 없는 지 살펴보도록 하
게.”
발터는 기겁했다. 그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그
는 자신이 잡고 있는 사람이 에드먼드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큰 키의 고급 장교였다. 해안 경비대에서 보낸 싱그마이어 대령이었
다. 그는 이를 악물고 경악한 얼굴로 발터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
눈에는 분노와 환멸이 차 있었다. 발터는 주춤 주춤 손을 놓았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러나 싱그마이어의 어깨 너머로, 익
숙한 얼굴이 보였다. 발터는 단숨에 모든 것을 잊었다.
“유릭 크로반? 크로반 맞지! 그렇지!”
싱그마이어가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검은 제복의 소년이 한 눈에 들
어왔다. 발터는 달려가 유릭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 그놈이 돌아왔어!”
“네?”
“그 놈이 돌아왔단 말이야! 그 놈이 그레이브를 죽였어! 이제 나를
죽일 테고, 니콜라스 추기경도 죽일 거야! 모두 죽을 거라고!”
니콜라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에, 싱그마이어 대령은 물론이요 그
의 옆에 있는 부하들의 얼굴도 새파래졌다. 싱그마이어 대령이 유
릭을 보며 답을 구했다. 그러나 유릭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 되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놈이 돌아왔어! 에드먼드 란셀! 그, 그놈이! 그놈이 날 죽이려
해! 그리고 자네도, 자네 숙부도 죽일 거야! 나를 도와, 도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네도 죽어!”
그리고 유릭에게 버둥대며 달려와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유릭이 빠르
게 물었다.
“죽는다니,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놈이 여기 있어! 바로 여기, 바로 내 옆에 있다고!”
유릭의 눈이 커졌다. 그 때, 청년 장교가 달려오며 외쳤다.
“실종자가 신고 되었습니다! 코지마 쿤드리 여사의 질녀인 클로디유
데지레 양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제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
분께서 방금 전에 알려 오셨습니다!”
“어디 계시지, 그분은?”
“어떤 숙녀분과 함께 선장실에 계십니다. 어제 저녁부터 그분과 함께
클로디유 데지레 양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발터는 그제야 놀라 자신의 손을 보았다. 끈적끈적하다는 것을 깨닫
게 된 것이다.
“!”
발터의 눈이 커졌다. 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옷자락에도 피가 튀어
있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그가 더듬은 벽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 이게......!”
싱그마이어 대령이 유릭을 뒤로 밀어젖혔다.
“물러나도록. 아무래도 이건, 특무부 관할이 아니라 우리 해안 수비대
관할이 되겠군. 아니, 일단 확인은 해야겠지. 이 사람은 흑마법사
인가?”
유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좋아, 마데라스 소위!”
마데라스 소위라 불린 청년 장교가 나서, 부하들에게 발터를 체포하게
했다. 유릭이 급히 싱그마이어에게 말했다.
“잠깐 기다리십시요. 클로디유 데지레 양은......”
인간이 아니다, 살인죄가 성립될수조차 없는 존재다, 그 말을 하려는
순간에 싱그마이어 대령이 명령조로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우리 해안경비대의 일이다.”
“살인사건이 아닙니다.”
“조사 해 봐야 알지! 그리고 자네, 자네도 준비 단단히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남자가 자네에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을 너무
많이 듣더군. 자네도 살인용의자, 또는 공범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아니, 보아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해.”
그 눈빛을 보니, 유릭이 방금 전 갑판위에서 한 짓에 대해 벌써
보고받고 이를 갈고 있는 듯 했다. 유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보호받기 위해서는 싱그마이어 대령과 같은
계급인 프리델라가 필요하다.
유릭이 잠자코 있자, 싱그마이어 대령은 빙그레 웃으며 부하들에게
외쳤다.
“해안 경비대의 흰제비갈매기 호에 연락해라. 살인 용의자를 체포
했으니, 당장 데리고 가 취조하라고! 코지마 여사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대신, 그 친구라는 숙녀에게 부인을 방으로 모시고
가 달라 전하도록. 우려할 만한 일이 발생한 것 같다는 말도 함께 전해.
어서! 새벽이 오기 전에 서둘러--!”
유릭은 그의 손끝에 묻어 있는 피를 바라보았다. 발터의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유릭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돌아섰다. 그가
돌아서자 사병들이 일제히 길을 비켜주었다. 처음에는 걷다가, 나중
에는 달렸다. 갑판으로 뛰쳐나가자, 새벽의 찬바람이 목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이거....”
도저히 알 수 없다. 두터운 가면을 쓴 사람이 가득한 곳에 홀로 맨
얼굴로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음산한 공포, 참을 수 없는 두근거림.
유릭은 땀에 젖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숨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숨이
점점 턱턱 막혀왔다. 가슴이 꽉 조이듯 답답해져왔다. 유릭은 가슴
속을 뒤졌다. 다행히도, 제복 안쪽에 단단히 묵어둔 약주머니는 그대로
있었다. 급히 손가락을 밀어 넣어 약 한 알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숨은 여전히 가빴다. 기침이 터지려 했다.
“어디 아파요?”
자그마한 소녀 목소리에, 유릭은 고개를 들었다.
비에 젖은 난간은 차갑고 미끄러웠다. 그리고 그 난간 위에, 푸릇한
어둠에 젖은 하얀 손이 얹혀 있었다. 그 손이 안으로 당겨지더니,
레이스가 달린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비에 엉기고 땀에 뒤덮인 유릭의
이마를 닦기 시작했다.
유릭은 소녀를 보았다. 열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에바보다는 조금 많아 보이긴 했으나, 로웨나보다는 한참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머리카락은 은처럼 차갑고 싸늘해 보였으며, 얼굴은 눈처럼
하얗다. 눈동자는 설산이 품은 맑은 호수처럼 새파랗고, 입술은 핏방
울처럼 새빨갛다. 매끄럽고 둥근 볼에 도톰한 입술과 투명한 눈빛을
간직한,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눈이 마주치자,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브랑쉐 페인.”
유릭이 말했다.
“유릭 크로반.”
“백작님이 그러셨어요. 아주 힘들고,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분이라고.”
“백작님?”
소녀가 푸른 소매 자락을 치켜들며 뱃머리 쪽을 가리켰다. 뱃머리
근방에, 알렉산더 백작이 서 있었다. 마주치자 그가 손을 흔들었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이 바다를 뒤집어엎던 마령을 상대하던 모습은 간곳없고, 늘
그러하듯 우아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브랑쉐가 작고 푸른 새처럼 알렉산더에게 조르르 달려가 그 팔에 매달렸다.
“누굽니까?”
“아, 내 친구의 딸이지. 그리고 지금은 내 양녀이고.”
유릭은 이 백작을 짝사랑하는 에닌이 브랑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매우 궁금해졌다. 브랑쉐는 알렉산더의 팔에 매달린 채로 유릭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작은 여우의 눈처럼 반짝였다.
“애칭은 리시. 다들 그렇게 불렀지. 하지만 이제는 브랑쉐라고 부를
생각이야. 리시라고 부르면 너무 말괄량이 같잖아.”
유릭은 그 이름을 가진 광산의 소녀를 떠 올렸다. 그러나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마르고 초췌한 소녀는, 이 눈송이처럼 아름다운 소녀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게다가 리시라는 이름은 너무 흔하다. 리시키다의
애칭도 리시고, 라슬리에의 애칭도 리시고, 록산느의 애칭도 리시,
그리고 귀족 아가씨들에게 종종 붙여지는 이름인 브랑쉐의 애칭도 리시.
알렉산더가 말했다.
“해가 뜨려나 보군. 새벽이 지나가고 있어.”
유릭은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이제 파랗게 밝아오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는 벌써 불 지른 듯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그 끝에 검은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의 폭풍우가 밀어주기라도 했나 보군요. 벌써 검은 가마우지 섬이
라니.”
“그래. 참 빨리 왔군..... 그런데 올라오다 보니, 꽤 소란스럽더라고.
혹시 나 때문은 아니겠지?”
“프리델라 님께 보고는 할 테지만, 싱그마이어 대령은 아닙니다 배 위에 있는
동안 귀찮을 일은 없을 테니, 그 점에 있어서는 안심하십시오. 시끄러운 이유
는........전혀 다른 이유입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검은 섬이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하늘도 더욱 푸르게 밝아오기 시작
했다. 브랑쉐가 쾌활하게 웃으며 뱃머리 쪽으로 달려갔다. 소녀의 은빛 머
리카락이 진주빛 여명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곧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올 것이다. 햇살이, 정복자의 깃발처럼 솟구치는
아침이 올 것이다.
그 놈이 돌아왔어! 에드먼드 란셀! 그, 그놈이! 그놈이 날 죽이려 해!
그리고 자네도, 자네 숙부도 죽일 거야! 나를 도와, 도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네도 죽어!
유릭은 차가운 새벽하늘, 곧 깨어지고 흩어질 가련한 어둠을 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 하는 겁니까.”
“응?”
뜬금없는 말에, 브랑쉐를 보고 있던 알렉산더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인가.”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릭은 알렉산더에게 인사를 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햇살이 귓전에 와 닿았다. 묘하게 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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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시즌2 마감합니다.
시즌1도 그랬지만, 시즌2의 연재속도도 만만치 않게 느렸군요. 1권 분량도
안 되는 걸, 거의 넉 달 가까이 쓰고 있었으니;;;
2-3주 쉰 다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쉬는 동안 잊지 마세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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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5장 오만한 사자